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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규선 May 09. 2022

아버지

아버지

오늘 어버이날이라, 모친을 모시고 아내와 셋이서 외식하고, 차를 마시며 조용하게 보냈다.

치매인 모친은 오늘 무슨 날이냐, 왜 멀리 가느냐 등 수차례 같은 얘기를 반복하며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가슴에 달고 있는 카네이션을 보고 뜻깊은 날인 것을 알고 계신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어버이날이니, 모친 옆 빈자리인 아버지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부친은 심부전증으로 수 차례 병원신세를 지다가, 7년 전인 5월 맑고 쾌청한 날 아침에 폐렴 합병증으로 돌아가셨다.

부친은 한마디로 대단한 분이셨다고 자부하고, 또 존경한다.

어렸을 때 못 먹고 자란 한이 맺혀 평생 근검절약을 실천하셨고, 술과 담배는커녕 싸구려 다방 커피도 안 드셨다.

을지로 입구에서 50년 가까이 혁대와 지갑 등을 파는 가죽제품 가게를 하셨는데, 지금 돈으로 7~8천 원 이상 비싼 점심 식사를 해본 적이 없으셨다.

내가 초등학교 4~5학년 때 기억이 생생하다.

청계천 판잣집에서 가게까지 좁은 골목길 300미터를 쟁반에 음식을 담아 들고 갔을 때, 중간에 청계초등학교(지금의 동국제강 본사) 친구들이 볼 까 봐 얼마나 창피했던가!

그렇지만, 얼마 되지 않는 그 점심값을 아끼려고 고생하셨던 30대 젊은 부친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그러다 보니, 부친은 한때 서대문 로터리 근처에 기와집을 두 채나 사셨고, 40세도 안되어 우리는 북아현동 3층 양옥집으로 이사 갔다.

부친은 성실하고, 노력파라고 생각한다.

중고교 시절, 주말 저녁이면 나는 남동생과 번갈아 을지로 가게에 서 베니어판 침대에서 자곤 했는데, 그때는 부친이 집에서 편히 쉬는 날이었다.

오직 한길 가죽제품을 취급하셨는데, 자식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70대 후반에도 장사하며 남은 재고를 끝까지 처분하려고 노력하셨다.

부친은 경기도 판교에 있는 낙생초등학교를 졸업 후에, 서울 을지로 입구에서 줄곧 장사를 하면서 배움의 싹을 키웠고, 결국 서울대 최고위 과정도 마친, 학구열이 높은 남다른 분이었다.

주경야독하면서 야간대학에 다니는 것은 알았는데, 80세가 넘은 최고령자로 수백만 원 상당의 학비를 부담해가며 공부해 서울대 수료식 때 강당에서 찍은 졸업사진을 나중에 보고 깜짝 놀랐다.

부친은 돌아가실 때까지 10년 남짓 625 참전 용사 회장을 하신 국가행사의 단골 초청인사였고, 수십 명 회원들을 모시고 자비로 봄, 가을에 관광버스를 대절해 여행하며 오락회 사회를 맡은 등 재주꾼이셨다.

일본강점기인 어렸을 때 배운 일본어를 갈고닦아 능숙하며, 76세 때 한자 1급 자격증을 취득해 강사가 되려고 수십 곳 대학에 이력서도 보냈다.

신문은 이를 잡듯이 봐 치매는 걱정 없다고 하셨고, 정부기관 명칭과 기관장, 국회의원의 이름을 줄줄이 꿰뚤어 특히 정치에는 일가견이 있었다.

또한 팔순이 넘어서도 종종 6시간 이상 한자리에서 책만 읽었다고 하셨고, 서울, 인천 지하철 노선도를 순서대로 모두 외워 손자들도 자극하셨다.

만일 부친이 조금 여유 있는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아마 교수나 학자가 되셨을 것이다.

또한 가족력으로 고혈압이 있었는데, 부친은 운동과 음식조절로 120- 80  정상으로 만들어 돌아가실 때까지 10년 이상 혈압약을 드시지 않았다.

부농은 아니었지만, 비교적 넉넉한 집안에서 자란 모친이 좋은 음식을 대접해도 부친은 어렸을 때 너무 고생했던 생각이 떠올라 그런 비싼 것은 사치라며 오이지무침과 조개젓을 즐겨드셨다.

그러다 보니, 평생 좋은 옷과 구두를 사지 않았는데, 나와 체형이 비슷해서 내가 한두 번 입던 양복을 드리면, '고맙구나' 하면서, 종친회나 결혼식장에 입고 오신 것을 가끔 보았다.

부친의 사업실패로 우리 삼 남매 모두 결혼할 때까지 동작구 상도동 달동네에 살았는데, 어느 날 TV와 냉장고 등에 빨간딱지가 붙었다.

그때 채권자가 들어와 소리치며 난리법석이었지만 부친은 슬기롭게 해결하셨고, 수년 후에 마포에 연립주택을 매입해 월세까지 받게 한 부친의 성실과 노력은 알아줄만했다.

어린 시절 추억을 생각해서 부친은 마포 집 옥상에 수십 가지 꽃과 나무를 가꾸어 정원을 만들었고, 작은 연못에 분수대도 놓았으며, 가끔 우리는 그곳에서 차를 마시거나 고기를 구워 먹었다.

부친은 내가 죽으면 할아버지 산소 옆 양지바른 언덕에 묻어달라고 하셨지만, 나는 가족과 상의하여 교통 편하고 관리인도 상주하는, 여주에 있는 전주 이 씨 종친 가족공원(납골당)에 모셨다.
 
명절 때 부친이 소주 몇 잔을 드시고는 '취한다'라고, 웃으면서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딴 데 쳐다보지 말고, 한길을 가라!''

부친은 고집이 세고, 자존심은 하늘을 날았지만, 남을 위해 사셨고, 지독할 정도로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셨다.

오늘이 어버이날이라 돌아가신 부친이 무척 보고 싶다.

모레가 부친의 기일이라, 모친을 모시고 여주 공원에 다녀 와야겠다.

글쓴이   서치펌 싱크탱크 대표 이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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