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서서히 가라앉는 중입니다. 끝없이 깊은 곳을 향해
2020. 10. 1. 오전 12:20
9월의 마지막 날, 추석 이브.
엄마의 몸 상태는 롤러코스터가 움직이듯 급격히 나빠졌다가 갑자기 좋아지기도 했다. 열흘 넘게 항생제를 맞으며 먹는 것도 없이 잠만 자다가 영양제 덕분인지 오늘은 갑자기 생생해진 엄마가 신기하기만 하다. 또 이런 하루에 감사하다.
계륵 같은, 아버지라는 사람 덕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것이 걸린다. 힘들수록 더 많이 웃고 즐거운 태도를 가져야 하는데, 아버지라는 그 사람은 눈엣가시처럼 거슬린다. 처음에 엄마가 진단받았을 때 병원 근처 식당에서 육개장을 먹다가 “엄마가 소고기 먹고 싶다 했었어.”라며 눈물을 훔치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때 알아차려야 했는데. 그것이 악어의 눈물이었음을. 며칠 뒤에 납골묘를 검색하고 있는 그 사람의 실체를. 입맛이 없어 부쩍 까탈스러워진 엄마가 그새 버거웠는지 아프단 걸 알기 전엔 졸혼을 생각했다는 망언을 쏟아내던 사람.
먼 훗날 엄마가 아버지보다 세상을 떠나게 된다면 아마도 분명 아내를 위해 무진 애를 쓴 남편이었던 것처럼 사람들 앞에 연기할 모습을 상상하니 벌써 침을 뱉고 싶어지고 속이 뒤틀린다.
지금, 이 순간에도 엄마가 없어야 본인이 편해질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거란 생각을 하니 아주 끔찍하다.
이제 내겐 아버지란 사람이 없는 셈 쳐야겠다. 어차피 내 인생에 큰 도움이 된 적 없으니 크게 아쉬운 것도 없다. 털어내니 가볍고 편하다. 나중에 아버지 노릇 못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는 걸 지켜볼 거다. 더 늙어서 병들었을 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손 털 거다.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가 없었던 것처럼, 깨끗이 부정해 버릴 거다.
‘뜨거운 여름밤은 가고 남은 건’ 슬픔뿐이었다.
2020년 9월, 엄마는 두 번째 항암제 투약 주기를 마무리하고 퇴원해서 59번째 추석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집온 뒤로부터 30년 넘게 시달렸던 명절증후군에서 해방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추석이었다.
엄마는 유독 명절을 힘들어했다.
설날과 추석, 기제사 일주일쯤 전부터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명절 음식 하느라 허리가 휘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음식은 주로 집에서 동그랑땡이나 호박전 등등을 부쳐갔고,
나랑 둘이 앉아서 온갖 사람들 뒷담화를 하며 만들었는데(그래도 음식은 맛있었다)
나는 으레 엄마를 도우면서 슬렁슬렁 음식 하는 것이 싫지 않았다.
스트레스의 근원은 사람이었다.
엄마는 시어머니와 형님들을 어렵고 불편해했다(‘K-시월드’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한다).
유구한 세월 동안 이런저런 일이 얽혀 눈물로는 다할 수 없는, 눅진한 한(恨)이 쌓여갔다.
그게 명절증후군이 되었던 것 같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로도 몇 해는
큰아버지 댁에 모여 차례를 지내고 명절 음식을 나눠 먹으며 산소에도 다녀오곤 했다.
그러다 큰집의 사촌 오빠와 언니가 결혼해서 아이들도 생기고 했으니
이제 굳이 큰집에 모이기보다는 명절엔 형제들 각자의 집에서 오붓하게 보내고
할아버지 할머니 산소에서 만나는 것도 좋겠다고 얘기를 꺼냈다가 결국 사달이 났다.
큰아버지와 큰어머니는 크게 화를 내셨고,
엄마는 나와 함께(무슨 일이 있으면 엄마 곁엔 대개 아빠보단 내가 먼저였다. 고마워요, 엄마)
큰아버지께 찾아가 사죄드렸다.
그럼에도 회복되지 못한 관계는 갈수록 멀어졌고,
가족이지만 가족이라 부르기 어려운 그런 ‘홍길동’ 같은 관계가 되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 레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를 읽게 되었다.
그땐 잘 몰랐지만,
그 유명한 첫 문장이
-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 무슨 뜻인지 그제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우리 집안은 콩가루 집안이구나’라고.
나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남보다 못한 친척 사이가 되고 나니,
그 문장이 너무도 명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엄마가 평생 ‘인복이 없어서 원통하다’ 한 것이 그땐 잘 이해되지 않았지만, 지금은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정말 엄마는 지지리도 복이 없었다.
엄마의 원가족에게도 충분히 사랑받지 못했고,
결혼 후 시댁 식구들로부터도 제대로 환영받지 못했다는 점에서는 참 기구한 운명이었다.
그래도 ‘명절 독립 선언’ 이후 2~3년은 우리 가족끼리 그냥 맛있는 것 해 먹고 푹 쉬며 여유롭게 보냈는데,
그해 추석은 여느 해보다 더 울적했던 기억이 있다.
엄마가 아파서 응급실에 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 해도 참 감사한 일이었다.
2020. 10. 8. 오전 1:21
나의 본가에는 내 옷이 별로 없었다. 7년째 집을 떠나 살다 보니 본가에는 올 일이 없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오래되거나 몸에 잘 맞지는 않지만 버리기는 아까워 남겨둔 옷이 있었다. 집으로 내려올 때 기온에 맞지 않는 옷을 가져와 입을 것이 없다 보니, 하는 수 없이 내버려 두었던 옷을 꺼내 입었다. 불편해도 꾸역꾸역 어찌 입긴 입었지만, 거슬리는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즐겨 입던 청바지와 새로 산 옷을 가져와 놓고도 어쩐지 계속 불편한 그 옷을 입고 또 입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꽤 오랫동안 나조차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어울리지도 않고 편하지도 않은 옷을 껴입으며 속으로 되뇌었던 것은 아닐까.
‘이건 불편한 게 아니야. 당연한 거야. 이건 내가 선택했던 것이니 지금도 나에게 맞는 거야. 이건 원래 내 것이었고 계속 내게 머물러있어야 하는 거야.’
이상한 강박감이 나를 옥죄고 있었다. 어디에서, 언제부터 비롯되었는지 모를 생각이었다.
어느 날, 내게 맞는 옷이 눈앞에 들어왔고 불편한 옷을 미련 없이 버렸다. 진작에 했었어야 하는 일이었다. 후련했고 아쉬움은 없었다. 앞으로도 그러길 바랐다.
2020. 10. 9. 오후 7:48
오늘은 이상하게 마음이 너무 아프다. 외로움에 압도당하지 말지어다. 내가 가진 힘을 믿고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 이대로도 괜찮다. 나쁜 것만 생각하지 말고, 좋은 것들을 생각하자. 얽매이지도, 천착하지도 말자. 생각의 사슬에서 벗어나자. 그냥 나로 살자. 누구의 딸도 아닌, 그냥 나. 세상에 하나뿐인 나.
2020. 10. 9. 오후 8:35
사랑 없이 습관만 남은 관계는 얼마나 유효할까. 아무리 애써도 가까워질 수 없고, 도무지 달아오르지 않는, 껍데기만 남은 사이가 있었다. 말버릇이 되었는지 통화 끝에 내뱉는 “사랑해.”라는 말. 그 가슴 떨리는 말을 들어도 아무런 감흥이 없어, “나도 사랑해.” 하는 대신 “나도.”라고 짧게 두 글자로 답했다. 말은 짧아지고 마음의 거리는 더 멀어졌다. 서로가 머물러있는 장소의 물리적 거리가 멀어진 만큼, 서로가 만나지 않는 시간이 길어진 만큼 서로에게 소원해졌다. 그보다 더 많이 서로의 마음이 식었는지도 모른다.
그 사람에 대한 사랑이 떠나버린 건 내가 양지바른 곳에서 씩씩하게 유년기를 보내지 못했기 때문이었을까. 메마른 감정 속에서 때로는 눈물 때문에 눅눅함이 가시지 않은 곳에서 자라난 나는 돌이켜보면 사랑이 고팠다. 그러나 사랑의 결핍을 다른 욕망으로 채웠다. 가끔 여행을 가거나, 이름 모를 사람들 속에 고립되거나, 책을 보거나, 영화를 보면서 사랑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기고 살아왔다. 긍휼한 사랑 속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증명하기라도 하듯 눈을 가리고 귀를 닫으며 애써 무관심한 척 지냈다.
아빠와는 계속 크고 작은 다툼이 있었고,
당시 만나고 있었던 남자 친구와도 그저 그런 사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엄마가 암 진단을 받은 뒤엔 엄마를 먼저 챙기느라
나를 돌보는 건 우선순위에서 계속 밀려나고 있었는데,
병원에도 제때 가기 힘들어 의도치 않게 약을 끊는 상황이 되었다.
어쨌든 약을 끊었으니 좋은 거라고 해야 할까.
결국 10월 어느 날, 나는 몇 달 동안 마음속에 품었던 칼을 꺼내 하나의 관계를 정리했다.
내 마음이 갈기갈기 찢어지고 힘들어 죽을 지경이어도 관망만 하던 남자 친구와 헤어졌다.
늦은 저녁 어느 한적한 카페에서 만나 그만하자는 말을 하고 (나름) ‘쿨’하게 헤어졌지만, 집에 와선 후회했다. 드라마에서 보는 것처럼 컵에 담긴 물이라도 얼굴에 뿌려주고 나올걸 하고.
나의 우울증 그래프는 2020년 6월 초반까지는 정상 수준에 가깝게 우상향 하여 회복해 가는 상황이었고,
이를 긍정적으로 평가한 나의 주치의께서는
심리검사를 통해 확인해 본 뒤 약을 끊어도 되겠다고 긍정적 신호를 주신 상태였다.
하지만… 엄마가 암인걸 알고 난 뒤 모든 건 산산이 부서졌다.
유년기에 겪었던 힘든 일은 인생의 쌉쌀한 맛, 학교에서 선생으로 겪은 일이 인생의 쓴맛이었다면,
엄마가 아픈 뒤로 겪은 모든 일들은 사약을 먹었다면 이런 맛일까 싶은, 그런 맛이었다.
멀쩡히 숨은 쉬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으론 ‘아, 내가 이렇게 죽겠구나.’ 생각이 들게 되는,
잠깐이라도 정신줄을 놓치면 이 세상에서 내가 사라져 버릴 것만 같은 위태로운 상황.
심리검사를 예약했던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렸다.
우울증 상태가 좋아져 예약금을 내고 심리검사를 두세 달 전에 예약했는데
취소해도 예약금을 돌려받을 수 없어서 울며 겨자 먹기로 심리검사를 받긴 했지만,
검사받는 내내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검사 안 해봐도 너무 뻔한 결과일 텐데.
‘이건 우울하다는 말로는 설명이 한참 부족한 상태예요. 전 정말 죽을 것 같아요.’
아무리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고, 애써봐야 무기력해지기만 하는 절박한 상태에서
마지막으로 남은 유일한 동아줄은 상담뿐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상담 선생님을 만나 한 시간 내내 울며 하소연이라도 하면
조금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상담 선생님만이 나를 구원해 줄 유일한 구세주였다.
(상담 선생님은 손사래 치며 매우 부끄럽고 민망해하시겠지만, 사실이었다)
얼마 뒤 받아본 심리검사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 사고상 핵심적인 사안들 위주로 생각을 효율적으로 정리하지 못하고 있는 양상임. 이전 평가에서 감소했던 침습적 주변 사고도 다시 상승한 상태로 여러 가지 생각과 잡념으로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로 보임. 또한 전반적인 지각적인 정확도와 관습성도 낮게 나타나 상황에 적절한 판단과 대처 구사가 어려울 것으로 시사됨. 정서적으로는 여전히 전반적으로 가라앉아 있는 기분 상태를 지니고 있으며 심리적 에너지 수준이 낮아 쉽게 힘에 부치고 소진되는 느낌을 가질 수 있겠음. 그리고 상황적 스트레스로 인해 유발되고 있는 내적인 긴장과 초조감도 상당할 것으로 시사됨. 현재 본가에서 지내며 가족 관계 내에서 정서적으로 소원한 느낌이 크게 부각되고 있는 듯한데, 가족구성원들에 대한 감정을 해결할 수 있도록 돕는 치료적 과정이 필요할 것으로 보임.
- Suggestive of r/o Persistent Depressive Disorder
2020. 10. 25. 오후 10:16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가족들과의 단란하고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은 진짜 행복이었을까, 아니면 행복을 가장한 채 왜곡되어 각인된 추억일까.
불투명하고 어두운 미로 속을 걷는듯한 이 순간에 스치며 지나가는 오랜 기억 속에서 웃고 있는 희미한 모습의 나.
지금의 지치고 찌든 모습의 나와 너무 다른 것 같아서 낯설다. 그러나 그립다.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던 시간이.
엄마는 정말 나아질 수 있을까. 지금 나아지는 중인 걸까. 불안과 초조함에 사로잡혀 생각을 명료하게 정리할 수 없다.
2020. 11. 4. 오전 12:14
엄마의 몸속 악성신생물은 독한 화학물질에도 끄떡없이 너무도 건재하다. 세력을 더 넓혀 가는 기세가 무섭고 두렵기만 하다. 시간이 흐르며 암도 커지기만 한다는 사실이 절망적이다. 후회는 하지 않으려고 애쓰지만, 한 달 전 그때 CT를 찍고 나서 전이 부분이 커졌다는 걸 알았을 때 솔직하게 말해야 했을까 자꾸 되뇐다. 불안감에 사로잡힌 엄마를 보자니 마음이 착잡하다.
지금껏 살아오며 사람이 죽고 사는 결정을 내려본 일이 없었다. 중요한 결정이라고 해봐야 대학을 어디로 갈지 정하거나 직업을 어디서 어떻게 구할지 정하는 일 정도였지만, 그 결정으로 인한 파장은 나에게 미치는 것이 전부였다. 내가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이 엄마가 살아갈 날을 결정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보면 참으로 무겁고 어려운 책임이란 생각이 든다. 모든 결정을 내가 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찾아오는 선택의 순간에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헤매곤 한다. 누군가 내 짐을 대신 짊어져 줄 수 있다면, 남편도 아들도 있지만 중요한 상황에서는 나에게 꼭 묻곤 하는 엄마의 눈을 보면 아득해진다. ‘내가 잘못 판단해서 당신의 시간이 짧아질까 봐 겁이 나고 때로는 도망가고 싶을 때도 있답니다. 선택은 온전히 당신 몫이었으면 해요.’ 이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조금 돌려서 ‘내가 아팠다면 나는 뭐든 좋다는 것은 다 해봤을 텐데, 엄마의 몸이 아픈 거라 함부로 할 수 없다. 잘못되어서 엄마가 나빠지면 그 아픔을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다. 중요한 것은 엄마가 어떻게 하고 싶은가 하는 점이고, 엄마가 결정하면 나는 전적으로 따르겠다.’라고만 말했다. 그래도 후회는 남겠지만.
복잡한 머릿속과 마음을 정리하러 저녁 미사에 갔다. 손님으로 오신 신부님이 좋은 이야기를 해주셨다. 나무에 옹이가 있으면 다듬기는 어렵지만 향기는 진하다고. 사도 바오로께서는 우리가 모두 거룩한 사람이라고 말씀하셨다며. 우리는 모두 거룩한 존재라고. 맥락이 있는 이야기였는데 집중해서 듣지 못해 귀에 걸린 이야기만 기억에 남았다.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이야기이다.
10월이 되자 어김없이 하늘은 더 푸르게 변하고 은행나무도 노랗게 변해가며, 가을은 더 완연해졌다.
문제는 엄마의 병색도 완연해졌다는 것이었다.
항암제 투약 3번째 주기를 넘어서 4번째 주기에 접어들었는데도 상태는 악화일로였다.
사전에서 ‘절망’의 유의어를 찾으면 나오는 낱말들: 낙망, 낙담, 비관, 실망, 실의, 암흑, 좌절, 체념.
이걸 다 합쳐도 엄마의 몸에 독성 항암제를 몇 병 들이부은 일이
헛수고라는 걸 알게 된 날의 내 마음을 제대로 설명할 수 없을 것이다.
환자를 열심히 돌보느라 머리가 하얗게 센 것 같은,
인자하신 교수님도 CT 검사 결과를 말씀해 주시면서 머뭇거리셨던 것 같다.
같은 치료를 이어갈지, 다른 치료를 찾을지 고민해 보는 게 좋겠다고.
엄마에겐 이걸 어떻게 알려야 하나, 입술이 바짝 말랐다.
그 병원에서 처음 암이라는 이야길 들었을 때도,
조직검사 결과가 나와서 진짜 암이라는 걸 확정받았을 때도 애써 숨겼던 나의 절망적인 표정을
그날은 숨길 수가 없었나 보다.
엄마는 교수님과 만나서 이야기하고 난 뒤 내 얼굴을 보고 단박에 알아차렸다.
“CT 결과가 안 좋구나? 얼마나 안 좋은 거래? 상태가 많이 나쁘대?”
엄마가 키워 온 희망의 나뭇가지도 그날 똑 부러졌다.
다만 엄마는 내 생각보다 훨씬 강한 사람이라서 부러진 나뭇가지를 다시 이어 붙이기 시작했다.
친하게 지내던 아주머니의 친척분이 췌장암 진단을 받아
서울대병원에서 수술 후 치료받고 계신다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직접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자세히 묻기 시작했다.
본인이 암이라는 걸 알고 난 뒤로 주변에 거의 알리지 않고 쉬쉬하며 지냈는데
이제는 절박하다는 생각이 들었나 보다.
그러고는 나에게 당장 서울대 진료 예약을 잡으라고,
예전에 쓸데없이 SV병원이니, S병원이니 말 꺼내지 말고 먼저 서울대병원부터 알아봤어야 했다며
나를 구박했다.
나는 “그러게, 내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우리나라에서 제일은 역시 서울대인데, 서울대병원부터 알아볼걸 내가 너무 멍청했어.”하고 맞장구쳐 주었다.
항암에 실패했다고 암 따위에 굴복하지 않는 엄마였다.
엄마가 무너지지 않아서 나도 다시 정신 차리고 일어날 수 있었다.
그 불굴의 의지는 간절한 생의 의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우울증으로 죽고 싶었던 나와는 다르게,
그때의 우리 엄마는 세상 누구보다 애처롭게 살려달라 외치고 있었다.
그 외침이 하늘에 닿기만을 나도 두 손 모아 누구보다 절실히 빌었다.
‘제발 우리 엄마 좀 살려달라고, 구해달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