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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슈눅히 Jun 04. 2021

출근과 퇴근길

왕복 4시간

런던에서 근무할 때, 일주일에 두 번 때때로 세 번은 서쪽에 위치한 집에서 동쪽 끄트머리에 위치한 곳까지 출퇴근했다.


출근지로 가기 위해선 새벽 6시 오버그라운드를 타야 했는데 6시 열차를 타려면 그 보다 일찍 일어나야 했기 때문에 출근 전날은 만반의 준비를 마치고서야 잠이 들 수 있었다. 혹여라도 열차를 놓친다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내게 5시 40분이라는 마지노선을 지키는 건 꽤 중요한 일이었다.

무조건 아침 6시 열차를 타는 것 만이 살 길이었기 때문이다.


가끔 종잡을 수 없는 오버그라운드의 지연 혹은 취소가 생기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클라이언트에게 연락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합의하에 정당한 지각(?)을 할 수 있었다.

물가 높은 런던에서 2시간 소요되는 거리를 택시를 타고 오라고 할 이는 목숨이 위태로운 상황이 아니고서야 없지 싶다.



동트기 전 Hackney Down station, 2019



내가 왕복 4시간의 출퇴근을 한다고 남들에게 말했을 땐 다들 미쳤다고 했다.

지금 생각하면 어떻게 그 부지런을 떨며 살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때는 견딜만했다.

일출을 보며 달리는 열차 안에서 노래를 듣거나 노트에 이것저것 끄적이다 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하곤 했으니까.


유난히 붉은 일출, 2019


6시 30분과 7시 사이쯤엔 환승역에 도착했다.

열차 시간 간격이 넓은 터라 거기서 항상 20분가량 다음 열차를 기다렸는데 어느 계절, 그 시간대에 떠오르는 해를 보는 게 좋았다.


그리고 그 환승역엔 아침 활력을 북돋아 주는 한 사람이 있었다.


환승역인 Hackney down, 거기엔 자신의 일을 즐기는 게 분명한 역사 직원이 있다.

얼굴은 한 번도 본 적 없지만 목소리 톤으로 짐작하건대 흥이 넘치고 스웩이 넘치는 흑인 청년일 거라 머릭 속으로 상상했다. 그는 곧 열차가 들어온다든가, 무슨 열차가 얼마간 지연된다는 소식을 노래 부르듯, 때로는 랩을 하듯 안내방송 해주곤 했다.

그런 그의 안내방송 리듬에 맞춰 내 기분도 춤추듯 좋아지곤 하는 아침이었다.


아직 남아있는 지난밤을 밝히던 가로등 불


이른 출근길은 러시아워보단 한산하다. 그러나 그 시간에도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은 존재한다.

나이, 성별 그리고 인종을 가리지 않고 새벽을 여는 부지런한 사람들을 많이도 보았다.

혼자가 아니라는 위안을 받기도 했고 남들보다 이른 시간 움직이는 이들에 대한 존경과 동시에 어쩐지 안쓰러운 마음이 그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들 때도 있었다.


이른 아침 독서시간


대체로 열차 안에서 사람들은 부족한 수면 보충을 위해 창에 머리를 기대고 쪽잠을 자거나 핸드폰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듯했다.

나는 보통 간단한 아침을 먹거나, 노래를 들으며 창 너머 세상 구경을 주로 했다.

그리고 아주 가끔 출근길 독서를 하곤 했는데 사실 그보단 환승역 안의 작은 카페에서 햄치즈 크로와상과 블랙커피를 주문해 야금야금 먹을 때의 기분, 그런 기분을 내기 위한 작은 사치, 작은 여유를 부리던 그런 시간들을 좋아했고 더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다.



계절마다 꾸미던 역 이름 장식



목적지에 도착할 즈음엔 8시가 가까운 시간이라 등교하는 학생들부터 점점 많아지는 출근길행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교복 입은 아이들을 문 앞에서  마중하던  부모님, 그런 부모에게 손키스를 날리고 돌아서며 힘찬 걸음을 내딛던 아이들, 열차를 놓칠까 전력 질주해서 달려오던 회사원들 그 반대로 여유로운 커피 한잔을 들고 거니는 사람들, 강아지 산책시키던 사람들


같은 출근길이지만 때마다 다른 풍경을 보곤 했다. 지구 상에 존재하는 인구수만큼 매일 다른 아침이 있다고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저마다 다른 퇴근, 그리고 삶



퇴근길은 더 재밌는 일들이 많았고 구경거리가 많았다.

화려하게 드레스업 한 이들이 열차에 올라타기도 했고 유튜브가 만연한 시대인 만큼 열차 안에서 춤을 추고 노래하며 촬영하는 이들도 많았다. 그 덕에 뜻밖의 재미난 상황을 많이도 목격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예고 없는 장대비, 그리고  지연된 열차를 기다리는 시간


우산 하나에 옹기종기 모여든 귀여운 런더너들



내게는 달리는 열차에서 갑자기 뜬 무지개를 본 날이 기억에 남는다.

사람들이 모두 창가로 움직이며 사진을 찍던 그날,

모두 옅은 미소를 입가에 머물고 누군가에게 뜻밖의 이 아름다운 광경을 공유하던 그날 말이다.



뜻밖의 무지개


아니면,

해가지고 푸르른 밤이 스며들던 하늘에 떠오른 달을 본 날과 같은 기억들.

재촉하던 퇴근길 발걸음을 늦추고, 그 시간에 조금 더 머무는 일


누구도 강요한 적 없으나 어딘가로 바삐 움직여야 한다는 압박과 강박이 나를 사로잡던 그때에

긴 출퇴근 시간을 가지게 된 건 어쩌면 큰 행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달이 뜬 밤



어느 날엔 열차 운행시간이 바뀌는 바람에 런던에서 아주 큰 환승역인 Liverpool station에 머물렀다.

많은 유동인구와 이도시와 저 도시로 가는 열차들까지 합류하는 구간이라 늘 혼잡한 이곳,

바삐 움직이거나 기다리며 머무는 사람들이 혼재하는 곳.


기다림은 어디에나 존재하고, 그 시간을 보내는 방법은 무궁무진하다.

내게는 무언가를 읽으며 그 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제일 잘 맞다.



노부부가 기다림을 보내는 방법



긴 퇴근길 끝에 집에 도착하면 사실 녹초가 된다. 어쩌다 열차가 지연되면 집에 도착하는 시간은 10시가 훌쩍 넘어가 버렸으니 말이다.

그런 반복되는 긴 출퇴근길에서 무수히 많은 생각을 하고, 수많은 이들의 삶을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퇴근길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삶은 끊임없는 출발과 도착의 연속이고, 잠시 머물  또다시 어딘가로 향하는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이다.


다만, 우리 삶에서 출발과 도착시간은 열차가 정해진 시간에 움직이는 것과는 다르다는 .


정해진 시간에, 혹은 남들 시계에 맞춰 목적지에 닿을 필요 없고, 머물고 싶은 곳에서 내가 머물고 싶은 만큼 머물다 내가 떠나고 싶은 시간에 떠나는 게 우리의 삶일 거라고 말이다.


 삶은, 우리 삶은 그래야 한다고 말이다.


내 삶은 기필코 내가 정한 시간에 따라 여행하기로 다짐하게 해 준 나의 기나긴 출퇴근 시간들에 고마움을 전한다.



해가 지는 Hackney Down station,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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