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hameless
누구나 그런 일이 있지 않은가? 나도 모르게 감정을 배신하는 일. 무엇 때문 일지는 몰라도 내 감정에 충실하지 못하는 일. 아니, 감정을 속이고 자신을 속여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행세하는 일. 그러다 결국 자신의 진심을 잃어버리는 일. 자신을 속이는 데 성공하면 가슴에 들끓던 뜨거운 무언가는 다른 무언가로 대체된다. 보통 네거티브한 것으로, 원망이나 증오, 미련같이.
영화 ‘무뢰한’에서 정재곤과 김혜경은 형사와 범죄자의 연인이라는 자칫 진부해질 수 있는 단순한 캐릭터로 얽힌다. 서로가 목적을 위해 거짓을 연기하고 진심을 숨긴다는 오래된 이야기는, 영화를 통해 진짜와 가짜 사이의 늪을 허우적거리는 두 남녀의 모습으로 변모한다. 반복되는 거짓의 연속에서 어느새 드러나는 진심을 몰래 속삭이고 오직 가슴 깊은 곳에만 새겨야 하는 아이러니, ‘무뢰한’은 진짜와 가짜 사이를 어떻게 향유할 것인가?
혜경의 집, 지칠 대로 지친 두 남녀가 한 공간에 갇힌다. 혜경은 재곤을 자극한다. 그녀의 목적을 위해 재곤을 떠보는 말과는 별개로, 그녀의 손과 몸은 재곤에게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는다. 재곤은 그 자극에 응답한다. 재곤의 말은 목적을 위해 만들어진 가짜이지만, 그의 표정과 행동은 그 말에 분명 진심이 담겨 있다는 것을 알린다. 재곤과 혜경은 그들의 모든 걸 활용해 거짓과 진심을 동시에 주고받는다. 그 속에서 진정한 무언가가 숨겨지지 않는 감정의 결을 타고 드러난다.
그러나 재곤은 귀걸이로 마음의 증거만 남기고 온 몸이 부들부들 떨며 긍정하는 진짜를 외면하고야 만다. 이어지는 혜경이 잡채를 비벼 식사를 차리고 재곤과 혜경이 작은 식탁에 마주 앉아 식사를 하는 시퀀스. 늘 침울하고 시궁창 같던 ‘무뢰한’의 공간은 여기서 유일하게 밝은 빛에 휩싸여 이상적인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이 진짜 바라던 모습을 드러내는 유일한 장면이지만, 그들의 말에는 여전히 진심과 거짓이 어지럽게 섞여있다. 그렇기에 둘의 식사는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나고 이상은 꿈처럼 급하게 사라진다.
진심이냐고 묻는 혜경의 쇼트와 그걸믿냐고 대답하는 재곤의 역쇼트, 유일하게 진짜에 다가갈 수 있었던 순간은 그렇게 투박한 외면으로 막을 내린다. 이제 서로가 거짓을 버리고 함께 할 수 있는 기회는 없다는 것을 아는 듯, 혜경이 서글픈 웃음을 띄운 채 고개를 숙이고 후룩후룩 잡채를 곱씹는 모습은 정말 참을 수 없이 아련해진다.
영화는 시공간의 연속적 재현으로 이루어진다. 하나의 장면 아래 수많은 무언가를 동시에 새겨 넣을 수 있다. ‘무뢰한’은 진짜와 가짜 사이를 배우의 대사와 표정, 동작의 서로 다른 표현을 통해 향유한다. 언어적 커뮤니케이션과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동시성을 전시하여 두 남녀의 사랑과 엇갈림에 근원적 공감을 구한다.
불타는 감정이 모든 걸 태우고 난 뒤에 남은 것은 재뿐이다. 나는 네게 남은 잔불이라도 찾으려 하지만, 결국 헛된 수고가 되고 만다. 그래서 뒤늦게 자신의 진심을 증명하려 발버둥 치는 재곤의 극단적이고 서투른 모습은 우스꽝스럽게 보인다. 재곤은 폭력을 통해 과시하다시피 자신의 진심을 밝힌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자신이 하는 일을 밝히며, 마치 이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는 듯 멋쩍게 웃는다. 그리고 자신이 진심을 다하지 못한 것은 네 탓이라고 뒤늦은 후회를 한다.
두 남녀의 이별은 그렇게 시작된다. 한껏 불탈 때는 중요치 않던 옳고 그름을 따지기 시작한다. 남은 재를 마구 흩뿌리며 뭐라도 나오기를 바란다. 그러나 그 엇갈림만이 이제 유일한 뜨거웠던 감정의 증표다. 잃어버린 진심은 돌이킬 순 없지만 확인할 순 있다. 그래서 혜경은 재곤을 ‘이영준’으로 부르며 칼을 꽂는다. 둘이 함께 잃어버린 사랑을 담아 작별을 고한다. 칼을 꽂은 것은 사랑의 증표다. 이제 되찾을 수 없는 것의 증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