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에게 다가가야 할 때
폐암 말기 진단을 받은 50대 아줌마 오세연(염정아 분)이 있다. 음악을 하고 싶었지만 아빠의 강경한 반대로 고3 수험생 가면을 쓰고 지하 연습실에서 몰래 친구들과 음악 연습을 계속해 나가는 말없는 첫째 아들 서진이(하현상 분) 뒷바라지에 여염이 없고, 고등학교 교복 치마를 미니 스커트처럼 끌어올려 입으며 나름 반항의 날개를 한없이 펼치는 천방지축 둘째 딸 강예진(김다인 분)을 위해서는 점심 도시락에서 시작하여 체육복까지 일일이 신경 써서 챙겨야 하고, 거듭된 사법고시 낙방 후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동사무소 직원으로 일하는 남편 강진봉(류승룡 분)은 자기를 하인처럼 대했지만 하나뿐인 남편이라 믿었기에 30년간 받들며 살아왔다. 살 수 있는 시간이 고작 몇 개월에 불과하다는 소식을 접한 세연은 이렇게는 죽을 수 없다는 생각에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열 가지 목록을 작성한다. 살면서 한 번도 사본 적 없는 고급 옷과 구두를 남편에게는 상의하지도 않고 신용카드를 사용해서 구입했지만, 고급 옷을 입고 고급 구두를 신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곳은 집 거실에 불과했다. 열 가지 목록 중 하나는 고향 목포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 연모했지만 고백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했던 오빠를 다시 한번 찾아가 만나는 일이었다. 남편 진봉에게 함께 목포로 가자고 말했지만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한다며 남편은 비웃었다. 그러다 쓰레기통에서 세연이가 쓰다 버린 죽기 전에 하고 싶은 일 열 가지 목록을 읽게 된 진봉은 세연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세연이가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말에 투정이란 투정은 있는 그대로 다 부리면서도 아내의 열 가지 꿈을 실현시켜주기 위해 애쓴다. 그렇게 진봉과 세연은 결혼 후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부부 여행을 떠났다.
이 영화를 보기 며칠 전에 이어령 선생님이 죽기 전까지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쓴 낙서장을 엮어 만든 책 <눈물 한 방울>과 그 책을 쓰는 동안 김지수 작가를 만나 나눈 대화를 책으로 엮은 <이어령과의 마지막 수업>이란 책을 읽었다. 죽음을 외면할 대상이 아니라 받아들이고 직면해야 할 대상이라 생각한 이어령 선생은 적어도 이런 생각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용감하게 죽음에 대한 자기의 생각을 자기만의 낙서장과 김지수 작가에게 기록했다. 앞으로 살 수 있는 시간이 2개월 남짓에 불과한 세연이 남편 진봉에게 하는 말과 행동은 이어령 선생의 말과 행동을 떠올르게 했고, 내 마음에서 하나로 엮인 세연과 이어령 선생의 말과 행동은 2시간가량 계속해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으로 나를 당황케 했다. 아내가 조만간에 죽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여만 하는 진봉은 죽음을 향해 뚜벅뚜벅 용감하게 걸어가는 세연을 한결같이 냉담하고 차갑게 대했다. 신혼여행으로 찾아갔던 부산 해운대 바닷가에서 세연을 등에 업은 채로 해변가를 걸으며 진봉이 말했다. 세연이에게 뚜벅뚜벅 걸어오는 죽음을 인정할 수 없었고,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고. 그의 말속에서 세연이가 아프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을 때처럼 세연이를 대한다면 세연이를 향해 걸어오는 죽음을 조금 더 오래 멀리 둘 수 있지 않을까란 바람이 숨어 있었다. 처가 아플 때면 괜히 화가 나는 내 마음속에는 아내를 아프게 한 게 나라는 묘한 죄책감이 작용한다.
죽음. 모두가 결국에는 가야만 할 장소이지만 살아있는 중 그 장소가 어디에 있는지 어떤 곳인지를 아는 이는 아무도 없다. 하루하루 무관심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내 삶에는 관심이 없다. 내 삶에 관심이 있는 이는 이 세상에 오직 한 명뿐인데, 그게 나다. 이어령 선생은 홀로 외롭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담하고 용감하게, 당신을 향해 걸어오는 죽음을 대면하려고 노력했다. 아직 읽지 않은 책이 많다는 사실을 한탄했고, 아직 미처 쓰지 못한 글들이 많음에 조바심이 나 죽음더러 조금 늦게 찾아와 달라고 부탁했다. 시간과 죽음은 무관심했고, 이어령 선생님의 낙서장은 어느 날 갑자기 새로운 낙서가 더해지지 않았다. 세연은 자기에게 걸어오는 죽음에게 태연했다. 태연함을 무기로 살아서 해 보고 싶었던 열 가지 일을 행동에 옮겼고, 실현했다. 열 가지 바람을 현실로 옮긴 후 세연이가 깨달은 건 자기의 첫사랑이 지난 30년간 함께 살아온 남편이란 사실이었다. 죽는 순간까지 오직 한 사람을 사랑했다는 사실. 오늘 우리는 쉽게 납득할 수 없는 대목이다. “나의” 삶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믿는 우리에게 다른 이를 위한 희생은 불필요한 일이다. 한국에서 한 감리교회를 돌보며 살아가는 친구가 언젠가 내게 말했다. 애인 없는 유부녀, 유부남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려운 게 오늘 한국의 현실이라고. 심지어 아내에게 한 여자 교인이 남자 친구가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라고 웃음 반 진담 반 같은 유혹 어린 말을 건넸단다.
영화는 세연이 죽음과 손잡고 삶을 떠나기 전에 그녀의 삶과 죽음을 동시에 축하하는 축제의 장으로 끝난다. 세연을 아는 이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세연의 작별 인사를 들었고, 다 함께 음악에 맞추어 신나게 춤추며 노래 부른다. 세연의 죽음을 통해, 세연의 죽음을 위해 많은 이가 한 자리에 모였다. 모두 서양 사교복을 입고 있었고 서양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지만 이들을 하나로 엮는 실가닥은 한국의 전통 ‘굿’, 신명 나는 굿 한 판이었다.
세연이가 남편에게 한 작별인사 한 구절은 평소 내가 처를 향해 품고 있는 마음과 똑같았다. 당신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하니까 내가 떠나면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잘 살다가 다시 만나자고. 2002년에 처음 만나 2006년에 결혼한 처는 진봉처럼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다. 똑똑하고, 사려심과 배려심이 깊고, 관계의 소중함을 따뜻한 부모님 밑에서 태어나는 순간부터 배웠기에 누구든 따뜻하게 대할 수 있는 마음밭이 넓은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만약에 내가 이 세상에서 삶이 끝나는 날까지 함께 있어주지 못한다면, 좀 더 나은 남자를 만나 좀 더 나은 누군가와 함께 꾸려가는 삶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난 생각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난 그런 말은 더는 하고 싶지 않다.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처를 위하고 지키며 함께 살고 싶기 때문이다. 문득 내 고항 부산 해운대 바닷가를 처와 함께 걷고 싶다. 그럴 수 있는 날이, 언젠가는 다가오겠지.
2022.12.10.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