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후에
4월 6일, 아침부터 기차를 타러 나선다. 동하는 이렇게 스쳐 지나갈 뿐이지만 전혀 아쉽지 않다. 아무것도 없는 소도시에 대한 여행자의 로망은 단순히 과장된 것이다. 중요한 건 도시의 규모가 아니라 내가 그곳에서 무엇을 찾을 수 있느냐. 단순히 사람 많은 곳에 질려 소도시로 가겠다는 건 그저 대도시의 교외를 돌겠다는 거랑 별 차이 없는 소리다. 그곳에 내가 추구하는 경험이 없다면 어차피 질리도록 같은 풍경 앞에 놓일 뿐.
돌고 돌아 드디어 후에에서 여정을 시작한다는 기대감 때문인지 기차는 어젯밤과 달리 순식간, 기차에 탄 기억조차 삭제된 것 같다.
도착하자마자 또 다시 역 앞에서, 하지만 어제와는 다른 가게에서 식사를 한다. 나는 볶음밥을 상당히 좋아하는데 생각해 보니 의외로 이번이 베트남에서 처음 볶음밥을 주문한 거였다. 이 볶음밥, 내 엄격한 기준에도 굉장히 맛있는 축에 든다. 고슬고슬한 밥알에 기름 코팅이 딱 적당해 불 맛이 든 중화식 볶음밥 맛이다. 지금까지 베트남에서 여러 번 쌀밥을 먹으면서 한 번도 안남미로 알려진 인디카 품종 쌀에서 나는 거부감이 안 들었다. 품종이 개량 된 걸까? 어쨌든 첫 볶음밥은 그 맛도, 태산처럼 쌓인 양도 훌륭한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식사를 마치고 그랩을 불러 멀리 떨어진 오늘의 숙소로 향한다. 역에서 북동쪽이 후에의 메인이지만 나는 서쪽으로 10분을 달려간다. 그랩 비용을 생각하니 아마 내일까지 못 나올 것 같다. 오늘은 외진 교외에서 하루를 통째로 보내게 되겠구나. 숙소가 가까워질수록 좁은 골목길로 접어들고 주택들과 울창한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다. 도심에서 차 타고 10분 정도의 거리인데도 꽤나 분위기가 바뀌었다.
수많은 민가들 사이로 확연히 이질적인 오늘의 숙소가 터를 잡고 있었다.
들은 대로 연휴인지라 대다수가 휴가를 온 베트남 사람들이었다. 방을 안내받고 장고를 거쳐 침대를 골라 짐을 푼다. 수영장으로 바로 들어가준다. 날씨가 선선하니 처음엔 물이 너무 차웠지만 금방 온도에 익숙해진다. 수영장은 날씨 때문에 아무도 안 들어가는 건지, 대부분 사람들은 숙소를 여기에 잡아도 자기 오토바이나 차를 타고 시내로 구경을 나간 것 같다. 덕분에 한 시간 넘게 홀로 여유를 즐겼다.
물장구를 끝내고 공용욕실로 바로 샤워를 하러 들어갔는데 뜨거운 물이 안 나온다. 온수기에서 소리는 나는데 뜨거운 물은 나올 생각을 안 하니 이미 물에 젖어 나온 만큼 온몸이 덜덜 떨린다. 그냥 빠르게 찬물 샤워로 끝낸다.
도미토리는 정말 작은 방에 침대 8칸이 따닥따닥 들어가 있지만 생각보다 쾌적하다.
숙소로 들어오는 골목길은 이렇게 무수한 수풀로 덮여 시내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자아낸다.
숙소 건물의 안쪽에는 마당과 별채가 있는데 여기서 옆집 마당도 볼 수 있었다. 닭들이 신나게 돌아다니는 중이다.
물놀이 탓인지, 푸르른 공간 탓인지 노곤해진 채 로비에 앉아있는다. 부드러운 음악 소리에 새소리, 닭이 우는소리, 개가 짖는 소리, 옆집 아이들이 골목길을 뛰어다니는 소리가 전부 뒤섞인다. 이런 곳은 아무것도 안 해도 시간이 잘 갈수밖에 없는데 예상치 못한 친구도 생긴다.
이렇게 귀여운 털뭉치가 친한 척을 하니 안 쓰다듬고 배길수가 없다. 한 손으론 새 친구를 쓰다듬어주고 한 손으론 내일 숙소를 찾아본다. 내일이 연휴의 마지막 날이니, 빈방 하나 없던 시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숙소로 가득하다. 이 많은 숙소들이 가득 찼었다니 베트남 사람들은 후에를 얼마나 좋아하는 걸까?
아무것도 안 한거 같은데 벌써 해가 져버렸다. 살짝 걱정이 되는 게 이 주위에 식당이 없다. 숙소에서도 식사류는 전혀 제공하지 않는다. 일단 지도를 보고 골목길을 따라 걸으러 나가본다. 사람들이 전부 집으로 돌아왔는지 집집마다 각양각색의 소리가 흘러나온다. 특이한건 삼삼오오 한 집에 모여 노래방 기계를 켜고 노래자랑을 여는게 한두 곳이 아니라는 것. 그리고 집마다 꼭 개를 키워 앞을 지나가면 엄청나게 짖어댄다. 그렇게 집 사이사이 골목길을 한 20분 정도 걷고 걸으니 정말 동네 시장이 하나 나온다.
다만 해가 졌다고 이미 파한 분위기다. 시장 옆 약국도 슈퍼도 문을 닫는다. 오늘의 저녁식사, 그 마지막 희망이었던 유일한 쌀국숫집도 장사 끝났다고 내일 아침에 오라 한다. 쓴웃음을 지으며 손을 흔든다.
일단 되는대로 망고를 사본다. 세 개에 2만동, 정말 동네 시장 가격이다.
문제는 망고가 전혀 익지 않았다는 것. 이렇게 푸른 망고는 태어나서 처음 보는 거 같다. 그러나 이것도 굶을 처지인 나에겐 감지덕지다.
돌아가던 중 특이한 반미 케밥이라는걸 발견한다. 엄청나게 저렴한 가격, 그나마 망고보다는 식사의 대체재가 될만할 거 같아 두 개를 주문해본다.
그 정체는 냉동빵이었다. 그래도 다진 고기가 약간 들어가 있고 맛이 나쁘지 않다. 두 개가 아니라 서너 개를 살 걸 그랬다.
배가 고프니 돌아가는 길이 더 멀게 느껴진다. 왜인지 바나나 나뭇잎이 꽤나 많이 보이고 이렇게 을씨년스러운 나무들도 자기 자리를 잡고 있다. 전부 다 조경의 일부인거 같다.
드디어 숙소로 들어가는 골목길에 도착했을 때, 건너편 매점 아주머니가 한국에서 왔냐고 한국 여행을 갔다 온 사진을 보여주신다. 내가 안 가본 곳도 가실 만큼 알차게 관광하고 오셨다. 한국에서 처음으로 눈을 보셨다고 한다. 이것저것 수다를 나눈 김에 과자 한 봉지를 사간다. 오늘의 저녁은 이렇게 때워야겠다.
내가 망고를 위해 직원에게 칼을 빌릴 때, 연휴를 맞아 하노이에서 여행 온 여자 둘이 내게 한국인이냐고 묻는다. 그렇다하니 바로 오빠라 부른다. 몇 살인지 묻고 오빠 맞다며 계속 오빠라 부른다. 오빠라는 말을 참 좋아하나 보다. 자기들도 방이 없어서 나랑 같은 도미토리에 묵는다 한다. 베트남 사람조차 방을 구하기 힘들 정도로 후에에 사람이 몰린게 맞다.
이 친구들도 그렇고 시내에 나갔다 돌아온 사람들은 야시장 느낌의 간식들을 사들고 왔다. 그리곤 내 망고를 보고 한국인은 망고를 참 좋아한다고 한다. 베트남 사람들은 별로 안 좋아하나 보다.
빌린 칼로 망고를 조각해본다. 엄청 단단하고 단 맛이 안 느껴진다. 망고가 아닌거 같다.
해가 지기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확실히 베트남 사람들은 이어폰을 끼지 않고 공공연하게 동영상을 큰소리로 본다. 보아하니 베트남 사람들에겐 그게 당연한 일인것 같다. 도통 알 수가 없는 일이다.
밤 열시가 가까워오니 로비에 직원이 잘 모기장도 설치하고 불도 꺼지며 슬슬 잘만한 분위기이다.
남은 하나의 망고는 빨리 익으라고 이렇게 매달아 놔봤다.
여기저기 먹을거 안줄까 돌아다니던 털뭉치가 결국 아무것도 못 얻어먹고 내게 돌아왔다. 비건은 아닌지 망고는 안 먹더라. 불이 전부 꺼지고 그 시끄럽던 골목길도 귀신같이 조용해진다.
털뭉치도 나도 이제 자는 게 나을거 같다. 귀마개를 끼고 침대 속으로 들어가니 나름 안락하다. 이상하게 잠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