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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성 Dec 14. 2021

엄마와 함께한 마지막 가을 운동회

나를 위한 글쓰기

  부산 자갈치 시장에서 마을버스를 타고 경사진 도로를 지나면 산자락이 나온다. 산자락 밑에 반짝이는 별 만큼이나 많은 집이 앞뒤로 빼곡하게 붙어있다. 그 가운데 우리 가족이 살았다. 내가 태어난 곳은 부산 ‘감천동’이다. 지금 그곳은 ‘감천 문화마을’이라는 이름으로 부산의 관광 명소가 되었다. 부산을 찾는 다양한 사람들이 그곳에 들러, 이전에 누가 살았을지 모르는 어느 집 앞에서 멋진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고, 좁다랗고 미로처럼 빼곡한 골목길 여기저기를 구경하면서 즐겁게 이야기꽃을 피운다. 그들의 얼굴은 행복함으로 활짝 피어있다. 나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감천동에서 유소녀 시기를 보냈다. 지독하리만큼 가난했고, 처절하게 벗어나고 싶었던 그곳. 나의  유소녀 시절에는 단 한 번도 ‘행복했던 순간이 없었다’라고 여기면서 지금까지 살아왔다. 하지만 ‘나를 위한 글쓰기’ 를 진행하면서 나의 10대 시절을 되짚어 보았다. 빛바랜 기억 속에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이 빛을 내면서 나에게 다가왔다.

 

  1988년 어느 가을, 국민학교 가을 운동회가 열렸다. 지금은 학교 운동회가 큰 행사가 아니지만, 그 당시 운동회는 학교뿐만 아니라 마을의 큰 축제였다. 국민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제법 긴 시간 동안 학년 전체 친구들과 넓고 커다란 운동장에서 무용 연습을 했다. 난생처음 친구들과 함께 얼굴을 맞대며 동작을 맞추는 것이 부끄러웠지만 참 재미있었다. 드디어 갈고닦은 기량을 선보이는 운동회 당일 아침, 떨리고 흥분된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부산한 교실에서 알록달록한 무용복을 입고 있는데, 엄마가 교실 문을 열고 나에게로 왔다. 엄마 손에는 요구르트가 들려져 있었다. 딸래미 목마를까 봐 들고 온 것이었다. 엄마는 요구르트 주둥이를 감싸고 있던 껍질을 벗기고 나의 고사리손에 쥐어주었다. 그런 다음, 허리 리본을 멋스럽게 매듭짓고 이리저리 헝클어져 있던 머리를 단단하게 묶어 주셨다. 내 몸에 닿던 따뜻한 엄마의 손길은 나의 심장을 말랑하게 만들었다.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반 친구들과 나는 허리에 손을 올린 채, 두 줄로 운동장으로 나갔다. 교실 건물 밖 입구에서 엄마가 나를 불렀다, “효숙아!” 하며 손을 마구 흔들었다. 엄마는 환하게 웃고 있었고 엄마의 미소는 나의 가슴에 깊게 새겨졌다. 그때 나는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과 누군가가 나를 지켜 주고 있으며, 세상이 나에게 낯설지 않고 나도 세상에 낯설지 않았다. 그리고 친구들에게 학교 선생님들에게 위풍당당했으며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전능감을 느꼈다.

 

  운동회의 꽃은 점심시간이다. 점심시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박 터트리기’는 운동회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순간이다.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함성을 지르며, 우리는 각자의 진영에서 청색과 흰색의 머리띠를 두르고 박을 향해 힘껏 모래주머니를 던졌다. 나도 상대편 진영에 질 수 없다는 결의를 다지며 젓 먹던 힘까지 다해 모래주머니를 던졌다. 어느 팀이 먼저 박이 터졌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날의 우레와 같은 함성과 유쾌하고 즐거웠던 순간이 나의 몸과 마음에 고스란히 기억되어 있을 뿐이다. 


  운동회는 엄마, 아빠, 동생, 오빠, 언니, 누나,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이모, 고모, 이웃사촌 누구라고 할 것 없이 함께할 수 있었다. 그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아이들을 위해 김밥을 싸고 다양한 먹거리를 준비해 서둘러서 학교에 왔다. 아직 운동회가 시작되기 전인데도 가족들로 운동장은 붐볐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조금 더 잘 보이는 곳, 햇볕이 들지 않고 그늘진 곳을 먼저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박이 터지고 아이들은 보물을 찾아가듯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가족들에게로 갔다. 나도 엄마와 오빠 그리고 남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주위를 두리번 거렸다. 멀리에 있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뛰어갔다. 돗자리에 펼쳐져 있던 김밥과 통닭, 새콤달콤한 과일이 나의 침샘을 자극했다. 나는 때꾸중물 가득한 손을 뻗어 바로 음식으로 직행했다. 엄마의 잔소리에 아랑곳하지 않고 볼이 터질 정도로 음식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입을 움직였다. 8살 인생, 처음으로 가정이 아닌 학교라는 작은 사회에서 새로운 인생을 맛보았고 처음으로 학교 운동회를 경험했다. 모든 것에서 새롭고 낯설었던 그때, 엄마가 내 옆에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에게 힘이 되었다. 


  국민학교 1학년 가을 운동회는 나에게 엄마와 함께한 처음이자 마지막 운동회가 되었다. 다음 해 가을이 오기 전, 엄마는 나에게 ‘볼일 보고 오겠다는’ 말을 남긴 채 집을 나갔고 다시는 집으로 돌아 오지 않았다. 엄마가 집을 나간 다음 날부터 나의 인생은 모든 것이 틀어져 버렸다. 그리고 엄마와 함께 보냈던 8년이라는 시간을 내 마음속에서 지워 버렸다. 결코, 그 시간은 나에게 행복했던 적이 없었으며 나의 유소녀 시절은 불행과 고통뿐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나의 심장은 굳어져 버렸고 타인의 감정을 느낄 수 없게 되었다. 오로지 내가 느낄 수 있었던 감정은 분노와 수치심, 자괴감이었다. 그렇게 나는 국민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를 지나왔다. 하지만 지금, 나는 말 할 수 있다. 내 생애 최고의 순간은 엄마와 함께했던 ‘가을 운동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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