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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흐르는 강물처럼 Dec 03. 2023

Ordinary People (1980)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속 평범한 슬픔과 상실?

콘레드Conrad가 정신병원에서 4개월을 보낸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형 벅Buck과 함께 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날 호수에서 보트를 타러 나갔다가 돛이 부러져서 보트가 뒤집어졌고 더는 보트에 매달려 있을 힘이 없던 벅은 동생 콘레드의 손을 놓고 물속으로 사라졌다. 평범한 미국 중산층 가족에서 난데없이 들이닥친 첫째 아들의 죽음은 가족을 모두 새로운 곳으로 데려갔다. 벅의 장례식장에서 울지 않았던 벅의 엄마 베스Beth와 벅의 동생 콘레드. 콘레드는 얼마 후 자살을 시도했고 병원에서 4개월을 보낸 후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콘레드는 가끔씩 여전히 병원이 그립다. 모든 걸 숨길 수 있는 곳이 병원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형 벅과 함께 했기에 끝없는 도전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던 수영은 이제 지겹고 따분한 운동으로 변했다. 매일밤 형과 함께 폭우 속에서 보트에 매달린 채 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악몽에 시달린다. 꿈의 마지막 장면을 알기에 콘레드는 결말이 오기 전에 잠에서 깨어난다. 하지만, 현실에는 바뀐 게 아무것도 없다. 수업 시간에도, 길거리에서도, 집에서도 형 벅과의 추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과 풍경을 마주칠 때면 어김없이 형이 생각난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미안함. 물속으로 형이 사라지는 걸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자신이 영 못마땅하다. 안정감을 느낄 수 없고 계속해서 이리저리 헤매며 안절부절못하는 자기에 끝없이 화가 난다. 유일하게 예상밖의 즐거움을 느끼는 시간은 학교 합창단에서 테너로 노래를 부를 때다. 신을 믿지 않지만 신을 찬양하는 노래를 즐겁게 부를 수 있는 시대, 신의 본질은 사라지고 뼈대만 남은 사회가 미국에서는 1980년에 이미 도래했다는 사실에 살짝 놀랐다.


첫째 아들 벅을 먼저 떠나보냈지만, 베스Beth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는다. 흔들리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에게 형의 죽음을 이겨내지 못하고 자살을 시도한 콘레드는 마냥 귀여워할 수 없는 아들이다. 벅은 죽었지만 자기와 자기 가족의 삶은 여전히 앞으로 전진해야 한다고 믿기에 주말이면 어김없이 사교모임에 참석한다. 콘레드가 정신과 의사를 만나 상담을 받는 게 좋을 거 같다고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사교 모임이 한참 진행 중인 집 앞에 도착하면 얼굴색을 바꾸고 차에서 내리기 전에 남편에게 말한다. “자, 지금부터는 웃어야 해요.” 사교 모임장에서 만난 사람들이 콘레드에 관해 물을 때도 얼굴에 만연의 웃음을 띠며 대답한다. “네, 그 아이는 지금 정말 잘 지내요. 수영도 다시 시작했고. 다 잘하고 있어요.” 하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베스는 남편을 냉정하게 비난하고 질책한다. 경솔하게 다른 사람에게 자기 가족의 사생활을 말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야 하고, 누구도 알아서는 안 되는 사생활을 남편은 솔직하게 다른 사람에게 말했다. 


콘레드의 아빠 캘빈Calvin은 벅이 갑작스러운 사고로 죽기 전까지 항상 삶에 감사했다. 참 운이 좋은 사람이 자신이라고 믿으며 하루하루에 충실하려고 노력했다. 벅의 장례식이 열리는 날 아침에 아내가 자기가 입고 있던 옷과 구두를 다른 색깔로 갈아입으라고 말했을 때도 아무 말 없이 아내의 요구를 따라줬다. 하지만, 첫째 아들 벅의 죽음은 캘빈을 삶의 갈림길로 내몰았다. 형의 죽음을 목격했던 콘레드는 생존자가 느끼는 자책감survival guilt으로 힘들어하며 삶의 의미를 상실한 채 안절부절못하며 이리저리 헤매고 있었다. 어떻게든 아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은데,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질 않는다. 첫째 아들의 죽음 앞에서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고서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루하루를 계획하고 계획한 바를 실천에 옮기며 사는 기계 같은 아내를 감싸주고 싶은데, 그건 아들 돌보는 것보다 더 어렵다.


한 사람의 죽음이 남긴 상실감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감당하던 이 가족에서 새로운 삶의 방식을 소개한 이는 정신과 의사 타이론 버거Byrone C. Berger이다. 머뭇거림 끝에 버거를 찾아간 콘레드가 말했다.


“좀 더 내 삶을 잘 통제하고 싶어요.”

“통제는 참 어려운 주제인데… 보통 통제는 감정 부재와 연결되어 있거든. 화요일과 금요일, 이 시간에 만나는 건 어떨까?”


“어디에도 마음을 붙일 수가 없어요. 진정제가 필요해요. 처방전 하나 적어줄 수 있죠?”

“아직 난 네가 진정제가 필요한지 그렇지 않은지에 관해서는 잘 모르겠는데… 뭐가 그리 널 힘들게 하는지 어디 한 번 말해 보는 건 어떨까?”


타이론의 무관심과 관심 사이를 오가는 객관적인 태도를 마주하면서 콘레드는 조금씩 형의 죽음에 관해 말하기 시작했고, 형에 대한 기억을 언어로 옮기는 건 언어가 몸속에서 끌어내는 다양한 감정과 마주치지 않고서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마치 꼭 구멍 하나에 빠진 거 같아요. 그 구멍에서 나오고 싶은데, 구멍은 갈수록 커져요. 그래서 결국 어떻게 나가야 할 지도 알 수 없고 나갈 방법도 없는 거 같아요.”

“그래? 그럼, 그 구멍이란 게 대체 무엇일까?”


그 구멍은 형 벅의 죽음이었고, 형의 존재감에 가려져 있던 자기 정체성이었고, 태어난 순간부터 지금까지 함께 살아온 가족과의 피상적 소통이 습관화한 관계성이었다. 호스피스 의사 김여환이 <천 번의 죽음이 내게 알려준 것들>에서 했던 말이 생각났다. 죽음은 우리가 꼭꼭 숨겨놓은 모든 걸 드러낸다. 죽음 앞에서 우리가 숨길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장례식 예배를 집례 할 때면 죽음을 둘러싼 가족들의 태도와 몸짓 속에서 난 그들이 죽은 이와 맺어온 관계를 묘하게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죽음은 죽은 자와 산 자가 그 순간까지 일구어온 관계를 담담하게 까발린다.


정신과 의사 타이론의 상담기법이 유독 내 눈을 사로잡은 건 5년간 뉴욕에서 수련한 정신분석학 때문이다. 무엇보다 먼저 전문성이 결여된 거처럼 보이는 콘레드를 대하는 그의 모습이 신선했다. 콘레드가 처음 상담 문의를 위해 전화를 걸었을 때, 타이론은 다른 환자와 상담 중이었다. 환자와 상담 중에는 환자에게만 집중하라는 정신분석학 기본 원칙을 그는 지키지 않았다. 콘레드가 사무실에 찾아와 상담을 할 때도 타이론은 한 자리에 앉아 있질 않았다. 화장실을 다녀오기도 하고, 일어나 커피를 타서 마시기도 하고, 아무튼 제법 산만했다. 두 사람 사이 상담이 실질적으로 시작했을 때 무릎을 치며 깨달았다.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는 콘레드 앞에서 조금의 미동도 없이 상담을 진행한다면, 과연 콘레드는 그걸 참아낼 수 있었을까? 엄마 베스의 또 다른 현현을 타이론에게서 발견했을 테고 진짜 상담은 시작하기도 전에 끝났을 테다. 두 번째는 정신병원에 머물 때 만났던 캐런Karen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알게 된 콘레드가 밤늦게 다짜고짜 타이론에게 전화를 해서 만나고 싶다고 말하는 장면이다. 정해진 상담 시간 외에 내담자가 응급상황이라고 상담사에게 연락할 때 상담사가 대처하는 방식은 정형화되어 있다. 상담을 하기로 약속한 시간이 아니기에 상담을 하면 안 된다. 흥분한 내담자를 우선 안정시키고 응급상황이라면 그에 맞게 도움을 얻을 수 있는 단체로 연락하도록 조치를 취해라고 배웠다. 타이론은 그러지 않았다. 콘레드가 어디 있는지를 물었고, 자기 사무실로 오라고 말한 후 옷을 갈아입고 자기 사무실로 향했다. 거리에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늦은 밤이었다. 마지막은 생존자가 느끼는 죄책감으로부터 콘레드가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을 발견할 수 있도록 타이론이 돕는 장면이다. 


“그렇지. 네 형은 더는 네 손을 붙잡고 있을 힘이 없었을 수도 있잖아. 그래서 손을 놓았을 수도 있잖아… 형이 사라지고 난 다음에 넌 뭘 했지?”

“…”

“생각해 봐. 생각할 수 있어. 생각해 내야 해! 자, 그때 넌 뭘 했지?”

“… 그때 난 버텼어요. 보트에서 떨어지지 않았어요.”
“그래! 넌 포기하지 않았던 거야. 넌 끝까지 버텼으니까!”

“왜? 왜? 왜 날 이렇게 대하죠?”
“왜냐만 나에게 넌 중요한 사람이고, 우린 친구잖아.”

“친구요?”
“그럼.”


둘은 서로를 끌어안았다. 


집으로 돌아온 콘레드는 엄마를 끌어안았다. 


엄마가 잠시 집을 떠나는 걸 뒤뜰에서 바라보는 아빠에게 다가간 콘레드는 이제 아빠도 끌어안았다. 


슬픔은 죄가 아니다. 슬픔에서 비롯된 무기력감도 죄가 아니다. 슬픔에서 비롯된 무기력감이 만들어낸 무의미란 구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것도 죄가 아니다. 슬픔도, 무기력감도, 무의미도.. 이 모든 게 아무것도 아니라며 앞만 보고 달리는 게 죄다. 그러다가 캘빈은  아침 달리기에서 잔디 위로 쓰러졌다. 너무 많은 생각은 그의 자연스러운 움직임을 방해했다. 그런 후 캘빈은 타이론을 찾아갔다. 그날 밤 집에 돌아온 캘빈은 아내 베스에게 물었다. 왜 벅의 장례식 날 아침에 벅보다도 자기가 입고 있는 옷과 신발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냐고 물었다. 슬픔과 무기력감, 무의미에 빠져 허우적대는 우리를 인정했을 때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을 수 있다. 왜?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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