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반주 #07
와인 양조를 위한 포도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많은 곳에서 자라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포도 품종들은 여러 지역에 퍼져서 각자의 색깔을 만들어가고 있죠. 잘 알려지지 않은 특정 지역에서만 나는 토착품종도 있지만 와인 걸음마를 이제 막 뗀 입장에서 거기까지 오지랖을 넓히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도 유명하고 보편적인 품종 위주로 계속 소개를 드리고 있는데요, 오늘은 '쉬라즈(Shiraz) a.k.a 쉬라(Syrah)'에 대해 말해볼까 합니다.
쉬라즈이기도 하고 쉬라이기도 한 이 품종은, 기본적으로 같은 품종으로 분류되지만 지역에 따라 다른 이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호주는 쉬라즈, 프랑스는 쉬라 이런 식으로 말이죠. 지역마다 자라는 환경이 다르기 때문에 그 성격에 조금 차이가 생겼다, 라는 개념으로 이해하시면 되겠습니다.
사람도 성격 형성에 있어 주변 환경에 많은 영향을 받는데, 와인에서도 이 '주변 환경'은 성격 형성에 매우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많이 들어보셨을 '떼루아(Terroir)'라는 용어가 그 주변 환경을 지칭하는 말이죠. 떼루아는 프랑스어로 땅,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비단 포도가 자라는 땅만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포도나무 성장에 영향을 미치는 거의 모든 것이 떼루아라는 단어 안에 들어 있어요. 토양, 기후 등 자연환경에서부터 사람이 개입하는 재배법까지도요.
앞서 말했듯 떼루아는 와인의 핵심이라, 떼루아를 구성하는 요소들 중 한 개만 변화해도 와인의 맛은 매우 달라집니다. 같은 부르고뉴라도 동네와 생산자에 따라 각양각색의 와인이 생산되고 있으며, 같은 와인 안에서도 빈티지(생산연도)에 따라서 천차만별이죠. 그리고 그 중 인간이 컨트롤 할 수 없는 것이 날씨, 기후이다 보니 요즘 와이너리와 와인 애호가들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지구온난화이기도 합니다. (Save the Earth!)
어쨌든 오늘 이야기할 쉬라즈는 호주라는 떼루아를 가지고 있고, 통상적으로 제 기준 꽤 묵직한 와인이라 단독으로 마시기보다는 음식과 함께 할 때 더 만족스러운 와인입니다. 특히 와인을 공부하기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던 '쉬라즈 마리아주의 정석'이 있었는데, 바로 양고기입니다. 양고기에는 쉬라즈를 먹으라는 말은 아마 다들 많이 들어보셨을 거라 생각되네요.
쉬라즈, 특히 호주 쉬라즈는 딱 봐도 색이 진하고 바디감이 있으면서, 과실 향과 함께 향신료 비슷한 향기가 꽤 많이 납니다. 이 부분을 쓰다가 문득, 이 특유의 향신료 향이 냄새가 날 수 있는 양고기와의 마리아주를 만드는 데에 큰 역할을 하는 것 같다는 걸 깨달았어요. (혹시... 저만 몰랐나요?) 먹을 때에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역시 이래서 첫째도 복습 둘째도 복습인가 봅니다. 분명 언젠가 수업에서 배웠을 것 같기도 하네요. 모범생은 아닌 걸로.
아무튼 진하고 바디감 있는 와인이라 쉬라즈는 각종 스테이크와도 꽤 잘 어울리는데, 사실 스테이크는 함께 매칭 할 만한 와인이 많아서 (지난번 소개드린 미국 까베르네 소비뇽이라든지) 쉬라즈를 먼저 찾게 되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주로 양고기를 먹을 기회가 생기면 쉬라즈를 고르고는 합니다. 호주 말고 쉬라즈가 유명한 곳이 프랑스의 론 지방인데, 프랑스 쉬라는 호주 쉬라즈보다는 비교적 더 섬세하고 산뜻한 느낌이 드는 편이에요. 그래서 숯불향도 좀 나고 묵직한 양갈비 스테이크를 먹을 때에는 호주 쉬라즈가 더 편안한 페어링이 되는 것 같습니다. 물론 그날 그날의 기분에 따라 양갈비 스테이크에 프랑스 쉬라를 선택해도 훌륭한 마리아주가 되지만 말이에요!
호주 쉬라즈를 말씀드리는 김에 보너스로 덧붙이자면, 2편에서 소개드린 꼬뜨뒤론 와인 품종 기억하시나요? 영어 이니셜이었는데...
맞아요 GSM! 여기에서 S가 바로 Syrah랍니다. 이렇게 남부 론은 쉬라를 다른 품종과 블렌딩 하는 반면, 같은 론 지방에서도 북부 론은 쉬라 100%로 유명합니다. 저도 아직 북부 론에 대한 경험치는 많이 없어서, 요즘 호기심을 가지고 유심히 보고 있는 지역 중 하나이기도 하죠. 이렇게 도장 깨기의 즐거움도 있는 와인이라 그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네요. 아무튼 호주 쉬라즈와 양고기를 머리에 입력하면서, 또 다른 쉬라의 대표주자로 프랑스 론 지방까지 기억해두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근데 여기서 짚고 가야 할 포인트. 위에서 떼루아 얘기를 했지만, 정말 신기한 것은 출신지에 따른 마리아주가 어김없이 '양고기=쉬라즈' 공식에도 적용된다는 점입니다. 다들 잘 아시다시피 호주의 특산물 중 하나가 바로 양고기이고 우리나라에도 매우 많이 수입되고 있죠. 이건 티라미수나 클램차우더 같이 요리도 아니고 그냥 고기인데, 신기하지 않나요? 호주에서 많이 나는 고기가 호주산 쉬라즈와 찰떡궁합이라는 게 말이에요. 이 정도쯤 되면 자연이 선사하는 마리아주가 아닐까요.
다시 한번 '잘 모르겠을 때에는 출신 지역을 봐라!'라는 와인 격언(?)을 되새기며... 제가 먹었던 가성비 좋았던 호주 쉬라즈 와인으로 마무리하겠습니다. 혹시 활동 범위 내에 콜키지가 가능한 양꼬치 혹은 양갈비 집이 있다면 가벼운 마음으로 사서 페어링 해보는 것을 강력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