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4. 바닥을 찍고 나니 이제야 떠오르는구나 2021~현재
엄마가 숨을 거두어 오열하는 중에 병원 장례식장 직원분이 오셔서 조심스럽게 엄마를 데려가셨다.
가족 중에 한 사람만 오라고 하셔서 아버지가 엄마를 따라가고,
동생과 나는 덩그러니 남아서 한참 울다가
이제 엄마 없는 자식이 되어 장례식을 치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가 그렇게 울지 말라고 할 때도 그치지 않던 울음이 어느새 잦아들고
우리는 프로그래밍된 기계처럼 움직이며 짐을 챙기고 집으로 가서 옷을 갈아입은 뒤 장례 준비를 했다.
잠깐 앉아 눈을 붙이고 일어나니 동이 트고 아침이 되어 장례식장을 정하고,
(아버지는 본인이 맞이할 조문객이 많을 것임을 예상하지 못하고 작은 빈소를 골라서 내가 적당한 곳으로 바꿔주었다. 나는 아직도 아버지가 어떻게 회사에서 관리자까지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학교에 부고를 알렸다.
정말 기막힌 사실은 엄마가 금요일 새벽에 떠났다는 사실이다.
금요일 저녁이나 토요일에 사람들이 조문 오기 적절하게 계산한 것처럼.
그리고 하필이면 2월 19일 금요일이었다.
내가 3월 1일 자로 복직하는데, 그전 출근일이 5일이었다.
부모 사망 시 쓸 수 있는 경조사 휴가 일수가 딱 5일이었다.
이건 마치 출근하라고 등 떠미는 것처럼 정해진 시간이었다.
엄마는 소름 끼치게 철저한 사람이었다.
본인의 죽음까지 계산한 것만 같은, 물 흘러가듯 사는 나와 다른 결을 가진 사람.
장례식장에 조문객으로 갈 때는 몰랐다가 막상 상주 이름이 오르고 나니 기분이 이상했다.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아서, 내가 마치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았다.
사실 나는 코로나도 심하고 그래서 장례를 가족끼리 간소하게 하고 싶었다.
그러나 나만 생각해서 장례식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버지는 이래저래 지인이 많은 사람이고, 아는 사람들과 만나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장례식은 보통 때처럼 남들 하는 대로 하게 되었다.
저녁이 되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했고, 나는 손님맞이에 정신이 없었다.
아버지 손님이 오시면 조용히 아버지를 불러왔고, 동생 손님이 오시면 동생을 불러왔으며,
상에 음식이 부족하진 않은지 살폈고, 오랜만에 뵙는 분께 아는 체를 하며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렸다.
곧 내가 근무하는 학교 선생님들도 오셨다.
멀리서 오시는 게 힘들겠다 싶어서 오시지 말라고 전할까 하다가
그렇게 말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게 들릴 것 같아서 그냥 부고만 전했는데,
복직하면 같은 학년을 하게 될 처음 뵙는 선생님들까지 오셔서 죄송하고 또 감사했다.
오랜만에 아는 얼굴들을 보며 울지 않고 이야기하는 게 불가능할 줄 알았는데,
그래도 다행히 여유롭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때 와주신 분들을 잊지 못한다.
살아가며 은혜를 갚아야지 생각했다.
작은 이모는 이모부와 함께 오셔서 계속 빈소를 지켜주셨고,
손님들이 가신 뒤에 우리는 앉아서 술도 마시고 울기도 하고 오만가지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를 추억하고 슬픔을 달랬다.
토요일이 되자 조문객은 더 많아졌고, 코로나에도 장례식장에 와주셔서 감사하다고 연신 고개를 숙였다.
멀리서 대학원 동기 언니들도 와주었고, 대학 동기도 멀리서 와주었다. 고마움에 눈물이 났다.
안아주다가 울고, 인사하다 울었다.
엄마를 진짜 마지막으로 볼 수 있는 시간이 다가왔다.
장례지도사가 엄마 염하는 걸 처음부터 볼지, 아니면 염이 끝나고 입관할 때 인사할지 물었다.
나는 염하는 것을 제정신으로 볼 자신이 없었다.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였다.
염이 끝나고 입관 전에 모든 가족이 엄마와 인사하러 염습실로 들어갔다.
나는 서럽게 울었다. 세상에서 이보다 더 슬픈 일은 없었으므로.
한참을 울다 보니 큰 이모와 작은 이모가 나를 걱정하며 그러다 쓰러진다고 그만 울라고 다그치셨다.
그래도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만큼 슬픈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엄마가 편안한 얼굴로 눈 감고 있다는 것이었다.
외할머니처럼 새하얗게 변해버린 머리카락은 곱게 빗어져 있었고,
삼베 수의를 입고 있어서 낯설었지만 그래도 하나뿐인 나의 엄마였다.
분명히 엄마 모습 그대로였다. 더 이상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만 빼곤.
일요일이 되었다.
발인 날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는데, 엄마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하러 오신 손님들께 감사 인사도 드리고,
엄마가 잠든 관이 닫히는 걸 보자 다시 오열하고,
물건을 챙기느라 정신이 없었고 그러다 또 이모들에게 혼이 났다. 정신 차리라고.
나에게도 소리쳤다. 엄마를 보내드리는 길이니 똑바로 잘하자고.
엄마를 태운 운구차는 우리 집을 들렀다가 장지로 향했다.
엄마가 전에 사라고 했던 장식장은 조립도 못한 채 박스에 담겨 거실 한쪽에 널브러져 있었고,
집안은 고요했다.
엄마가 누워있던 방도, 앉아서 TV를 보던 거실도, 내가 만든 음식이 맛없다며 구박하던 주방도 그대로였다. 변한 건 엄마가 두 발로 걸어 들어올 수 없다는 사실 하나뿐이었다.
엄마 대신 엄마 사진을 들고 동생이 집 안 구석구석을 돌아다녔고, 나는 또 하염없이 울었다.
운구차는 빠르게 장지로 향했다. 엄마가 이 세상 떠나는 마지막 길, 검은 운구차가 좋은 차라서 또 슬펐다. 살아생전에 못 타본 차를 죽어서야 타면 뭘 하나 싶어서,
그래도 좋은 차로 마지막 길을 모실 수 있다는 것에 안도하며 울었다.
아버지가 동생과 함께 계약한 추모 공원에 도착하니 이미 굴착기와 매장을 돕는 분들이 준비하고 계셨다.
하늘이 도우신 듯 2월 치고는 날씨가 맑고 따뜻했다. 초봄인 줄 착각할 법한 날이었다.
엄마가 이제 영원한 안식의 길로 떠날 시간이 왔다.
땅속 깊은 곳으로 관이 천천히 내려갔다.
차례대로 한 사람씩 삽으로 흙을 떠서 관 위에 뿌리고, 내 순서가 되자 힘겹게 흙을 퍼서 관 위에 뿌렸다.
이건 꿈일 거라고,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았지만 너무 생생한 현실이었다.
내가 서럽게 울고 있으니 “그만해. 네가 너무 울면 엄마가 하늘로 못가!” 하고 이모가 나무라셨다.
많이 슬퍼도 슬픈 만큼 울지 못하는 게 또 원통했다.
내가 삽을 들어 흙을 뿌린 뒤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다만 엄마가 쉴 곳이 탁 트이고 양지바른 곳이라 간만에 아버지가 한 일 중
엄마 묫자리는 고른 일은 잘해서 신통하단 생각을 잠시 했던 것 같다.
예전에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장례식장에 엄마랑 앉아 있다가 그런 이야기를 한 기억이 난다.
장례식장에 오는 사람들은 망자를 위해서 오는 건지,
망자를 잃어 슬픈 사람들을 위해서 오는 것인지 엄마에게 물었다.
엄마는 무슨 그런 바보 같은 질문이 있냐는 얼굴로 “당연히 둘 다지.”라고 명쾌하게 대답해 주었다.
엄마가 돌아가신 걸 알리지도 않았는데 어디서 어떻게 소식을 들으시고 빈소에 와주신 엄마 친구분들,
동료분들, 그리고 슬픈 나와 가족들을 위로하러 와주신 많은 분들 덕에 슬픔을 조금 덜어낼 수 있었다.
누군가 말했었다.
망자가 떠났다는 사실을 계속 떠올리면 견딜 수 없으니,
장례식을 해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는 과정이 자연스럽게 죽음에서 삶으로 생각을 전환하는 계기가 된다고.
내가 너무 싫어했던 말이지만, ‘산 사람은 살아야’ 했다.
발인이 끝날 때까지 함께 해주신 친척들께 식사를 대접해 드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잠을 제대로 못 잤더니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씻고 쓰러지듯 잠들었다.
하지만 꿈속에서도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 엄마도 먼 길을 가느라 어지간히 힘든 여정 탓에 깊은 잠에 빠진 듯했다.
좋은 꿈을 꾸길 바랐다. 진심으로, 간절하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