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위한 글쓰기
1989년 어느 주말 오후였다. 방에는 찐한 알코올 냄새가 진동했고, 날카롭고 매서운 기운이 감돌았다. 방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나는 숨을 죽이며 침을 꿀꺽 삼켰다. 무슨 일이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작은 키에 왜소한 체구를 가진 아빠는 술만 드시면 사나운 맹수로 돌변했다. 그날도 아빠는 무엇이 그렇게 본인 화를 돋구었는지,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고 욕설을 되새김질했다. 순간 아빠는 부엌에서 설거지하고 있던 엄마를 때리기 시작했다. 속수무책으로 맞고만 있던 엄마는 그대로 바닥에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우리 남매는 아빠 앞에서 한없이 무기력했다. 엄마를 때리지 말라고 소리치지도 못했고, 바보처럼 울기만 했다. 다행히 동네 사람들이 아빠의 행동을 저지했다. 이내 약국에서 약사 선생님이 오셨고, 쓰러져 있던 엄마에게 우황청심환을 먹였다.
며칠이 지났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왔는데 엄마가 외출복을 입고 마루에 서 계셨다. 엄마는 허공만 바라볼 뿐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밑에서 올려다본 엄마의 얼굴은 그늘지고 광대는 더 도드라져 보였다. 평상시 아빠는 엄마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하루도 거르지 않고 욕설과 폭력을 행사했다. 더 이상 버틸 힘이 없었던 것일까? 잠시 볼일 보고 온다던 엄마는 다시 집에 돌아 오지 않았다. 그날 나는 알고 있었다. 엄마가 멀리 떠난다는 것을. 하지만 나는 엄마를 붙잡지 못했다. ‘엄마, 가지마!’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나왔지만, 입밖에 내뱉지 못했다.
5년 전,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는 주체할 수 없이 울고 있었다. 나는 무슨 일이냐며 다그치며 물었다.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는 말과 스스로 마지막을 준비하고 있다는 말’이 내 귀에서 윙윙거리며 맴돌았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는 알 수 없는 화가 치밀어 올랐다. 오빠와 전화를 끊고, 곧바로 한 통의 전화가 왔다. 나는 엄마임을 알았지만 받지 않았다. 그 전화가 마지막이 될지 꿈에도 생각 못했다. 그리고 다음 날 엄마는 스스로 생을 마감하셨다. 나는 나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몸과 마음이 허공에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오빠와 남동생에게 미안하다는 말과 이제라도 같이 살자는 오빠의 말에 ‘몸과 마음이 병들었다며, 짐이 되기 싫다는 말’을 남기고 전화를 끊었다.
영안실에서 눈을 감고 누워 있는 엄마를 만났다. 이상했다. 이분이 나의 엄마가 맞는지 의심이 들었다. 눈물도 나지 않고 아무런 감정도 느낄 수 없었다. 생각이 멈춰 버렸다. 내가 그려왔던 엄마의 모습은 이 모습이 아니었다. 내 눈앞에 있는 엄마의 얼굴은 고통에 일그러져 퉁퉁 부어 있었고, 머리가 하얗게 세어 있었다. 장의사가 엄마의 이름을 부를 때, 나는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가슴에 담고 있었던 엄마의 이름 석자가 나의 의식과 감정을 깨웠다.
엄마의 유품은 그녀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말해 주고 있었다. 엄마는 결핵과 백내장을 앓고 있었다. 그리고 주민등록은 말소된 상태였다. 내가 엄마를 찾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나도 한 아이의 엄마가 된 후, 여자로서 엄마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 엄마가 너무 보고 싶었다. 수소문 끝에 엄마의 주소가 울산으로 되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남편과 함께 엄마를 볼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울산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실망만 안고 다시 돌아왔다. 그곳에 엄마는 살지 않았다.
나는 성인이 된 이후로 엄마를 찾아 헤매는 꿈을 자주 꾸었다. 꿈의 시작은 엄마와 함께 살았던 마루가 딸린 집 앞에서였다. 엄마가 집에 왔는지 확인하기 위해, 마루를 밟고 올라서서 미닫이문을 열었다. 하지만 집에는 아무도 없었고 차가운 정적만 흘렀다. 나는 집안 이곳저곳을 뒤졌다. 혹여나 엄마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한참 동안 가슴을 졸이며 찾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나에게 엄마라는 존재가 없다는 사실이 무척이나 서글펐다. 나는 지금까지도 후회한다. 마루에서 엄마를 붙잡지 못했던 것을. 내가 만약 엉엉 울면서 가지마라고 매달렸다면 엄마의 삶도 우리 남매의 삶도 달라지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