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도슨트인 엄마가 잊었던 작품 하나를 더 꺼내어 걸었다.
벽에 살충제를 걸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잘 발견할 수 있도록 눈높이를 맞춰 걸었다. 고작 못 하나에 어찌나 섬뜩하게 목매달고 있는지 누구나 그 앞에선 발걸음을 멈추고 힐끗 쳐다봤다. 그것의 효용가치는 벌레가 나타날 때 발휘되겠지만 망각은 꽤 흔하기에 좀 더 눈에 잘 띄는 곳에 둔 다른 살충제로 늘 대체된다.
원래 그 자리엔 다른 작품이 전시되어 있었다. 크리스마스 리스였던가? ‘나’는 친정집이란 전시관의 오랜 소재였다. 벽을 따라 걸린 것들. 그건 날아가는 자전거, 차갑게 발을 덮고 사라지는 바닷물, 잔잔히 공기 속에서 풍겨오는 고소한 어릴적 기억들, 대롱대롱 매달린 질문의 구조물, 거친 재질로 꿰매어진 간절한 꿈이었다. 오랜만에 들른 곳이지만 입구홀서부터 전시 주제가 아주 명확하다. 간간이 걸린 에바 알머슨의 작품들조차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그 앞에서 엄마는 도슨트가 된다. 관객의 동선에 따라 전시해설이 이어진다. 엄마가 권하는 동선을 따라 함께 걷다 보면 어느새 내가 왜 이 전시의 소재가 되었는지 알 수 있다. 작품마다 스토리를 입고 있기 때문이다. 고흐의 작품도 스토리텔링의 덕을 봤다 하지 않던가. 뱅크시의 작품, <풍선을 든 소녀> 역시 소더비 경매에서 낙찰 후 반쯤 갈려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지만, 그로 인해 스토리가 입혀져 무려 20배나 가격이 뛰었다.
엄마의 작품들은 40여 년간 얼마나 가치가 높아졌을까. 내 백일 사진, 돌 사진, 결혼사진은 인생에서 가장 큰 점을 찍은작품들이지만 뻔한 스토리이므로 큰 가치를 기대하긴 힘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예술이란 것이 늘 그렇듯, 창의성을 입히면 관객의 이목을 끌 수 있다. 그러니 엄마에게 장난스레 문자 메시지로 보낸, 포토샵으로 보정된 사진은 사실과 좀 멀더라도 관객과의 거리를 가까이 만든다. 뻔한 작품들 사이에서 뻔하지 않은 스토리를 만들어 냈으니, 희소성이 중요한 예술 세계에서 몸값이 오르는 건 당연하다.
그때, 벽을 뚫고 벌레가 기어 나왔다. 벌레는 사체에서 생겨나고 전시관 전체에서 심한 악취가 났다. 보이지 않는 상상의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며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기대했다. 작품이 끊기는 시간이 있었다. 관계의 공백은 작품 탄생에발단이 되기도 하지만 놀라운 반전이 되기도 한다. 어른의 옷을 입고 나름 엄마와 선을 그었던 암흑기. 그땐 작품이 탄생하지 않았다. 엄마의 뮤즈가 죽었으니 벌레가 생길 수밖에.
그때야 잊었던 살충제 앞에 다시 섰다. 섬뜩하게 목매달고 있는 그것의 효용가치를 기대하며 재빠르게 분사했다. 오늘의 도슨트인 엄마가 잊었던 작품 하나를 더 꺼내어 걸었다. 그리고 다시 스토리를 늘어놓는다. 너 이거 기억나니? 스토리의 시작을 여는 말. 엄마는 벽에 걸린 모든 작품의 작가이자 도슨트가 되어 오랜만에 친정집을 들른 관객에게 해설한다. 작품의 소재가 된 나에게조차 희미해진 기억이 엄마에겐 매우 또렷하다. 그간 수만 번은 더 복기했을 스토리들은 어제의 기억처럼 역동적으로 살아난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이 벽을 채우고 엄마의 스토리텔링이 입혀져 새로운 관객들을 만날 것이다.
잊힌 작품, 살충제는 다시 자신의 자리에 걸린다. 또다시 엄마와의 관계가 죽어 효용가치가 생길 때까지 친정집 입구홀에서 섬뜩하게 목매달고 기다릴 것이다. 이 전시관의 작품 중 유일하게 다른 색을 가지고 있지만, 그래서 영원히 효용가치를 갖지 않길 바라지만 어떤 작품보다 꼭 필요하단 걸 알기에 난 이번에도 전시관을 나서기 전에 그 앞에 서서 물끄러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