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슈눅히 Mar 03. 2024

비전공 개발자의 독일 스타트업 직장생활

06. 나는야 자유로운 일개미

사람 사는 건 어디나 비슷하다.

모두들 언젠가 이 한 몸이 세상에서 홀연히 사라질 걸 알지만 주어진 시간을 잘 써 보려고 부단히 애쓰는 것처럼 지구 반대편 사람들도 그렇게 살아간다.

@cafe am neuen see in Berlin (photo by me)


하지만, 독일과 한국의 직장생활엔 다른 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이미 지겹게 어디서 읽고 들었던, 모두들 흔히 말하는 "워라밸". 워킹 앤 라이프 밸런스와 "조직 구조"에 크나큰 차이를 나는 절절히 느꼈다. 적어도 내가 느끼고 경험한 바에 의하면 말이다.


지난날, 한국의 전형적인 수직상하관계 조직 구조에서 생활하던 나는 가랑비에 온 젖는 줄 모르 듯 혹은 습자지에 물이 서서히 스며들 듯 그 구조에 익숙해져 있었다. 내 성격도 굳이 묻지도 않는데 적극적으로 내 의견을 표현하는 쪽보단 수용하는 편이기도 했고, 그 편이 직장 생활하기에 편했다.


그럼 독일에서의 첫 직장생활, 스타트업에서 개발자로 일하던 나의 업무 환경은 그 전과 어떻게 달라졌을까?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내 경험은 수백, 수천 명의 직원을 거느린 대기업의 경우가 아니라 소규모 스타트업에서 비롯됐다는 점을 일러두고 싶다.)


@cafe in Zurich (photo by me)

재택근무

내가 입사할 때만 해도 팀원 모두 베를린에 살고 있었다. 종종 만나서 업무를 진행할 때도 있었는데 어느새 둘러보니 나와 디자이너를 제외하고 모두 독일 밖으로 떠났다. 원래도 재택근무였지만 종종 만나는 일까지 없어지다 보니 100% 재택 근무일뿐만 아니라 업무에 지장을 주지 않는다면 유럽권 밖, 어느 나라에서 일하든 상관없었다. 무려 7-8시간 시차가 나는 한국에서 두 달이 넘게 일한 적도 있었다!


사무실에 다 함께 모이는 일이 없다 보니 1주일에 한 번 전체 미팅을 통해 개인 근황 및 각 팀의 한 주간의 업무 상황을 요약하고 새로운 features 공유, 브레인스토밍을 통한 새로운 업무 틀을 형성하는 시간을 꼭 가졌다. 이런 재택근무로 인한 업무 효율은 동료애 형성과는 반비례했다.


모두 뿔뿔이 흩어진 팀원들을 지정학적으로 한 곳에 모으기란 힘든 Remote의 특성상, 팀 이벤트는 전무했고 팀원과의 교류할 수 있는 접점이 없어 가까워질 수가 없었다. 이미 퇴사한 지 7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한국의 몇몇 직장 동료들과 아직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나로서는 직장 동료와 업무적 관계를 넘어선 유대관계를 형성할 수 없었다는 점이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혹자는 직장에 일하러 갔지, 친구 만들러 갔나?' 하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맞는 말이다.

나 역시도 '나의 독일인 베프를 직장에서 만들고야 말겠어!' 하는 마음은 일절 없다. 다만 내게는 같이 일하는 사람과의 긍정적 상호관계, 유대형성도 중요한 직장 생활의 요소이다. 업무가 아무리 힘들어도 버틸 힘이 나는 건, 매달 들어오는 금용치료도 한몫하지만 그것과 더불어 같이 일하는 사람들과 주고받는 격려와 지지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쓰고 상사 뒷담화로 푸는 스트레스라고 읽는다.)


하지만 만약, 누군가 그럼 넌 동료애 빌드업을 택할래 재택근무를 택할래 한다면? ㅈ..ㅐ..택...


한 줄 요약: 재택근무는? 축복이다.


@Intense coffee, Luxemburg (photo by me)

업무 전달

내가 다닌 회사는 권위의식 없는 CEO와 CTO가 꾸려 나가는 곳이었고 수평적 조직 구조 그 자체였다. 단 한 번도 수평적 조직구조를 경험한 적 없던 나는 이곳에서의 업무 지시 방식이 낯설기만 했다.


이곳은 업무가 '지시형'이 아니라 '도출형'으로 주어졌다. 그 말인 즉, 독일 직장상사는 자꾸만 내게 의견을 물어본다. 바로 이 개방적 의사소통을 통한 업무 도출이 가장 큰 장점 중 하나이다. 서로가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고 수용하면서 더 나은 방향으로 결과를 도출하기 위한 조율작업을 끊임없이 한다.

다만, 초기 입사 당시에 나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많은 생초짜 중에 초짜인데 내 능력치 이상의 무언가를 바라며 질문할 때는 곤혹스러웠다. "지금 잘 모르겠는데 찾아보고 보고드릴게요". 가 나의 18번이었다.


그리고 '조사 및 보고'의 기한은 절대 반나절을 넘기지 않았다. 다음 피드백을 받고 일이 진행되어야 하는 우리는 '엔진 부스터를 단 스타트업'이니까. 지금은 감사한 것이, 당시 타 회사 주니어들이 하는 업무의 배 이상을 한 덕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오버타임 하면서 흰머리가 늘어날 것만 같은 알고리즘을 짜 넣어가며 애쓴 만큼 결과도 눈앞에 보였다. (수치화되는 회사 성장 및 클라이언트 증가 그리고 나의 인상된 연봉이 바로 그 증거였다.)


한 줄 요약: 이것은 업무전달인가 물음표 지옥인가(feat. 하두유띵ㅋ?)


@Intense coffee, Luxemburg (photo by me)


자율성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지시가 적다 보니 자율성이라는 큰 베네핏을 가지게 됐다. 알아서 업무를 찾아 보고하고 피드백을 받는다.


미팅 참여 횟수가 늘고, 내 의견 수용이 많이 될수록 업무에 '오너십'이 커지고 그만큼 당연히 이 업무를 잘 해내고 싶다는 마음은 '몰입'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작디작은 회사이니 만큼 이런 나의 공헌이 회사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내 눈으로 볼 수가 있다. 그건 정말 짜릿한 경험이다. 내가 회사에 쓸모가 있다는 것을 확인한 만큼 다음 프로젝트에서도 회사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커진다.


내게 부과된 자율성이 커진다는 것과 내게  질문을 많이 한다는 것은 좋기도 하지만 그만큼 명확한 지시가 없어 때로는 답답했다. 어떨 땐 직관적이고 명확한 업무 지시를 해줬으면 좋겠는데 두리뭉실하고 알맹이가 없는 업무 지시를 받을 때면 항상 추가 질문을 하고 구체화시켜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르기도 했다. 이 부분은 리더십의 부재로 느껴져 많이 아쉬웠던 부분이다.


구조적 틀이나 리더의 기준이 명확히 갖춰진 상태일 때 자율성이 가진 효율성이 극대화된다는 걸 이 스타트업을 통해 많이 느꼈다.


한 줄 요약: 더 이상의 마리오네트 도비 생활은 없다. 나는야 후리한 도비!


Berlin (photo by me)

워라밸

우리가 만드는 제품의 퀄리티를 높이려면 그 퀄리티를 만드는 우리의 역량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개인 역량 및 업무 퀄리티를 높이는 건 의자에 오래 앉아 있는다고, 모니터를 더 오래 들여다본다고, 즉 수적이고 양적인 시간을 더 많이 할애한다고 해서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업무를 하는 이의 신체적, 정신적 그리고 삶의 질이 오를 때 모든 것들이 더 좋은 결과를 낼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실리적인 독일사람들은 그래서 이런 부분도 빨리 알아차렸던 걸까?

독일의 대부분 회사에선 병가도 자유롭게 쓰고, 생일엔 생일 휴가도 주고, 크리스마스엔 화끈하게 연말부터 연초까지 2주가 넘는 회사 자체 휴가를 갖기도 한다.


그 외에도 복지 혜택이 정말 많은데 다들 하나같이 '눈치'보지 않고 잘 누리고 산다. 바로 이 '눈치'보지 않는 태도로 나의 권리를 주장하고 의견을 낼 수 있는 환경이  이곳엔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다. 물론 의견을 낼 때는 합당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밑도 끝도 없이 눈치 없는 이기적인 주장만 내세우는 사람은 독일에서도 꼴불견으로 통한다. 앞서도 말했듯이, 사람 사는 건 다 비슷하니까 말이다.


한 줄 요약: 그놈의 워라밸, 좋긴 하다.

 

Berlin (photo by me)

워라밸과 조직구조에서 다른 점을 보고 경험했다고 했지만 독일에서도 상하수직구조적 성격이 강한 곳들이 많이 존재한다. 모든 기업이 수평적인 구조를 가진 건 아니란 것이다.


독일인 친구들 중에 이런 전통적 조직문화를 가진 곳에서 일하는 친구의 일화를 예로 들면, 능력은 없지만 그득히 찬 연차를 가지고 상급자 자리를 차지한 상사 덕분에 아랫사람들이 골머리를 앓는다는 이야기를 만날 때마다 해준다. 어? 잠깐만, 이거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레퍼토리인데?


그렇다. 독일이라고, 유럽이라고 모두가 환상적으로 수평적인 조직구조에 판타스틱한 업무환경을 가진 건 아니다. 그 친구도 스트레스받으면서, 직장 상사 욕하면서, '퇴사할 거야!'라고 몇 달째 이야기하면서 아직 그 회사에 다니고 있다. 나도 장점이 많은 회사이지만 다니면서 '어디로 이직하지?' 하는 생각을 수시로 품었다.


인간이란 적응의 동물이고 적응하고 나면 더 나은 곳과 비교하게 되기 마련이니까.

그럴 땐 나의 모친께서 내가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할 때마다 해주시는 한 문장을 떠올린다.


'다 마음먹기 나름이다.'


그렇다. 다 마음먹기 나름이다. 내 마음, 내가 보는 관점에 따라 지금 있는 곳이 만족스러운 곳이 될 수도 지옥이 될 수도 있다.


과연 내 마음에 쏙 드는 완벽한 직장이란 것이 존재하긴 할까?

다들 적당히, 어느 정도 타협하며 슬기로운 직장생활을 이어간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오늘도 고생한 우리에게 스스로 어깨를 토닥여주자!



매거진의 이전글 전공 개발자를 쳐낸 비전공 개발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