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동아줄에 의지한 세 명의 노동자가 햇빛을 온몸으로 받으며, 달궈진 콘크리트의 열기를 품에 안고서 페인트를 칠하고 있다. 언제였던가. 그리 멀지 않은 시기였던 것 같은데 아파트 외벽에 페인트 작업을 하던 사람의 동아줄이 끊어진 사건이 생각난다. 정확히는 누군가가 인부의 생명줄을 잘라낸 사건이다. 일면식도 없는 무고한 노동자의 생명줄을 끊은 사람의 심리는 또 뭐란 말인가.
우리가 공포물이나 서스펜스를 즐기는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는 안전함을 느끼기 위해서다. 나는 공포스러운 허구로부터 안전하다는 안도감이 있기에 우리는 끔찍한 상황마저도 희열로 받아들일 수 있다. 누군가의 힘든 노동을 지켜볼 때도 일면 이런 심리가 작동한다. 나는 저 고된 노동으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안도감이 등짝을 쓸어내린다. 등짝 맞을 일이다. 내 보금자리를 단장해 주는 이들을 내 심란한 마음에 위로로 삼으려 할 뻔한 내가 아찔하다.
안타깝지만 인간의 뇌는 자기 하숙인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게끔 프로그래밍되어 있다. 그런데도 타인을 위해 희생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이들의 뇌는 어떻게 생겨 먹은 걸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뇌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 우리는 학습을 통해, 상상력을 통해 타인을 나처럼 생각하는 이를테면 역지사지라는 걸 할 수 있게 된다.
소설창작수업 첫 시간을 상상력에 관한 이야기로 시작했었다. 슈타델의 사자를 보여주며 집단적 상상력이 문명의 근간이었으며 이 집단적 상상력을 가능하게 한 허구는 유연한 언어체계였다고 설명한 바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집단적 상상력이 인류를 퇴보시킨 역사 또한 무수히 많으니 십자군 전쟁, 아우슈비츠 학살, 세계대전 등이 그것이다. 우리의 상상력은 때론 이런 처참한 결과로 수렴되기로 한다. 그러니 모든 상상력을 예찬할 일은 아니다.
글 작업을 하러 나서는 길, 아파트에 매달린 이들의 위험하고 힘든 노동을 내 삶에 위안으로 삼지 않기로 다짐한다. 생성형 AI가 어쩌고, 드론이니 어쩌고, 딥 페이크니 블록체인이 어쩌고 저쩌고 떠들지라도 노동은 사라질 리 없고 사라져서도 안 될 일이다. 노동은 허구나 가상이 될 수 없으니, 그로 인해 순결하고 숭고하다. 다행히 우리는 저마다 어떤 형태로든 노동에 속해 있다. 그러니 섣불리 타인의 노동에서 안도감을 느끼지 말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