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인 듯 내게 온 두껍고 무거운 책들을 내려다봤다.
이건 베개로 사용하면 좋겠군. 아니, 각을 잘 세워 누군가의 머리를 내려친다면 어떨까?
초면에 던지기엔 다소 과격하고 서늘한 소감이지만 딱 그 정도의 두께와 무게였다. 심지어 두꺼운 모직 코트를 둘러 입은 중년 사내 같단 생각마저 들었다. 정말 지루해. 과도한 욕심은 항상 사고를 부르는 법이다. 낯을 직접 보고, 몸뚱이를 미리 만져볼 수 있었더라면 좋았을 텐데. 좀 더 관심 있게 소개 글을 읽었더라면 막을 수 있었을 텐데. 설레는 마음에 신발도 안 신고 서둘러 나간 탓이고, 그저 다른 것들과 가격이 비슷하니 생김새 또한 비슷할 거라 착각한 탓이다.
우편배달부가 집 앞에 던져 놓고 간 상자를 냉큼 가지고 들어왔다. 긴급 재난 상황에 배송이 지연될 수 있다고 하더니 무려 한 달 반이나 지나서 소포를 받은 것이다. 작은 칼을 가져와 조심해서 상자의 배를 갈랐다. 긴 잠에서 깨어난 것 치곤 매우 산뜻한 얼굴이었다. 얼마나 보기를 기다렸던가. 그 얼굴에 살며시 손을 가져다 댔다. 매끄럽지만 ‘사악’하고 건조한소리가 났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꺼내든 세 권의 책은 하나같이 예쁘장한 얼굴 뒤에 탄탄하고 육중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기본 오백 장 이상의 부피를 자랑했다. 요즘 출판되는 책들이 독자의 취향과 편의를 위해 이백에서 삼백 장대로 만들어지는 것에 비교해 상당히 두꺼운 셈이다. 온라인 서점에서 반반한 겉표지만 보고 충동적으로 장바구니에 쓸어 담은 게 문제였다. 상품 후기를 읽긴 했지만, 책 자체의 디테일을 자세히 읽지 않았다. 거기엔 분명 책의 무게, 장수, 크기도 숫자로 정확하게 적혀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문학 이론서, 단편 소설집, 인문 교양서까지 장르는 다양했지만 육중한 몸을 가진 건 매한가지였다. 그 무게와 두께에서 뭔지 모를 압박감이 들었다.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두꺼운 책을 싸게 잘 산 거야. 하지만 그 내부를 펼쳐 든 순간,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하며 한숨이 나왔다. 전공서나 논문처럼 절반 이상 차지한 주석들, 여백이 얼마 보이지 않을 정도로 종이를 가득 메운 글자들, 그리고 내 눈을 종이 가까이 끌어당기는 작은 글씨들.
책을 덮었다. 머리에 베고 누웠다. 마치 할아버지의 목침 같았다. 이렇게 머리를 올려놓고 있으면 책 내용이 스캔 되듯 머릿속으로 입력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일은 없다. 결국, 눈으로 읽고 머리를 굴려 수동으로 집어넣어야 한다. 다시 책을 펼쳐 들었다. 그들의 근육은 지방을 다 태운, 과시용이 아닌 진짜 알짜배기 근육이었다. 그것을 보고 있자니 내 물렁물렁한 머리는 운동이 필요해 보였다. 굵고 탄탄한 근육은 고사하고 가느다란 근육 한 줄기도 보이지 않았다. 그뿐인가. 생각을 뒤덮은 건 군더더기로 꽉 찬 지방 덩어리뿐이었다. 쉽게 읽히는 책만 편식했던 빈약한 생각 덩어리. 근육을 제대로 단련하지 못해 지구력마저도 기대할 수 없는 허약한 생각처럼 보였다.
실수인 듯 내게 온 두껍고 무거운 책들을 내려다봤다. 원치 않았지만, 이 시점에 꼭 만나야 할 인연처럼 다가온 그들은 혹 생각의 근육을 키워줄 개인 트레이너는 아닐는지. 읽는 속도가 빠르지 않기에 어쩌면 긴 시간이 필요할지도 모르고, 내용이 어려워 이내 포기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단 해 보기로 했다. 마치 피트니스 클럽에 돈을 내고 그게 아까워 억지로 운동하는 사람처럼 밤새워 한 권을 읽었다. 물컹했던 덩어리가 조금은 작아진 듯도 했다. 다시 삼 일을 꼬박 걸려 한 권을 더 읽었다. 이제 가느다란 근육의 모양이 겨우 보이려고 했다. 그렇게 나머지 책도 읽었다.
요즘은 이상하게 두껍고 무거운 책들이 주위로 몰려든다. 그렇게 오늘도 우연히 책 한 권을 만났다.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문호,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스>. 무려 천삼백 장이 넘는 양과 난해한 내용 때문에 중도하차 한다는 무시무시한 책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이 책을 이십 세기, 영어로 쓰인 가장 위대한 소설이라 평한다.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같은 작가들도 이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런데 왜 하필 이 책이 눈에 띄었을까. 천삼백 장은 무리야, 하고 돌아서는데 자꾸 발꿈치가 덜그럭덜그럭 걸린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면 과연 머슬퀸이 될 수 있을까.
바람이 잘 드는 창가에 앉아 육중한 책을 펼친다. 생각이 두께와 무게를 키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