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atman - A Film by Matt Reeves
배트맨은 아마 대 히어로 시대인 지금, 수많은 슈퍼히어로 중에서도 가장 유명하면서 가장 복합적인 캐릭터일 것이다. 배트맨의 독창적인 캐릭터는 특히 동료이자 히어로의 또 다른 대명사인 슈퍼맨과 동일선상에 놓였을 때의 대립성으로 쉽게 드러나는데, 슈퍼맨이 절대적인 힘과 선을 의미하는 신적인 존재라면, 배트맨은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이 드리운 그림자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다분히 인간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이 같이 다분히 인간적인 존재인 배트맨은 복합적이고 현실적인 캐릭터를 만들어 낼 수 있었고, 배트맨 영화들이 대중에 어필하면서 동시에 수많은 비평적 호응을 얻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배트맨 영화들은 배트맨이 가진 흥미로운 캐릭터를 도구로 사용할 뿐, 그 현실적이고 복합적인 내면을 직접적으로 뜯어보는 일은 없었다.
이는 장르영화의 한계 내에서 한 캐릭터의 깊숙한 내면을 파헤치는 일이 매우 힘들기 때문이다. 보통 장르영화의 연출은 독창적인 캐릭터와 잘 짜인 관계성(인과)으로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데, 여기에서 만약 하나의 내면에 몰입하고자 관계성을 느슨하고 은유적으로 가져가게 된다면 이야기의 긴박감이 사라져 버리고 결국 남는 것은 작가영화들의 흔적들 뿐이게 된다.
그래서 장르영화에서 한 인물의 복합적인 내면에만 집중하고자 하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 내면이 영화 내내 펼쳐지는 세계에 종속되면서도 동시에 지배해야 하며, 이는 그저 뛰어난 플롯의 구성으로부터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영화의 시공간을 지배할 수 있는 장면 구성력이 반드시 수반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를 해낸 감독은 대자본이 들어간 상업영화에서 작가적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하는 명장으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이고, 이는 분명 더 많은 대중들에게 (처음에는 반감을 살 수 있지만) 진정한 테이스트를 심어줄 수 있는 둘 도 없는 기회이다. 지금 당장 생각나는 건 역시 '블레이드러너2049'의 드니 빌뇌브, 그리고 이 영화의 감독이자 앞서 '혹성탈출:종의전쟁'을 선보인 맷 리브스이다. (나는 이러한 명장들의 등장이 너무도 반갑다. 이들이 더 많이 등장할수록 대중들의 테이스트는 넓어질 것이고, 이로부터 본질적인 작가영화들을 위한 기회는 더욱 늘어날 것이다.)
맷 리브스의 전작을 너무도 인상 깊게 본 나에게, 그가 배트맨을 연출한다는 소식은 기대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그는 '혹성탈출:종의전쟁'에서도 시저의 마지막 내면에 도달하고자 은유적으로 완전한 겨울을 만들어냈다. 그렇다면 이번에도 분명 배트맨, 또는 브루스 웨인의 그 복합적인 내면을 들여다보려 할 것이다. 과연 이번에는 '어떻게' 해낼 것인가?
이 영화는 처음부터 브루스 웨인의 배트맨 2년 차 활동임을 밝힌다. 2년 차란 모름지기, 소포모어 징크스의 해가 아닌가? 배트맨 또는 브루스 웨인은 분명 영화를 통해 크나큰 방황을 겪게 될 것이다.
브루스 웨인은 눈앞에서 부모를 잃은 분노를 양분 삼아 배트맨이라는 그림자를 만들어낸다. 범죄와 악에 대한 무조건적인 분노는 자신을 복수라고 일컬으며 정당화된다. '복수는 윤리적으로 옳은가?'라는 질문을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는 복수라는 그림자가 어둠으로부터 태어난 것이 아닌 빛에서부터 태어난다는 것을 강조한다. 복수는 이것이 정당하고 옳은 일이라는 생각으로부터 이루어진다. 복수는 올바른 세상을 위해 마땅히 행해져야 하는 일이다. 정의라는 빛에 의해 복수라는 그림자가 태어나는 것이다.
배트맨은 본인을 그림자라고 일컬으며 어둠으로부터 비롯되는 공포를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 그렇지만 그는 복수의 합리성을 위해, 또는 자가당착에 부딪히기 않기 위해 정해진 폭력을 통해서만 정의를 행사한다는 원칙을 세운다. 그는 자신의 부모를 살해한 총기를 절대 사용하지 않으며 불살의 원칙을 지킨다. 자비로운 폭력이라는 역설은 자신이 증오하는 악과 자신의 행위 사이에 선을 긋기 위함이다.
그럼에도 경찰을 비롯한 공권력과 대중들은 그를 가리켜 마스크 쓴 괴물이라고 비난한다. 현실에서와 동일하게 검경 등 표면적으로 드러난 공권력은 그들의 업 또한 폭력의 행사임을 인지하지 못한다. 법으로서 용인된 폭력과 법으로서 용인되지 않은 폭력, 그리고 배트맨이 가진 신념과 원칙의 폭력. 과연 그것들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그래서 공권력은 부패하고 배트맨은 리들러를 만들어낸다. 리들러는 방향성은 다르지만 배트맨과 완전히 동일하다. 리들러는 자신의 행위가 선을 위해 행해져야만 하는 필연성을 갖고 있다고 믿는다. 브루스 웨인이 부모님을 잃으며 불행해졌듯, 에드워드도 자신의 삶을 불행하게 만든 세상에 대한 분노를 드러내는 것이다. 배트맨이 자신을 복수라고 일컫듯 리들러도 자신을 복수라고 일컬을 수 있다. 복수는 이 세계의 불합리함을 부수어 없애기 위한 필연적 과정이다.
무엇보다 재밌는 건 둘이 서로를 마주 보았을 때이다. 둘은 사실상 동일한 존재이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자신이 희망하는 대상으로 그려 낼 수 있었다. 리들러는 배트맨을 세상에 분노를 표출할 수 있도록 자신을 이끌어준 파트너로, 배트맨은 리들러를 역설로 가득 찬 자신의 존재를 끝내줄 절대악으로. 그러나 둘이 서로를 마주하자 기대는 깨져버리고 그저 왜곡된 자화상을 통해 자신을 마주 보게 만드는 거울이 된다.
브루스 웨인은 리들러를 마주치고 난 이상, 자신이 외면해온 자가당착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분노에 몸을 맡겼던 1년 차를 지나, 자신의 신념을 의심하는 2년 차에 도달한다. 정의와 복수라는 빛과 그림자, 복수와 악이라는 그림자와 어둠. 그림자는 빛에서 태어나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깨닫는다.
한편 에드워드는 배트맨을 마주치고 기대를 배신당하자 아이처럼 울부짖는다(폴 다노의 천진한 맨얼굴은 소름이 돋는다). 삶을 불행하게 만들 뿐인 세계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이끌어주었던 파트너는 실제 하지 않는 존재였다. 마치 그의 부모처럼. 에드워드는 단지 자신을 이끌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게 복수의 화신이 아니었다면 그는 다른 존재로 거듭났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억압적인 구조에 갇힌 그에게 뻗친 또 다른 손길은 종잡을 수 없는 진정한 악일 뿐이다.
'더 배트맨'은 브루스 웨인의 복잡한 내면을 표현하기 위해 배트맨이라는 그림자를, 배트맨이라는 존재의 역설을 표현하기 위해 리들러라는 또 다른 그림자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배트맨은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에도 불구하고 빛의 아래에서 그림자로 남기를 선택했고, 리들러는 덮쳐오는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배트맨은 모순을 끌어안고 현실에 맞서기로 결심했지만, 리들러는 모순이 가져온 패배감에 지배당하고 만 것이다.
한편 빛과 어둠 사이의 그림자를 주제로 삼은 이야기처럼, '더 배트맨'은 카메라가 빛을 담아내는 방식을 전적으로 활용해 그려낸다. 모두가 알다시피 영화는 카메라로 찍는 것이라, 빛에 의해 지배되기 마련이다. 프레임을 구성함과 더불어 화면구성에 있어서 '빛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언제나 고민의 대상이 된다. 촬영 때 스튜디오를 선호하는 이유는 조명을 통해 빛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데 맷 리브스는 '더 배트맨'을 위한 화면구성을 반대로 가져간다. 어둠을 활용하는 것이다. 특히 역광을 통해 피사체를 어둠으로 그려내는 방식은 촬영감독 그레이그 프레이저의 테크닉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전적으로 암부가 지배하는 이 영화는 특히, 폭발하는 화염 속에서 부활하듯 달려 나오는 배트카의 모습이나, 총기 불빛만을 통해 단적으로 보여지는 배트맨의 격투신을 비롯해, 수많은 빛의 활용법을 보여주며 화면 구성과 주제 연결에 있어 새로운 임팩트를 불어넣는다.
'더 배트맨'의 진가는 바로 여기에 있다. 맷 리브스가 빛과 어둠을 활용하는 방식은 분명 여러 번 관찰할만한 즐거움이 있다. 이것은 그가 '혹성탈출:종의전쟁'에 이어, 또 한 번 승리를 거두었다는 기쁜 승전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