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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눅히 Mar 26. 2022

그 해, 여름 [1]

칸느, 니스 그리고 사르데냐

내 인생에서 제대로 여름휴가를 보냈다!라고 말할 수 있는 때는 단언컨대 2018년 여름이다.

그 해 여름은 내가 런던에서 맞는 첫 번째 여름이었다.


한반도 남쪽에서도 남쪽, 바닷가를 끼고 한평생을 살아온 내게 런던의 겨울은 길고 어두웠다.

It's time to love monday, 그치만 겨울의 월요일은 유달리 더 싫어


목 빠지게 봄을 기다렸고, 마침내 기다리던 봄이 왔다.

드디어 우중충한 겨울에서 벗어났다는 기쁨과 함께 얼마 지나지 않아 곧 초여름이 시작되었다.

뜨거운 햇볕에 살이 달가워지는 여름을 더욱더 절절히 느끼고 싶은 마음이 부풀어 오를 대로 부풀어 올랐던 7월 초여름.


이 여름을 즐기겠노라 마음 먹은건 혼자가 아니었지


나는 어디로든 떠나고 말 거라고 반드시 이 여름을 즐기고 말겠노라고 다짐했다.


때마침 당시 다니던 학교가 종강했고, 다니던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새로운 직장에 취업하기 전 갖는 휴식기였던 그때, 나는 걱정과 불안, 불만 없이 온전히 여름을 즐길 수 있었다.


두 번의 여름휴가를 갔고 두 휴가 모두 소중한 인연들과 함께한 시간들로 가득 찼다.


런던에서 나는 shared flat에 살았는데, 운 좋게 첫 번째 flat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때, 우린 모두 런던에 살고 있는 이방인 신분이고 또래였기에 급속도로 가까워졌던 것 같다. 그중에서도 서로 자매라 이름 붙이고 사소한 것 하나까지 공유하며 가장 많은 시간들을 함께 보낸 나의 친구 둘이 있다. 이탈리아 남부 섬, 사르데냐에서 온 F와 남 프랑스에서 온 M이 바로 그들이다.


벌써 나의 휴가지가 공개되었다. 그렇다, 나는 그녀들의 고향으로 휴가를 떠났다!





프랑스 남부 니스 그리고 칸느


내게 니스는 늘 꿈꾸던 휴양지 같은 것이었다. 푸르른 바다, 뜨거운 햇볕, 해수욕 즐기는 사람들, 진득하게 손을 타고 흐르는 아이스크림, 밤이 되면 서늘해지는 공기 같은 것들 그리고 그 모두를 아우르는 여유.


어디로든 떠나고 말 거라고 다짐했던 나는 그대로 짐을 쌌다.

그래, 지금이다! 언제 다시 니스에 갈 수 있을까?


If not now, then when?


마음을 먹고 나면 다른 건 일사천리로 진행되기 마련이다. 뭐든, 제대로 마음먹기가 힘든 법이니 말이다.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호텔 예약까지 순식간에 끝났다.

남은 건 떠나는 날을 기다리는 것뿐.


시간은 흐르고, 마침내 떠나는 날이 성큼 다가왔다. 두 시간가량의 비행 끝에 나는 니스에 도착했다.

휴양지 느낌이 물씬 풍기는 니스
날씨가 좋은 니스, 제주도 아니에요~


도착해서 혼자 늦은 점심을 먹기 전까진 잊고 있었던 그녀가 불현듯 생각났다. 내 친구 M!

그 해 5월, 그러니까 내가 휴가를 떠나기 두어 달 전, M은 프랑스 고향으로 돌아갔다. 런던에서 회사를 다니던 그녀는 늘 아프리카에서 일하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고 그녀의 바람대로 아프리카 발령이 나면서 떠날 준비를 위해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사실 니스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M을 그곳에서 만나리라고 깊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땐 니스에 간다는 것, 그 자체로 흥분되는 일이었기 때문에.


막상 도착하고, 느긋하게 여유를 부리다 보니 자연스레 그녀가 생각나 전화를 걸었다. 익숙한 그녀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고, 어색하기 짝이 없는 불어로 내가 '봉쥬르 마담'이라 하면 늘 그랬듯 그녀는 유창한 불어로 내게 대답해 줬다. 곧이어 안부를 묻는 그녀의 말에 나는 빠르게 대답했다.


- 나 지금 니스야!

- 뭐라고? 어디라고?

- 니스!


갑작스러운 나의 니스행에 그녀는 적잖이 놀란 듯했지만 너무나도 반갑게, 따뜻하게 나를 환영해 줬다.

언니와 함께 지금은 칸느에 있다는 그녀, 일정이 없으면 칸느로 넘어오라고 제안했다.


why not?


니스에서 칸느는 기차로 30분가량이면 도착하는 옆 도시다. 나는 M을 만나기 위해 칸느로 가기로 했다.




칸느에서 재회한 우리는 10대 소녀들처럼 서로를 반겼다.

오랜만에 만난 우리 둘은 쇼핑거리며 이곳 저곳을 둘러보았다. 그녀에 의하면 칸느는 쇼핑하기에 좋은 곳이라 그녀는 주로 쇼핑하러 온다고 했다.


쇼핑 거리를 벗어나 그녀가 관광객인 나를 위해 손수 데려다준 명성 높은 칸느 국제 영화제가 열리는 곳.


당시에 예쁜 줄 알고 씌웠던 필터효과.. 오늘은 그걸 지우기 위해 흑백 효과를


때마다 영화제 시즌이면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아주 붐빈다는 칸느, 그리고 이곳 일대.

TV에서나 보던 곳에 와있으니 새삼 내가 한국밖에 나와 있구나 싶은 생각이 또 들었다.


일상을 여행하는 것처럼 살 수 있다면,

익숙한 것들이라 여겨 그냥 지나치지 않고 그 시간에 조금 더 머물 수 있는 여유가 있다면

그게 어디가 됐든 늘 새로울 텐데.. 

말이야 쉽지 그렇게 산다는 게 쉽지 않다.


나조차도 처음 런던에 왔을 때만 해도 눈을 이리저리 굴리며 이것도 신기, 저것도 신기. 모든 게 새롭고 매일이 설레던 날들이 일상이 되고 난 이후엔, 반복되는 날들에 심드렁해지고 말았으니까.


그럴 때면 되새기고 다짐해 보는 것이 있다.

우리 인생은 유한하고, 머물 수 있는 시간 역시 한정되어 있다는 것.

중요한 건 어느 장소에 있느냐가 아니라 내가 어떻게 마음먹고 보느냐에 달려 있다고 말이다.




다시금 모든 게 새로워진 주변 환경 덕에 나도 관광객 모드로 레드카펫이 깔린 계단에서 사진을 찍었다.

지중해를 눈앞에 둔 시상식장이라니,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영화제가 열리는 곳에서부터 발걸음을 옮겨 걷기로 했다.


지중해를 낀 프랑스 남부답게 이국적인 풍경이 나를 사로잡았다.

해안가를 따라 많은 레스토랑과 바(bar)들이 늘어섰고 가는 곳마다 사람들로 붐볐다.

여름 냄새가 폴폴나는 칸느 사람들, 아니 관광객일까?
골목 골목 걸어다니는 재미가 쏠쏠
spirit of cannes는 뭘까, 알고 싶었지만 굳게 닫힌 문.


그중에서도 왜 그렇게 야자수 나무에 집착을 했는지, 아래엔 나의 야자수 컬렉션이 이어질 예정이다.


매일 야자수를 보는 M은 뭐 찍을 게 있냐고 내게 그만 좀 찍으라고 했다.

익숙해진 그녀에겐 그저 그런 나무에 불과한 야자수가 관광객인 내게는 셔터를 누르게 만드는 존재로 바뀌는 순간들.


야자수 삼매경에 빠졌던 내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우린 해변가를 걷고 있었다.

포기 못해, 마지막 한그루의 야자수라도


칸느 해변을 따라 걸으면서 우린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녀의 근황, 나의 근황. 앞으로의 계획과 불확실한 것들에 대한 불안, 그러면서도 동시에 갖게 되는 설렘 같은 것들. 그리고 우리가 공유했던 런던에서의 시간들.

누군가와 함께했던 추억을 돌아보고 그때를 회상하며 웃을 수 있다는 건 감사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의 그 시간들에 그녀가 함께 있어줘서 참 고맙다. 쑥스러워 입 밖으로 그 말을 뱉지는 못했지만 말이다.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하고 걷다 보니 해가 지기 시작했다.

프라임 스팟에 앉아 노을을 보는 사람들



하나 둘, 해변을 떠나는 사람들, 남은 사람들.



마지막까지 해변의 여유를 즐기는 사람들



어느 순간 문득, 추억하게 될지도 모를 시간들을 함께 보내는 사람들.



노랗게 물든 해변을 빠져나와 우리는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리고 거기서 나도 M과 인사했다.

그날, 우리는 다시 만날 날을 기약했지만 지금까지도 다시 만나지 못했다.

그렇지만 언젠가 우리가 다시 만나게 되는 날, 마지막 우리가 헤어질 때와 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따뜻하게 안고, 비쥬로 인사하며 안부를 묻게 되리란 걸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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