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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세영 Feb 19. 2021

보았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에 대해

매일 가던 길에 신한은행이 있었다.


얼마 전에 테헤란로에 갈 일이 있었다. 처음 가보는 OO빌딩 11층에서 거래처 담당자분과 교육 미팅을 하기로 했다. 지하철 선릉역에 내려서 약속 장소가 있는 건물을 향해 걸었다. 약속을 했던 상대방이 건물 1층에 GS편의점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삐죽삐죽하게 솟은 빌딩 숲 속을 숨차게 걷다가 슬슬 걱정이 되었다. 네이버 지도를 보니 OO빌딩이 나올 때가 됐는데, 도무지 GS편의점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혹시 지나친 건 아닐까. 가뜩이나 길치인데, 오랜만에 서울 나들이에 시골쥐가 상경한 듯 정신이 없었다. 


누군가에게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쁘게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중에 이 근처를 잘 알 것 같아 보이는 사람을 물색했다. 둥근 얼굴에 점잖은 표정, 검은테 안경을 낀 아저씨를 포착. 40대 초반쯤 되어 보였고, 검은색 코트를 입고 있었다. 인사를 하며 다가가 근처에 GS편의점이 있는지를 물었다. 상대방은 조금 당황스러워하며, 여기에 편의점이 있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조금 더 걸어가 볼까 하다가 그대로 눈 앞에 보이는 높은 건물 1층으로 들어갔다. 경비 아저씨에게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머리가 희끗하신 아저씨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그런 편의점은 없다며 큰 소리로 말씀하셨다.


길을 잘못 들은 건가 조바심이 났지만, 조금만 더 가보기로 했다. 건물을 나와서 오른쪽 모퉁이를 바라보았다. 바로 옆 건물이 이어져 있었는데, 입구를 보고 깜짝 놀랐다. 거기에 버젓이 GS편의점이 자리 잡고 있었던 거다. 내가 찾고 있던 바로 그 OO빌딩 1층이었다. 이럴 수가. 바로 옆에 편의점이 있었다니. 1분도 채 안 되는 거리였다. 지나가던 행인과 옆 건물 경비아저씨 모두 편의점의 존재를 모르고 있었다는 게 신기했다. 그들 또한 나처럼 그 거리에 익숙지 않은 사람들이었을까. 





어제 비슷한 일이 있었다. 오전에 신한은행에 갈 일이 있었다. 신한은행은 동네에서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네이버로 가장 가까운 지점을 검색했다. 나의 주거래은행인 우리은행과 남편의 주거래은행인 국민은행은 늘 다니던 곳이다. 동네에 있는 우체국, 농협 등은 볼일이 있어서 많이 가봤는데, 신한은행은 가본 적이 없었다. '신한은행은 얼마나 멀리 있을까.' 검색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자동차에 올라탔다. 


그런데 왠열. 검색을 통해 찾은 신한은행은 우리 집 코 앞에 있었다. 혹시 ATM기기만 있는 건 아닐까.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분명히 신한은행 OO지점이라고 적혀있었다. 단지 후문으로 나가서 횡단보도 하나만 건너면 3년 전쯤 조성된 상가구역이 있었다. 놀랍게도, 아주 큰 건물에 신한은행 간판이 큼지막하게 보였다. 그 순간 현타가 왔다. 


여긴 내 구역이었다. 즐겨 찾는 파리바게트 베이커리도 있고, 내가 좋아하는 투썸플레이스도 있다. 바로 옆에 커다란 롯데리아 건물도 있고, LG전자 대리점도 있다. 그렇게 죽순이처럼 오갔던 길에 신한은행이 자리 잡고 있었다. 물론 그 거리를 오고 가면서 신한은행 건물을 보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막상 신한은행에 가야 된다고 생각했을 때,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도 못했던 거다. 한 번도 들릴 일이 없어서 의식에 없었던 걸까.


매일 가는 길에, 매일 마주치는 건물들과 간판들. 나는 그것을 보면서 다녔지만, 거기에 존재하는 것들을 인식하지 못했다. 지나갈 때마다 신한은행 건물을 쳐다보았었지만, 막상 가야 될 일이 생겼을 때 생각했다. '도대체 신한은행은 어디에 있는 걸까. 우리 집에서 엄청 멀리 있지는 않을까.'라고. 그래서 자동차를 타고 가려고 차키까지 가지고 나왔던 거다. 


인생을 살아가는 것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경험을 하면서 살아도. 내 의식의 세계에 들어오는 것들만 경험할 뿐이다. 오로지 의식이라는 작은 틀 안에 걸러지는 것들만 인식하며 살아간다. 그렇게 불완전한 시각과 인식, 기억력의 한계를 갖고 살아가는구나. 내가 인식하는 세계의 한계를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우리 동네에 신한은행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이미 존재하고 있었지만, 내가 아는 세계에 비로소 편입된 것이다. 이제 나는 동네를 걸어 다닐 때마다 이미 그 자리에 있었던 신한은행을 제대로 인식하게 될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이 근처에 신한은행이 어디 있나요?'라고 묻는다면, 나는 아주 자세하게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다. 불과 어제까지만 해도 누군가 물어왔다면, '글쎄요. 이 동네에서 신한은행을 본 적이 없는데요.'라고 말하지 않았을까. 


왠지 새로운 세상을 발견한 것 같다. 이미 있었지만,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세계. 언제부터 우리 동네에 신한은행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나의 세계에 신한은행은 오늘부터 발견된 것이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본다. 이미 존재하지만, 내가 모르고 있는 세계는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보았지만 보지 못했던 것들은 또 얼마나 많을 것인가. 


내가 보는 세상은 얼마나 협소한 것인지를 깨닫는다. 내가 보는 세상과 관점만이 전부가 아님을, 더 큰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말기를. 그동안 내가 보았던 것들만 진실이라 여기며 마음의 문을 닫아걸지 말고, 늘 새로운 눈으로 상대방과 세상을 바라볼 수 있기를. 매일매일 조금씩이라도 세계를 넓히며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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