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 70m: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없다'

Chapter 3. 서서히 가라앉는 중입니다. 끝없이 깊은 곳을 향해

by Luci

1월 초에는 거의 집에서 보냈다.

날씨가 추워서 병원에 다니기 힘들기도 했고, 병원에 가봐야 할 수 있는 치료가 별로 없었다.

답답한 병원보다는 집이 훨씬 낫기는 했다.

문제는 집에서 아버지랑 같이 있게 되면서 싸움이 늘어났다는 것이었다. 잘 지내도 모자랄 판인데.


2021년 1월 4일 오전 12:24

어려서부터 아버지란 존재와는 참 거리가 멀었는데…. 일 년 남짓 어쩌다 아버지라는 사람과 둘만 지낸 덕분에 조금은 가깝게 느꼈나 보다. 사실 그때도 내가 멍청해서 집안일을 다하고 있었는데 그땐 그냥 그런가 보다 했다.
엄마의 암 진단 순간부터 병크란 병크는 다 저지르고 있는 당신이란 인간... 이제 그만 보고 싶다. 함부로 입을 놀려 엄마가 암이란 걸 알리고 싶지 않았던 사람에게 전해지도록 한 일이며, 밥투정하는 거 싫다고 간병인 운운한 것도, 하도 엄마랑 다투는 게 힘들었는지 엄마는 열심히 암과 싸우고 있는 와중에도 졸혼 운운하고, 집안일 겨우 하며 생색은 있는 대로 내고, 술 마시고 들어와서 주정을 부리질 않나…. 정말 XX 맞다. 당신이란 인간은.
본인 혼자 엄마 간병하긴 겁이 났는지 내가 복직한다는 걸 본인이랑 상의 안 했다고 서운 하느니 어쩌고 했을 때는 정말 뚜껑이 열렸다.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도 제대로 못 했으면서. 무뚝뚝하게 고생했다 말 한마디 하면 내가 감동이라도 받아서 ‘고마워요 아버지’ 할 줄 알았나 보다.

거지 같은 인간. 지밖에 모르는 버러지. 찌질하고 못난이.

내 삶에 언제쯤 다시 볕 들 날이 올지. 겨울이 너무 길고 혹독하다. 7월 여름부터 찬 겨울이 시작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삶이 이리도 슬퍼야만 한다는 것이 끔찍하다.
내일 다시 해가 떠오르고 시간은 흘러가겠지. 어떻게든 지나갈 테지만 다가올 미래가 가끔은 버겁고 숨이 막힌다.
2021년 1월 5일 오전 12:36

주방에 물건을 정리하다 유리병이 눈에 띄었다. 혹시 쓸 일이 있을까 싶어 두었던 물건이 자리만 차지하는 것 같아서 버리려고 하는데, 뚜껑에 딸려있던 플라스틱 링이 병 입구에 걸려 있는 게 거슬렸다. 커터 칼로 잘라내려다 손을 베었다. 피가 뚝뚝 떨어졌다. ‘좀 있으면 멎겠지.’ 했는데 계속 피가 날 모양이라 병원에 가서 꿰매야지 싶었다. 손가락 끝에 마취하고 다섯 바늘을 꿰매고 털레털레 집으로 돌아왔다. ‘정초부터 운수가 사납구나. 이제 까불지 말고 자중하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엄마는 괜히 아프겠다며 자기가 다친 것 같다며 연신 괜찮냐 묻는다. 배에 구멍을 내고 관을 연결해 주렁주렁 달고 있는 엄마가 나더러 아프겠다 한다. 나는 괜찮다 아무렇지 않다고 했다.
마취는 30분쯤 뒤에 풀릴 거라더니 점심때 꿰맨 자리가 저녁이 되어서야 욱신거렸다. 막상 칼에 베인 순간에는 아무 느낌이 없다가 피를 보면서 아픈 건가 싶더니 한참 지나고 나중에야 아픈 줄 알게 된다.
마음의 상처도 그런 것일까. 힘든 일의 격랑 속에선 막상 헤쳐 나가느라 정신이 없어 못 느끼다가, 파고를 몇 번 맞고 나서야 아픔이 찾아오는 그런 것일까.
지금은 못 느끼는 고통이 나중에 찾아왔을 때 나는 잘 이겨낼 수 있을지. 조금 두렵다.

이제 나는 현대 의학으로 할 수 있는 치료보다 대체의학에서 말하는 것들을 따르기 시작했다.

대전에 G대학병원에 가면

건강보험에서 바로 적용받을 수 없는 면역항암제를 처방해 주시는 교수님이 있다는 이야기를

환우 카페에서 보고 당장 달려가고 싶었지만, 엄마가 동의할 리 만무했다.

그보다 집에서 할 수 있는 자연식, 관장 요법 등으로

말기 암에도 싸움을 이어가고 있는 사람들에게 희망을 얻었다.

우리 엄마도 그렇게 될 수 있다고.


레몬을 사다가 매일 레몬 관장을 해 드렸다.

장 건강이 그렇게 중요한지 예전엔 몰랐지만, 장의 독소를 제거하는 것만으로도 몸의 회복력이 오른다며,

싫다는 엄마를 설득해서 매일 거사를 치렀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보내다가 겪고 싶지 않은 그날이 왔다.


2021년 1월 22일 오전 1:01

평소와 같은 외래 진료 날이었다. 평소와 같이 아침 일찍 일어나 간단히 요기하고, 운전을 해서 병원에 도착했고, 피검사를 하고, 또 한참을 기다렸다. 북적이는 사람들 속에서 ‘이렇게나 아픈 사람이 많다’고 새삼스러운 생각에 잠시 잠겼다. 그 많은 아픈 사람 중에 한 명인 엄마가 보통 사람처럼 느껴지는, 평소와 같은 날이었다.
안락한 소파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가 간호사선생님이 다급히 부르는 소리에 급히 진료실에 들어갔다. 엄마가 받은 것은 고작 피검사 하나뿐인데... 수많은 분석치들은 안 좋은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그걸 읽은 교수님은 황달이 좋아지지 않는다고... 앞으로 좋아질 것이라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뭐라 말을 떼는 것도, 숨 쉬는 것조차 버겁게 느껴지는 순간이 한동안 이어졌다. 공기가 무거워졌다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것이란 걸 알았다. 침묵이 한참 이어지다 내가 입원이 필요하지는 않으냐고 물었다. 입원해서 도움 받을 것이 없다고 했다. 집에서 쉴 수 있다는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하나... 겨우 엄마가 지닌 케모포트(항암제를 주사하기 위해 가슴 부분 정맥관에 삽입한 의료기구(카테터))에 헤파린(항응고제)을 교체해야 하는 것을 물어보고, ‘어떻게 해야 하나’ 하는 질문에 갇혀있는데 교수님이 조용히 엄마는 진료실 밖으로 내보내곤 나만 잠깐 남으라고 하셨다. 황달이 계속 심해지고, 배액관 교체도 어려워질 수 있다며…. 호스피스를 예약하는 걸 권하셨다. 담도암 계열은 집에서 돌보기 어려울 거라고 완화의료센터에서 상담을 받으라고 하셨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엄마에게 들키지 않으려 어떻게 둘러대야 하나 머리를 굴리곤 아무렇지 않은 척 담담한 척했는데, 엄마는 눈치를 챘을까. 몇 달 전, 항암제 내성이 생겼다는 걸 교수님에게 듣고 나서도 눈치 빠른 엄마가 내 안색을 살피곤 금세 나쁜 결과를 알아차렸던 것처럼.
이번에도 다시 2주 뒤에 보자고, 아직 이런 얘기를 들을 때는 아닌 것 같은데 고통은 예고 없이 찾아온다. 엄마는 병원 안에서 기다리고 나는 병원 밖 약국으로 약을 사러 가는 길에 불쑥 눈물이 흐르고 욕설이 튀어나온다. 이런 날이 언젠간 올 줄 알았지만 하필이면 지금이라니.
집으로 가는 길, 차 안에서 엄마는 황달을 낫게 하는 약이 없다는데 개탄하며 낮게 앓는 소리를 내었다. 약으로 낫게 할 수 없다는 걸 알아서 답답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휴게소에 들러 겨우 몇 술을 뜨고 집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어디서 누군가와 밥을 먹고 술도 마시며 시간을 보내다 엄마의 부름에 들어왔다. 속상한 엄마는 울음을 터뜨리며 무신경한 아빠에게 화를 냈고 아빠도 발끈해서는 싸움이 날 것 같은 상황을 또 수습해야 했다. 엄마가 먹고 싶다는 갈비찜을 하고 국을 끓이고 봄동 겉절이를 하고 미역 줄기를 물에 담가 두고….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하루가 지나갔다.
그리고 다시 다음 날 아침, 여전히 부루퉁한 아버지를 보고 속이 뒤틀려 주먹이라도 한 대 날리고 싶은 마음을 참아가며 밥을 먹고 조용히 밖으로 불러내 이야기했다. 아버지도 가르쳐야 했다. 엄마의 마지막을 준비해야 한다는 끔찍한 이야기를 내가 듣고, 내가 전하고, 내가 설명하고, 내가 수습해야 했다. 지긋지긋한 운명이다. 호스피스 이야길 꺼내는 와중에 초라해진 아버지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할머니의 얼굴이 아버지의 얼굴에서 보였다. 늙고 초라해진 모습이 처연했다. 엄마의 얼굴은 외할머니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아마도 외할아버지를 많이 닮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기왕이면 오래 살다 가신 외할머니를 닮았으면 좋았을 것을. 할머니도 오래 사셨으니, 아버지는 어쩌면 아주 오래 살겠구나. 나는 누구의 유전자를 더 물려받았을까….
오늘도 엄마의 잠자리를 살피고 체온을 확인하는데 38도가 나와서 조금 놀라 화장대에 있던 성수를 집어 들곤 괜히 이불 위에 뿌렸다. 다시 재보니 열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수를 흩뿌리며 기도했다. 평안히 잠들게 해 달라는 내 기도에 엄마는 말을 달리 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나는 뒤에 건강하고 개운하게 아침을 맞이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말이 더 있다고 했다. 성모송 구절 중에 ‘천주의 성모 마리아 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에’라는 말도 별로라고 했던 것처럼 조금이라도 죽음이 연상되는 말은 거부감이 드나 보다.
아직 엄마의 지혜가, 때로는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엄마에게만 들을 수 있는 잔소리가, 나의 아이를 봐주겠다던 호언장담이 필요한데. 배추는 어떻게 무쳐야 맛있고, 집안에 사소한 것도 꼼꼼히 챙기는 엄마 자리는 대체 불가인데…. 나는 무엇을 어떻게 챙겨야 하는 걸까. 무얼 포기하고 무얼 남겨야 하며 무엇을 그리워해야 할까.
2021년 1월 25일 오전 12:31

호스피스 준비하란 말을 듣고 나서부터 일까….
엄마의 모습이 하나하나 눈에 밟힌다. 발의 부종, 길어지는 수면 시간, 줄어든 식사량…. 움직이기도 힘겨워하고 있다.
나에겐 너무도 커다란 존재였는데. 큰 산 같던, 끄떡없을 것 같은 사람이 갑자기 쇠락해 가는 모습을 보자니 실감이 나지 않는다.
갑자기 떠날까 봐 무섭고, 아파할까 봐 무섭고, 실수하면 어쩌나 싶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직 큰 고통 없이 옆에 있어 주고 있다는 것. 언제 힘든 시간이 올지 몰라 조마조마하다.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란 게 이런 걸까.
멍하니 앉아서 또 허공에 이런저런 생각을 띄우고 있자니 엄마가 슬픈 표정 하지 말라고 한다. 그 말에 훌쩍.
그래도 오늘 곁에 있어 준 엄마가 또 고맙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호스피스 선언을 듣고 나는 인생 최대의 시련에 빠지게 되었다. 그 암담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상담 선생님과는 거의 만나지 못하고 있었는데 급히 연락을 드려 상담 약속을 잡았다.

엄마에게 내가 힘들어서 그러니 상담받고 오겠다고 허락을 받고는 엄마의 경차를 운전하며 가는 길이었다.

서울을 가로질러 가는 길은 아무 일도 없는 듯 평화로워 보였고, 강남은 지나는 동안은 더 주눅 들었다.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들 가득한 동네를 지나며

나만 암울한 구렁텅이에서 매일 눈물 마를 새 없이 사는구나 싶어서 억울했다.

추운 겨울이라 하늘에선 비 대신 눈을 내려주기 시작했는데,

눈이 점점 많이 내리기 시작해 도로 위에 쌓이고 있었다.

제대로 된 겨울 타이어도 아니고, 체인도 없는데 눈은 20cm 넘게 쌓여 이젠 위험할 지경이었지만

조심조심 차를 몰아 상담 선생님과 약속한 장소에 도착했다.


앉아서 달리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까.

엄마가 이젠 어떤 치료도 받을 수 없어서,

호스피스를 알아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계속 울기만 했던 것 같다.

(이 문장을 쓰고 있는 지금도 계속 울고 있다)

처음 암 진단받았을 때도,

항암제 내성이 있다고 했을 때도 중요한 것은 담당 주치의나 교수님의 도움을 받았는데

제일 충격적인 이야기를 내가 해야 하는 상황을 도무지 감당할 수 없었다.

그래도 엄마에게 알려야 한다고 기운 내라고 이야기해 주신 덕분에,

한 시간 넘도록 서럽게 운 덕분에 어느 정도 마음 정리가 되었던 것 같다.


늦은 저녁이 되어 본가로 다시 돌아가려니 눈이 너무 쌓여서 도저히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눈 때문에 내일 내려가겠다고 했다.

엄마는 고갯길을 넘어와야 하는데 눈이 많이 와서 위험하니 다음날 안전하게 오라고 말해주었다.

오랜만에 느낀 다정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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