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서서히 가라앉는 중입니다. 끝없이 깊은 곳을 향해
2020년 11월 첫째 주, 서울대학교 암병원을 찾았다.
소위 ‘Big 5 병원’이라고 하는 곳은 진료 예약부터 전쟁이라는 이야기를 들어서
예약이 너무 늦어지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다행히 금방 진료 예약을 할 수 있었다.
그동안의 치료 경과가 담긴 자료를 가지고 가서 다시 접수하고, 엄마와 손을 잡은 채 진료실로 들어갔다.
여러 검사 결과와 진료기록을 살펴보시던 교수님도 세포독성항암제는 효과가 없으니
지금 진행 중인 임상시험에 참여해서 신약 투여를 해보면 어떨지 제안하셨다.
엄마의 경우 담낭에서 시작된 암이 폐에도 전이가 되어서
폐암에 효과를 보이는 신약 임상에 참여할 수 있을 거라며 고민해 보고 결정하라고 하셨다.
임상시험을 담당하는 선생님께 설명을 듣고 자료를 받아 집에 돌아와서
엄마는 어떻게 할지 한참 고민하다가 임상 참여를 결정했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남은 희망의 한 자락이라도 붙잡아야 하기에 두 눈 딱 감고 저지른 일이랄까.
임상시험에 대한 설명과 약에 대한 부작용 등 여러 가지 정보가 담긴 문서를 받아서 함께 읽어봤지만,
그 정보를 토대로 결정했다기보다는 어떤 절박함이 임상시험 참여를 결정하게 한 것 같다.
임상시험은 아마도 엄마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도전이자 도박이었을 것 같다.
(본인에게 물어보고 답을 들을 수 없어 정확히는 모르지만, 아빠와 결혼한 것도 도박이었을 것 같다. 내가 보기엔 결혼 도박판에서는 탈탈 털린 듯하다)
투여군이 되어서 신약의 효과를 기대할 수도 있지만,
위약군이 되어서 치료를 받는 것도 아니고 시간만 낭비하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달리 기댈 곳이 없었기에, 엄마의 선택은 임상시험에 ‘올인’하는 것이었다.
나도 그 결정이 마음에 들었고, 쉽지 않은 결정을 해준 엄마에게 고마웠다.
메이저 병원 입원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라는 소리도 들었는데 하늘이 도우셨는지(임상시험 참여한다니까 배려해 주신 것이겠지만) 입원 날짜도 금방 정해졌다.
입원 전에 집에서 쉬면서 집 앞에 종종 산책하던 길도 함께 걷고 체력을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부쩍 쌀쌀해진 날씨에 얇은 패딩점퍼를 입고, 모자를 쓰고,
배에 달린 주머니도 잘 챙겨 밖으로 나가면 손을 꼭 잡고 달팽이처럼 걸었다.
느릿느릿 한 걸음씩. 그 내딛는 걸음마다 ‘얼른 낫게 해 주세요.’ 소원을 빌면서.
동생 차를 타고 서울에서 집으로 내려간 지 몇 달 만에 다시 상경한 기분은 이상했다.
서울에서는 뭔가 잘될 것 같은 기분과 함께
혹시나 잘 안되면 어쩌나 하는 불안감이 동시에 찾아왔기 때문인 것 같았다.
뉴스에서나 가끔 보던 연건동의 오래된 서울대병원 본관을 지나
창경궁 쪽으로 작게 지어진 비교적 새 건물의 암병원이 우리의 새로운 희망이었다.
암병원은 작았지만 역시나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그 틈을 뚫고 3층 입원실로 가니 지정받은 병실이 나왔다. 짐을 정리하고 4층 옥상으로 올라가 보니 창경궁이 한눈에 들어오는 전망이 멋졌다.
울긋불긋 단풍으로 아름답게 물들어가는 자그마한 숲도 보여서
오래간만에 마음의 평화를 잠시나마 느낄 수 있었다. 엄마도 연신 카메라를 켜서 사진을 찍었다.
마치 좋은 곳으로 여행 와서 숙소에 짐을 풀고,
눈앞에 보이는 멋진 풍경을 사진으로 담아두려는 여행객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병원에 입원해서는 다시 검사부터 받아야 했다.
전에 찍었던 PET-CT도 다시 찍고, PTBD로 몸 안에 넣었던 튜브도 교체했다.
PTBD: 경피경간 담도 배액술. 담도가 막혀 담즙 배출이 원활하지 않을 때 피부를 통해 간으로 가느다란 관(카테터)을 삽입하여 담즙을 몸 밖으로 빼내는 시술
며칠 뒤엔 등에 커다란 주삿바늘을 넣어 폐에서 조직을 떼어내는 조직검사를 받았다.
채취한 조직에서 유전자 검사를 하여 엄마 몸속의 암을 분석해 어떤 유전자 변이인지 알아본다고 했다.
엄마가 조직검사받는 과정을 상상하니 무서웠지만,
첨단 의학의 축복을 받기 위해선 감당해야만 하는 과정이었다.
유전자 분석은 드라마에서 친자 확인 검사하는 장면에서나 보았지,
이렇게 유용하게 쓰일 줄은 몰랐는데 제발 약이 표적으로 삼는 그런 유전자 변이가 발견되어서
엄마 몸의 암세포들이 기적적으로 사라지길 바랐다.
얼른 항암치료를 다시 시작하면 좋겠다고 기다리던 중에 빌리루빈 수치가 좋지 않았다.
교수님께서 담관이 많이 막힌 것 같다며 스텐트를 넣는 시술을 하자고 말씀하셨다.
처음에 스텐트를 2개, 다음 주에 스텐트를 3개 넣었더니 빌리루빈 수치는 잡혔지만,
다른 염증 수치가 오르거나 간 수치가 나빠지는 등
항암치료는 밀리고 엄마의 몸은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답보상태가 몇 주 계속되었다.
2020. 11. 25. 오후 1:46
시간은 흐르지만, 그 사실과는 무관하게 살아가는 경험을 하고 있다. 병원 안에서의 시간은 규칙적으로 흘러간다. 하루에 세 번 간호사들은 업무를 교대하고, 교수들은 회진을 돈다. 나의 시간 감각은 주로 밥을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며 일깨워진다. 그 외의 시간 속에서는 별 일없이 산다. 시간 개념의 측면에선 원시적인 삶이다.
문제는 시간 감각과 함께 사고도 굳어져 간다는 데에 있다. 시공간을 초월한 듯 정신도 가끔 흐릿해져 간다. 어둠 속에서 적응하는 일은 여전히 어렵다. 치료를 받기 위해 병원에 왔으나 치료에도 금세 차도를 보이지 않는 엄마의 몸 상태를 이해하기 어렵고, 갈수록 수척해지는 엄마의 몸을 보면 또 가엽고 안타까우며, 함께 피폐해져 버린 내 모습 또한 불쌍하다.
6개월짜리 휴직을 신청하고 얼마 안 되어서 복직 여부를 결정해야 했다.
학교에서는 다음 학년도 계획을 세워야 하기에 휴직을 이어갈지, 복직할지 결정해 달라고 했다.
엄마의 상태가 좋아지지 않은 상황에서 복직은 선뜻하고 싶지 않았는데,
엄마는 내가 복직하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6개월 쉬었으면 충분하다고,
아빠도 있고 이젠 병원 생활도 적응해서 어느 정도는 본인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있다며
나 없어도 괜찮다는 말에 속으로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처럼
엄마의 병세가 길어지면서 나 또한 효녀는커녕 점점 더 피폐해져만 가는 것이 느껴져 부담을 느끼던 때였다. 학교로 돌아가는 것이 어떤 전환의 계기가 될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엄마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처럼 보이는 것 같아 갈등하다 결국 복직하기로 했다.
2020. 12. 2. 오후 8:04
학교에 복직원과 기타 서류를 내러 다녀왔다. 방문자 출입증을 받고 출입 목적과 연락처를 적은 뒤 체온 측정을 하고 들어가는 과정이 낯설었다. 새로 부임한 관리자와 교무실에 앉아 있는 살무사님에게 의례적인 인사를 하고 서류를 내고 엄마의 상황을 설명해야 했다. 어느 정도 머릿속에 그리고 가긴 했지만 그래도 불편했고 거북했다. TV 리얼리티 프로그램에서 아픈 사람들을 볼 때나 지었을 표정을 보이곤 하는 사람들을 관찰하는 것은 유쾌하지 않은 경험이다. 과거의 나도 그랬을 것이다. 어떤 이의 깊은 슬픔을 제대로 목도한 이가 몇이나 될까. 비통한 심정을 애써 달래 가며 살아가는 사람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나는 건 어려운 일이다. 하물며 행정을 하는 사람에게는 감정을 덜어낼수록 일 처리에는 좋을 테니 위로나 공감을 기대하는 것이 무리일지도 모른다.
병원 밖의 세상은 이전과 같이 돌아간다. 바뀐 건 나 하나뿐이다. 세상이 나를 중심으로 변해주길 바라는 것은 유아적인 발상이지만, 그래도 한순간은 그렇게 되었으면 생각하는 날이다. 그만큼 위로가 필요한 날이다.
12월은 또 어떻게 흘러갈지.
이 땅에 예수님이 태어나신 날,
2021년 새해가 밝아오는 날에 엄마와 함께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던 기도가 무사히 하늘에 닿았기를.
엄마가 좋아하는 가래떡처럼 길게, 담백한 모습으로 함께해 주길.
임상시험 참여의 부푼 꿈을 안고 서울로 온 지 대략 한 달이 되어갔다.
우리는 암병원에서 2인실을 쓰는 잠깐의 호사도 누려봤지만,
임상시험은커녕 어떤 항암치료도 어려운 상태로 시간만 보냈다.
암병원은 병상이 적고 항암제 투여를 위해 짧게 입원하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입원 기간이 길어지니 본관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그렇게 며칠을 보냈지만, 차도는 없었다.
그러다 12월이 되자 병원에서는 며칠 집에 다녀오는 것도 좋겠다고 했다.
(입원하려는 환자는 많은데 병상이 없어서 아마도 그렇게 말한 것이라 추측되지만)
엄마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기에 멀리 집까지 내려가는 것보다는,
서울에 사시는 이모 댁에 잠깐 있다가 다시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2020년 12월 4일 오후 11:46
엄마의 하나뿐인 언니
8남매 중 일곱째로 태어난 엄마는 언니, 오빠들, 동생과 그다지 살갑게 지내지 못했다. 본인에게 큰 어려움이 닥쳤을 때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건 언니인 것 같았다. 큰 이모께선 서울에 있는 병원에서 치료받을 때마다 와주셔서 먹을거리를 전해주고 가기도 하셨다. 한 번은 녹두죽을 큰 통으로 하나 가득 싸 오셨는데(전에도 여러 번 전화로 녹두죽이 좋다며 자주 해 먹으라곤 하셨다) 조금은 되직한 녹두죽을 덕분에 며칠씩 먹기도 했다.
길어야 일주일쯤 입원해 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어김없이 이번에도 입원이 길어져 지쳐갈 무렵이었다. 병원에서도 필요한 처치는 마쳤으니, 집에서 요양하며 회복이 필요하다고 급히 퇴원시키는 바람에 뜻밖에 집으로 가게 되었다. 엄마는 며칠 뒤에 다시 내원해서 혈액검사를 받고 진료를 봐야 했는데, 집에 가는 것이 내키지 않았는지 ‘서울에 있는 언니의 집에서 며칠 묵겠다’ 선언했고 이모도 흔쾌히 집으로 오라고 하셔서 짐을 챙겨 갔다.
아현동의 오래된 빌라에서 혼자 사시는 이모 댁은 7~80년대에서 시간이 멈춘 것 같은 공간이었다. 집에서 그나마 제대로 된 21세기 물건은 LED TV와 IPTV기기, 양문형 냉장고 정도이고(아마도 이모는 미스터 트롯에 나오는 가수 4인방을 좋아하시는 듯했다. ‘뽕숭아학당’이나 ‘사랑의 콜센터’ 같은 프로그램을 즐겨보시는 것 같았고 그 덕에 집에 무려 IPTV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 외의 것들은 시간의 더께가 진득하게 쌓인 흔적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것은 바닥에 발을 디뎠을 때 느껴졌던 차가움과 실내인데도 몸을 떨게 되는 공기의 서늘함이었다. 검소하기 그지없는 이모의 일상으로 들어가는 것은 꽤 낯선 경험이었고, 오래전 인도나 남미 여행을 갔을 때 묵었던 허름한 숙소가 데자뷔처럼 떠올랐다. 기왕이면 조금 더 비용을 치르더라도 시설이 나은 곳에서 묵을 걸 생각하게 되는 그런 느낌이었다.
한 사람의 익숙한 생활 속으로 들어가서 함께 산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은 것들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며 적응할 수 있을 때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엄마는 조금은 예민한 성격의 소유자이고, 아무리 혈육이라고 해서 이모의 생활방식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엄마는 언니 집에 도착한 지 서너 시간 뒤에 이모 집에서 단 며칠도 지내기 어렵겠다는 결론을 내리고는 마치 아이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언니, 미안하지만 나 여기 못 있겠어. 불편해서 안 되겠어.”라고 고백해 버렸다. 이모는 놀라신 듯 “뭐가 그렇게 불편하니? 며칠밖에 안 되는데, 집에 내려갔다가 올라오려면 좀 힘드냐? 그냥 좀 참아.”라고 달래셨지만 역부족이었다. 보일러를 높게 틀어주시는 것도, 저녁 식사를 차려주시는 것으로도 엄마의 마음을 돌릴 수 없었다. 급기야 밤늦게 자다가 잠깐 깨신 이모에게 내일 가겠다고 다시 선언해 버렸다.
어찌어찌 이모 없는 이모 집에서(이모는 새벽 일찍 아주 조용히 출근하셨다. 나가시는 줄도 모르고 잠을 잤다) 아침을 차려 먹고 설거지도 했다. 이상하게 게스트하우스에서 하는 것보다 어색하게 느껴졌다. 만 하루도 채우지 못하고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선 엄마는 우리 집이 호텔 같다고 했다. 이모와 통화를 하며 엄마가 안타까운 마음에 이모에게 일장 연설을 하는 것을 엿듣고는 팔로 X자를 만들며 괜한 말은 안 하는 게 좋겠다고 사인을 보냈지만, 소용없었다.
[일장연설: 엄마는 언니를 진정으로 아끼며, 궁색하게 사는 언니를 보는 게 속상했던 마음에 가진 재산을 적당히 쓰시면서 사시라고 힘든 몸으로 열변을 토했다. 남편을 일찍 잃고 세 남매를 홀로 키우시며 악착같이 살아오신 큰 이모에게는 통하지 않을 연설이었다.]
이래저래 무거웠던 마음이 이 소소한 에피소드 덕분에 가벼워졌다. 정말 오랜만에 크게 웃었다. 소중한 기억이 될 것 같다.
달콤하고 구수한 빵 냄새에 홀려 찾은,
오래되고 유명한 빵집에서 커다랗고 맛있어 보이는 빵을 골라 쟁반에 담아 계산하고 집에 가져와서 먹으려니 공갈빵이었을 때의 기분.
서울대병원까지 갔다가 돌아와 집에서 보낸 며칠이 그랬다.
보기와 다른 공갈빵을 먹어 속이 허한, 아니 허하다 못해 속이 아렸다.
엄마도 그랬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