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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맑을영 Dec 29. 2020

엉킨 스물셋

스물셋이라고 실패도 없겠어


이번 생은 글렀다.
강아지가 되고 싶어.
아니, 다음 생엔  중국에서 판다로 태어날래.
23시간을 자고 1시간은 엄마랑 노는 아기 판다로 태어나겠어.


이상 스물셋 한 해 동안 내가 내뱉은 헛소리들.




2020년은 나에게 삐뚤어진 고개를 선물했다. 무엇이든지 고개를 30도 꺾어 삐뚤어진 시선으로 바라봤다. 그러니 마음에 드는 것이 있을 리가 없지. 인생은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고 했다.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은 나름대로 내가 계획한 범위 내에서 잘 흘러가고 있다고 믿었고 실제로 그랬다. 그리고, 앞으로도 내 계획들은 성실하게 하나씩 완료 체크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항상 그래 왔으니까.


그랬던 나의 생각을 신이 꿰뚫어 보기라도 한 것일까. 보란 듯 비웃으며 바이러스가 퍼졌다. 그 바이러스는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기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인간의 일상과 계획들, 미래, 예정되어 있던 것들까지 침투해 방해했다. 모두가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던 시간들이었다. 그렇다. 모두가 그랬다. 그럼에도 그중에서 가장 불행하고 피해를 입은 건 나야라는 생각은 지울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생각이 나를 지배하기 시작했고, 어느새 나는 스스로 세상에서 가장 우울하고 불행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도 나는 사실 무엇을 하기 위해 발버둥을 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 행동들은 그냥 발버둥일 뿐이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무심코 시도해본. 운도 실력이라 했을까. 1년을 계획한 해외 인턴이 취소되고 다시 지원해본 광고 대행사 인턴이었다. 하필 면접 연락을 받은 날 대구에서는 약 800명의 확진자가 쏟아져 나왔고, 내가 대구에 있다는 이유로 면접은 취소되었다. 그리고 취업 시장은 얼어붙었다. 대학교 3학년 휴학생이 설 자리는 없었다. 2019년의 내가 계획했던 2020년의 나는 이렇게 무기력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렇게 이미 없어져버린 환상 속에서 나는 나를 탓했고, 주변을 탓했다.



지난 5월, 결국 나는 불면증에 시달렸다. 절대 풀 수 없는 엉킨 실을 가지고 엉망인 옷을 만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바닥에 머리만 대면 잠에 빠지던 나는 아침이 밝아와도 잠에 들 수 없었다. 이렇게 무의미하게 흘러가는 시간들이 야속했고, 붙잡고 싶었다. 그래서 또 다이어리를 꺼내 들었고, 내일을 계획하기 시작했다. 일종의 강박이었다. 하지만 곧, 이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으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다가왔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의 계획들이 무너진 이 상황을 핑계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시간이 아깝다면서 그 시간 동안 지금 할 수 있는 것들을 무시했다. 예를 들어 친구와 약속이 취소되었으면 취소된 것을 탓하며 시간 낭비를 할 것이 아니라 일전부터 가보고 싶었던 카페와 서점들을 찾아 가보면 된다. A가 안되면 B를 택하면 된다.


하지만 그건 나에게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A가 안돼도 A를 하는 것이 뚝심이고,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래서 A가 안되면 B를 하는 것은 나에게 융통성 혹은 기회가 아니라 나에 대한 얄팍한 믿음일 뿐이라고 여겼다. 그러다 한 방송국 PD의 인터뷰를 읽게 되었다.


저는 PD가 꿈이어서 여러 방송국에 지원을 했었어요. 그런데 결국 다 떨어졌고, 그냥 대기업 광고 대행사에서 일했어요. 그런데, 계속 PD가 하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도전했고, 결국엔 이렇게 일을 하고 있네요.


이 인터뷰를 찾아본 후 다른 직장인들의 이야기도 찾아보며 깨달았다. A가 안돼도 A. A가 안되면 B. 둘 중 무엇을 선택하든 내 인생은 여전히 계속 흘러간다는 것을. 그 깨달음은 나에게 곧 이 질문을 던졌다.


내가 기어이 A를 선택한다 해도 그 선택을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나의 답은 '모름'이다. 선택에 대한 후회는 그 순간의 내가 할 뿐이지, 지금의 내가 하는 것이 아니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의 나에게 조금 더 집중하고 살펴보기로 결정했다. 지금 내가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다녔다. 적어도 지금의 선택들에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정말 제대로 엉켜버린 실 같았던 나의 스물셋이었다. 하지만 엉킨 실로 삐뚤빼뚤하게 완성된 나의 2020년이 마냥 싫지 않다. 엄마가 항상 했던 말이지만 이해되지 않았던 '인생은 네 맘대로 되는 게 아니야'라는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한 해였다. 그리고, 비록 엉켜버리고 뜻대로 되지 않은 나날들이더라도 나의 삶은 여전하게 흘러가고 있으며 그것도 꽤 괜찮을 수 있는 위기이자 기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2021년 끝자락의 나도 2020년의 나처럼 하나쯤은 무언가를 깨닫고 배울 수 있는 한 해를 보냈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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