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 100m: '어떻게 이별까지 사랑하겠어'

널 사랑하는 거지' Chapter 3. 서서히 가라앉는 중입니다. 끝없이

by Luci
2021년 1월 27일 오전 12:31

결국 못 참고 내가 말해버렸다. 언젠간 할 말이었지만 아무도 먼저 말해주지 않으리란 걸 알고 있었기에. 아무도 먼저 말을 꺼낼 용기가 없단 걸 알기에. 이미 시간은 흘렀고, 마냥 기다릴 수만은 없고, 갑자기 다가올지 모르는 상황에서 엄마를 힘들게 할 수 없기에. 더 이상 나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짐을 지고 나 혼자만 해서도 안 되는 일들을 혼자 고민하며 아파할 수 없기에. 어디에도 하소연할 곳이 없어 괴롭지만 결국은 우리가 결정할 문제이기에.
엄마를 마지막까지 소중히 대하는 것은 회피하고 모른척하고 부정하기만 해서는 안될 일이기에. 힘들지만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게 참 고통스럽다.
2021년 1월 27일 오후 11:57

오늘은 엄마가 아침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배가 많이 아팠는지 일어나서 한두 시간 있다가 진통제를 먹어야겠다고 했다. 다행히도 아픔이 가라앉아 죽을 좀 드시고 다시 조금씩 움직이고 할 수 있었다. 감사하다. 오늘의 평안을 주신 것이 참 다행이다.
코로나로 운영을 중단 중이었던 지역 병원 호스피스 병동도 다시 운영을 재개할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 받았다. 친절히 설명해 주신 직원분이 얼마나 감사한지 절이라도 하고 싶었다.
서로 얼굴을 바라보며 그래도 웃을 수 있는 날이라 감사하고, 내 성격에 유별난 점이 있다며 걱정하는 엄마를 안심시킬 수 있음에 감사하고, 엄마의 다리를 주물러줄 수 있어서 감사하다.
1월 27일, 그러고 보니 엄마 생일은 7월의 27번째 날인데 감사와 행운이 넘치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을까. 기도드려야겠다. 오늘 같은 하루가 조금만 더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엄마가 조금 더 우리 곁에 있다가 따뜻한 봄에 떠난다면…. 더 힘을 내서 엄마 생일까지 있어 준다면…. 시원한 초가을에 여행처럼 그곳에 가신다면…. 생각하고 싶지 않은 생각들이 떠올라 눈물이 또 흐른다.
2021년 1월 29일 오전 12:32

오늘은 엄마와 웃는 시간이 좀 더 줄었다. 엄마는 기력이 없다 했고 힘들다 했다. 병원에 가야 하나 자꾸 고민하게 된다. 짜증 내고 나서도 미안하다 한다. 나는 간성혼수에 대해 찾아보고는 아마도 그것이 찾아온 게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엄마도 애쓰고 있을 것이다. 화내지 말아야 하는 데 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다행히 오늘도 열은 없다. 아직 엄마가 조금씩 움직일 수 있고 밥을 먹을 수 있다. 점심때는 만둣국이 맛있다고 했다. 저녁땐 고등어조림을 먹겠다고 얘기하곤 정작 먹지도 못했다. 어제는 분명 옥돔을 구워서 몇 점 먹었던 것 같은데….
월요일에 호스피스 상담을 받고 엄마를 설득해 봐야겠다. 아버지나 동생은 별생각이 없어 보이는데 늘 그랬듯 나만 불안 불안한가 보다. 딱히 엄마에게 뭔가를 해줄 수는 없다. 그저 발이나 주물러 주고 등을 쓸어주는 것 외엔 아픔을 덜어낼 방도가 없다. 그래서 둘 다 별수 없이 멍하니 있나 보다.
엄마에게 말하지 않아도 아마 본인이 스스로 알고는 있을 텐데. 엄마의 동의가 있어야 입원할 수 있는 상황이 오면, 어떻게 설득하지.
2021년 1월 31일 오전 12:04

어제는 다소 평안했던 하루. 왼쪽 담도에 연결된 배액관에서 붉은 담즙이 나와 아마도 담도에 피가 나오나 보다 생각했다. 이제는 피를 보아도 크게 당황하지 않고 tumor bleeding 인가보다 하고 이해하게 된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 피나니까 병원 가야 하는 게 아니라, 피가 나도 그러려니 하다니.
오늘 아침에도 엄마가 응급실을 가야 하는지 고민하다가 내가 토요일이고 오전에 진료 본 뒤 시술받기는 어렵다 설득하곤 그러자꾸나 했는데 불안한 엄마는 괜찮지 않았나 보다.
떡을 하기로 했는데 아침에 내가 일어나자마자 쌀을 불려놓지 않았다며 엄마는 내가 한심하다 모자란 건 지 아버지 닮아 그렇다 등등 또 모진 말을 쏟아내고 말았다. 아침에 죽 끓이고 응급실도 간다길래 어째야 하나 머릿속도 복잡했다 설명도 하고 미안하다 여러 번 했는데 나도 울컥해서 그만 속상하다 했다. 동생은 늦게 일어나서 아무것도 안 해도 뭐라 안 하면서. 엄마는 곧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오늘은 엄마가 예전에 한동안 나와 한창 다투었던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 듯했다. 지독히도 억지를 부리며 나에게 쌍꺼풀 수술을 해서 얼굴을 가꿔야 한다는 둥 내 성격이 이상하다는 둥 과연 진짜 나를 낳은 엄마가 맞을까 싶었을 정도로 모질게 느껴지는 날 선 말들을 쏟아내는 엄마. 그냥 나는 다 그렇다고 해 버렸다. 엄마가 아무리 말해봐야 맞는 말은 별로 없고 그냥 혼자만의 생각 속에 갇혀 맴돌다 어느새 자신만의 진리가 된 말들이라서. 그냥 엄마 말에 그렇다고 수긍만 해주면 될 말이라서. 그런 말이라도 엄마가 열심히 말할 수 있다는 게 한 편으로는 감사해서. 끔찍하게 느껴질 만큼 억지스럽고 불편한 말이라 예전에는 하나하나 반박하고 쏘아붙였지만, 이제는 이런 억지도 들을 일이 없겠구나 싶었다. 오늘 하는 이 말들이 간성혼수의 일부는 아닐까, 의문이 들기도 했다. 건강한 엄마라면 하지 않았을 말들. 이건 순전히 암세포 때문에 탁해진 정신 탓에 쏟아져 나오는 것들이라고 생각하니 그냥 안타까웠다.
잠자리에 누워 엄마는 기도하며 미안하다고 한다. 그리고 살려달라고 한다. 자기 삶이 저물어 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한편으로는 나을 수 있다고 금방 나아질 거라고 앞으로 2주 정도만 지나면 황달도 괜찮아질 거라고 그렇게 말한다. 차마 엄마에게 더 나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이미 엄마도 다 알고 있지만 겁나고 무서워서 차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순전히 엄마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시간들이 오고 있기에. 그걸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차마 강요하지 못하겠다. 다만 곁에서 외롭지 않게 머물러있을 뿐.
2021년 2월 2일 오전 12:44

급히 나 혼자 병원에 다녀왔다. 코로나로 어딜 가든 대부분 한산한데, 주말 마트와 주중 병원에는 사람들이 몰린다. 병원 한 편의 장례식장을 보면 또 마음이 저릿하다. 언젠가 그곳에서 검은 옷을 입고 문상객을 맞이할 모습이 아직은 그려지지 않는다. 버겁고 무겁다.
진료 접수를 하고 서류를 내밀고 교수님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울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 눈물을 흘렸다.
엄마에게 알리지 않고서는 방법이 없었다. 설명하고 알릴 수밖에 없었다. 말을 이어가는 교수님이 따뜻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나 그리 차갑기만 하진 않은 교수님의 온도가 적당했던 것 같다. 매일 엄마가 마시는 물 온도와 비슷한 온도였던 것 같다. 너무 뜨겁게 흥분할 일도, 냉정하게 외면할 일도 아닌 것이 죽음인가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죽음이 아니라면, 어느 정도 준비하고 미리 정리하며 맞을 수 있는 것이 죽음이라면 그 정도의 온도가 적당하겠구나. 미지근하다고 해야 하나. 그 정도면 충분할 것 같았다.
상담을 마치고 급히 나와서 약국에 소독용 알코올 솜을 찾으러 돌아다니다가 수납을 하지 않고 나왔다는 걸 알고 다시 병원으로 돌아갔다. 엄마의 CT 등이 담긴 영상자료며 의무기록도 내팽개치고 집으로 바삐 갔다. 운전하며 미리 조금 훌쩍이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집에 돌아와서 엄마에게 조금씩 설명했다. 병원에 가야 하는 이유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다행히 배액관도 괜찮고 지금 몸 상태가 괜찮은지도 보면 좋을 거라고. 하나 못한 마지막 말을 어떻게 전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아버지는 또 갑자기 점심도 안 먹고 나간다고 한다. 미리 장지를 알아본다나 어쨌다나.
엄마와 둘이 먹을 점심을 급히 차리는데 멸치를 넣어 부친 전도 짜고, 콩나물 무친 것도 짜서 어쩌냐고, 이렇게 간을 못 맞춘다고 한 소리를 들었다. 아침에 무친 봄동은 너무 싱겁던데 아빠처럼 술 마시는 것도 아니면서 미각이 왜 안 맞냐며. ‘그러게요’ 수긍하곤 저녁은 잘해봐야지, 또 다짐했다. 그리고 슬쩍 내일 진료는 호스피스에 대한 거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엄마도 다 ‘눈치 까고’ 있었다며 사실은 너무 힘들어서 빨리 가고 싶을 때도 있었다고 했다. 나는 그건 아니라며 말렸지만 속으로 수천수만 가지 생각을 했을 엄마가 그런 생각도 했구나 싶어서 또 마음이 저렸다. 슬프기도 하면서 조금은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도 엄마가 갑자기 정리도 못 하고 떠나지는 않을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감사한 일이다. 엄마는 죽음 앞에서도 참 담담한 사람이구나. 나 이제 먼 길 떠난다고 호들갑 떨며 꺼이꺼이 울지도 않고 그냥 그러냐고 그런 줄 알았다고 하다니. 엄마 앞에서 나는 영영 ‘쫄보’인가 보다. 그래서 이 와중에도 내가 걱정이라고 그런다.
병원 갈 준비를 하며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한결 말끔해진 엄마에게 한 인물 난다며 얘기하고 허허 웃는다. 엄마는 눈이 참 예쁘다며 마음이 예뻐서 그런가 보다 하고 또 웃는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며. 코도 오똑해서 예쁘다고 하니 “그건 인공이잖아.” 그런다. “에이 쬐금 손댄 건데 뭘….” 그런다. 이런 대화가 많이 그리울 것 같다. 이 시간이 헛되지 않고 정말 감사하고 소중하다. 나중에 그대로 꺼내어 두고두고 느낄 수 있는 것이라면 좋으련만. 잊지 말고 잘 담아두어야지. 엄마가 했던 마음 아픈 말은 다 잊고 좋았던 것 아름다웠던 것들은 잃어버리지 않게 소중한 곳에 잘 담아두어야지.
2021년 2월 3일 오전 12:49

엄마와 호스피스 상담을 받았다. 차마 무서워서 못한 말을 교수님이 너무 과하지도 아주 모자라지도 않게 이야기해 주셨다. 슬프게도 엄마는 오열은커녕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그냥 받아들이는 듯했다. 그 속은 산산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겠지만, 겉으로는 약간 초점이 흐릿해진 다소 멍한 눈빛으로 엄마 앞에 불쑥 다가온 하늘 너머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눈물 흘리는 나에게 “◎◎아, 진정해.”라고 말하며, 아마 속으로는 내가 힘들까 봐 걱정한 것 같았는데 말로는 조금 무뚝뚝하게 나온 것 같았다. 울지 않으려고 애썼다. 나중에 또 울면 되니까, 엄마 앞에서는 팅팅 부은 눈을 보이지 않으려 속으로 삼키다 몰래 울고 그랬다.
당신 삶에서 정리할 것은 미리 해두시란 말에 엄마는 몇 년 동안 불편한 관계로 지낸 시댁의 큰 동서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나 보다. 그리고 친정의 올케에게도 선물을 보내고 싶다고 말했다. 명절이 다가오면 큰 집 가서 큰 동서 얼굴 보고 만날 생각에 심장이 벌벌 떨렸다고 했는데, 요즘에는 예사로 생각하는 일이지만 아픈 시어머니를 요양 시설로 모시는 게 어떻겠냐는 말이 화근이 되어 미움과 분노와 온갖 나쁜 감정들만 남아 남보다도 먼 관계가 된 게 마음에 걸렸나 보다. 어쩌면 본인이 꺼낸 말이 아버지에게나 훗날 자식들이 할지 모르는 결혼식 때 어색하고 불편하고 애매하게 될까 봐 정리하고 싶었나 보다. 처음엔 대뜸 엄마에게 큰어머니가 화를 내시고 엄마는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통화가 끊겨서 너무 속상하고 옆에서 듣는 내가 화가 났다. 엄마의 뜻과는 다르게 전해진 말을 들으시고 생긴 오해가 깊었고, 엄마는 본인이 말한 적 없는 말을 했다 하시니 억울함이 더해져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러나 그때도 이상하리만치 눈물을 흘리진 않았다. 내가 대신 울고 있어서일까. 다행히 저녁 늦게 문자가 왔다. 엄마가 아픈 걸 어찌 물어 아셨는지 남은 시간 잘 보내고 전화 주어 고맙다고 해주셔서 한결 마음이 편안해졌다. 엄마가 일러주는 대로 답장을 하고 조금 더 개운해졌다. 오늘 엄청난 이야기를 들은 사람이 맞을까 싶을 정도로 겉으로는 의연하고 평온해 보였다. 어렵지만 엄마가 큰 결심을 하고 실행한 일이 어느 정도 풀려서 조금은 편안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원수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 멀리 있지 않았다.
2021년 2월 3일 수요일에 있던 일

어제는 힘들었던 하루. 엄마는 삶의 끝이 바로 코앞에 닥쳤다는 의사의 선고를 듣고도 다행히 생의 의지를 무너트리지 않은, 여느 때와 같은 아침이었다. 엄마가 누룽지를 하라고 해서 급히 냄비에 쌀을 씻어 두 공기 정도 앉히고, 그 와중에 아빠는 양이 많은 것 아니냐며 잘 모르는 소리를 해서 실랑이를 하고. 곱창 돌김에 들기름을 착착 발라 소금을 뿌려 김을 굽고 시금치에 깨를 잔뜩 뿌려 무쳐 먹고…. 엄마는 그래도 많이 먹지를 못했다.
아침을 먹고 나선 앞으로 엄마의 건강이나 안전을 보장해 주지 못하는 보험을 해약했다. 자동차보험과 암 외의 다른 질병 보험이 하늘나라에서도 유효하다면 참 좋을 텐데. 엄마가 나중에 천국에 가서는 이승에서 못 타본 좋은 차도 타보는 호사를 누리며 혹시 모를 사고에 대비해 여기서 들어둔 보험을 이어갈 수 있다면….
아빠가 반찬을 사 오라는 엄마의 명을 듣고 나간 사이, 통장과 다른 연금보험 따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태껏 부모님께 물려받은 것 하나 없이 착실히도 모아 온 돈이었다. 꽤 상당한 액수에 놀라고 그걸 써보지도 못한 채 우리에게 나눠줄 궁리를 하는 것에도 놀라고…. 그래도 엄마 하고 싶은 대로 정리할 시간이 주어진 건 또 감사할 일이다.
궁리 끝에 유산이 될 재산을 어찌할지 정리하곤 엄마는 동생한테 아버지 몰래 재산분배에 대해 귀띔해 주라 말했다. 아버지 모르게 동생을 만나러 가는 길에 킹크랩도 사 와서 저녁에 먹었다. 거대한 게 한 마리를 잘라먹는 것도 엄청난 일이었는데 역시나 엄마는 젓가락질 몇 번에 몇 점 조금 먹고는 끝이었고, 모두에게 할 얘기가 있다며 앉아서 차라도 마시자 했다.

“병원에서 내가 오래 못 산대.”

라고 말문을 떼자마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엄마는 나와 내 동생이 잘 커 주었고 열심히 산 덕분에 재산도 모았고 크게 아쉬운 것 없이 잘 살았다고 했다. 내가 보기엔 못 누리고 가는 것 천지지만 엄만 나름대로 크게 후회되진 않는다고 했다. 자식들이 결혼하는 것 못 보고 나중에 애들 못 봐주는 게 아쉽다고, 그래도 유명한 사람 중에 엄마 없는 사람도 많다며 그저 나와 내 동생이 잘 살면 그만이라고 했다. 그게 유언이라고….
한평생 남편과 살면서 쌓인 미움이 오죽했으면 한참을 아빠 때문에 고생한 이야기를 하고 또 했다. 얼마나 마음에 응어리가 생겼으면 그랬을까 싶어서 안타까웠다. 가족들과 살면서 좋은 기억이 별로 없다고…. 나랑 동생이랑 있으면서도 즐거웠던 게 없었냐 물어도 엄마는 힘든 기억 속에 매몰되어 다른 것을 쉬이 떠올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아빠 흉을 보는 덕에 그칠 것 같지 않던 눈물도 쏙 들어가 버렸다. 불쌍한 사람…. 육십 년도 안 되는 인생을 사시면서 행복했던 기억을 찾는 것이 그리도 어려운 일이라니. 어찌 인생을 아름답다고 할 수 있을까. 이렇게 원망과 슬픔으로 가득한 삶이었는데.
기력 없는 엄마가 한참을 이야기하고 나서 방으로 들어가 잠자리에 누웠고, 아빠는 몰래 받아온 추모 공원 브로슈어를 보여 주며 가족 봉안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엄마는 화장이 싫다고 했다. 여름에 태어나 뜨거운 태양 아래 열기가 버거웠는지, 급식 조리실에서 일하며 활활 타는 불꽃 앞에 고생하던 일이 싫어선지, 비록 숨이 멎은 육신이라도 불구덩이 속에서 타버려 한 줌 재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것도 모르고 아빠는 화장을 해서 유골을 모시는 걸 이야기하고 있으니…. 아빠는 왜 그렇게 하려고 하냐 했더니 요즘 추세가 그렇고 매장은 잘 안 하고…. 이런 이야기만 늘어놓아 소리를 버럭 지르려다 말았다. 엄마가 원하는 대로 해주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평생 일해 모은 돈 다 써보지도 못했는데 설마 비용이 더 들어서 그런 거냐고. 아니면 엄마가 확실히 얘기해 줄 때까지 기다리자고. 아빠는 고개를 푹 숙이며 알았다고 했다. 마지막을 정리할 때까지 아빠는 엄마 뜻을 헤아려 배려할 줄 몰랐다. 너무도 다른 두 사람이 만나 삼십 년을 넘게 살아도 여전히 모르는 건 모르는구나. 아니 알아차리는 것보다 어쩌면 영영 모르는 것만 가득한 채로 끝나는 거구나. 마음이 헛헛했다.
2021년 2월 4일 목요일

아침에 일어나 밥을 하려는데 엄마가 급히 부른다. 한우 선물세트 두 개만 맞춰오라고 그런다. 하나는 둘째 큰어머니께, 하나는 둘째 외숙모 댁에 드린다고 한다. 그리고 옷장에서 엄마 옷 두 가지와 가방을 꺼내라고 한다. 어젯밤에 급히 생각났는데 한 번도 입지 않은 새 옷과 가방이라 작은 이모에게 주고 싶으니 잘 담아서 보내라고 그런다. 분명 어제 저녁에는 본인 입고 싶은 좋은 옷 다 입어봤다 그랬는데…. 오늘은 생각해 보니 새 옷 사놓고도 못 입어보고 떠난다는 게 속상했는지 흐느껴 울고 그 옆에서 나도 같이 울었다. 아직은 너무 이르다. 어찌 이렇게 아쉬운 것만 남긴 채 하늘로 데려가시려는지….
눈이 10cm는 와서 길은 미끄러운데 고기 사러 간 곳은 아직 문을 열지 않았고, 부랴부랴 다른 근처 마트에서 고기를 샀다. 우체국에서 이모에게 보낼 옷을 담으려 상자도 샀다.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 엄마가 겨울에도 땀 흘리며 일하던 학교가 보였다. 이곳에서도 비록 마음 졸이며 눈치 보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당당한 직업인으로 엄마도 큰 역할해내며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멋진 조리사로 일했었는데…. 불과 몇 달 만에 모든 것을 송두리째 정리해야 하는 상황이라니…. 엄마 딸인 나만 멀쩡히 살아서 엄마 일하던 곳을 지나며 아픈 걸 알기 전의 엄마는 어땠을지 그런 것들을 헤아려보다 또 눈물이 났다.
집에 도착해 옷과 가방을 포장하고, 주소를 적었다. 부디 이모에게 좋은 선물이 되길, 좋은 곳 구경하고 맑은 바람 쐴 때 엄마도 함께 좋은 기분을 느낄 수 있길 바라며.
택배 상자를 부치고 선물 세트를 전해드리러 아빠와 다시 차에 올랐다. 수십 년이 지나도 한 자리에서 작은 가게를 하시며 박물관처럼 지내고 계신 외삼촌네는 엄마가 자세히 설명해 주어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폐암 진단을 받고 수술받으신 후 항암치료 중이신 외숙모는 예전보다 야윈 모습이었고 외삼촌은 왠지 많이 달라지신 것 같지 않았다. 내가 말하지 않아도, 엄마가 한마디 안 했어도 이미 엄마가 암으로 아프다는 걸 알고 계셨는데 나는 엄마가 본인이 아프단 걸 내색하기 싫어한다고 제발 모른척해 달라고 부탁해야 했다. 엄마가 그동안 자주 오가지도 못하고 죄송했다며, 곧 명절이라 선물하나 하고 싶었다며 몸조리 잘하시라 전하러 왔다고. 충실한 메신저가 되어 눈물도 흘리지 않고 열심히 해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갑자기 등심을 사 오라는 분부에 마트에서 급히 사 가지고 갔다. 굴을 넣은 파전은 엄마가 직접 부치기도 했다. 미숙하기 짝이 없는 내 전 부치는 솜씨를 보더니 엄마가 뒤집개로 ‘슥슥’ 하고 휙 뒤집어 금방 먹음직스럽게 부쳤다. 등심도 구워 작게 잘랐다. 병원 가기 전 집에서 먹는 마지막 성찬처럼 느껴져 또 눈물과 함께 밥을 삼켰다. 맛있었다. 엄마는 비록 많이 먹지 못했지만, 미안하게도 엄마 몫을 내가 다 먹는 것 같아 제대로 넘어가지 않았지만 맛있었다. 며칠 병원에 있다가 다시 집에 올 수도 있다 생각하며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이제 병원에 갈 때가 되었다. 옷을 따뜻하게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머뭇거리거나 아쉬운 기색은 별로 없었다. 내가 느끼지 못했을 뿐 엄마는 발걸음 떼기가 힘들었을지도 모르겠다.
오래간만이라 어색한 입원 수속을 끝내고, 휠체어에 엄마를 앉혀 입원 설명을 들으러 호스피스 병동으로 갔다. 다행히 말끔한 곳이라 지내기 적당하겠단 생각이 들었다. 환자도 많지 않아 조용했다.
병원 침대가 오랜만인지 몸에 맞지 않아선지 불편하다 하고는 자리에 누웠다. 저녁 식사도 일찍 마치고 쉬었다. 그러다 늦은 저녁 시간이 되어서 엄마는 엄마의 제일 가까운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가 넉넉지 않은 집안 형편에 멀리 마산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일도 하고 학교 공부도 하며 지낼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분이셨다. 나중에 졸업 후 서울에서 간호조무사 일을 하던 중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어 기뻐했다는, 그 뒤로 지금까지 어려울 때 힘이 되고 몇 년에 한 번 얼굴 보며 안부를 묻는 사이. 자주 만나서 수다 떨고 싶으나 서로 생활이 바쁘다는 이유로 간간이 소식 전하던 친구분이셨다. 그간의 근황을 얘기하다 엄마는 의사에게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단 말을 들었다고 했다. 의식이 있을 때 이야기하고 싶은 사람이 있으면 해 두라 하기에 전화했다고…. 너를 만난 건 하늘의 축복이었다고 정말 다행이라고 말하며 흐느껴 울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친구분도 말을 잇지 못하시고 “어머 종숙아….” 하며 당황하신 것 같았다. 그래도 좋은 생각 하면 몸에서도 건강한 세포들이 많이 만들어진다고 밥 잘 챙겨 먹고 힘내야 한다고, 예전에 병원으로 병문안 갔을 때 기도 못 해주고 온 게 걸린다고 내가 매일 기도하고 있다고, 널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우리가 어디서 어떻게 다시 만날지 아무도 모르지만 천국에서 만날 수 있다고…. 엄마와 친구분과의 소중한 대화를 몰래 엿듣는 것이 죄스러우면서도 엄마에게 따뜻한 친구분의 목소리라도 전해 들을 수 있어서 내게도 위안이 되었다. 평생 곁에 사랑을 온기를 정을 전해주는 사람이 부족했던 엄마에게 귀한 친구분을 보내주시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엄마의 마음이 한결 더 편안해 보였다.
2021년 2월 6일 토요일

작은 이모가 전날 연락을 하셨다. 언니를 왠지 꼭 봐야겠다며. 엄마가 밥을 거의 못 먹는데도 이모에게 다른 선물보다 밑반찬이 낫겠다고 했다. 엄마가 동생 음식은 입에 맞아 좀 드실지도 모르니.
코로나로 면회가 안 되는데 몰래 들어와 병실에서 십여 분 이야기를 나누셨다. 이모는 동생이라 그런지, 인생 경험이 많아서인지, 아픈 사람을 종종 보아서 그런지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다만 엄마를 보고 나온 뒤에 엄마가 나중에 본인 떠나고 나거든 나를 잘 부탁한다고 말했다 하셨다. 괜히 민망하기도 하고 엄마가 그런 말을 남겼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정말 이런 말도 하는 사람인가 싶다가도 엄마가 가버린 뒤의 아픔과 헛헛함이 상상되어 눈물이 흘렀다.
작은 이모를 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래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었다. 가끔 허공을 응시하며 무언가 생각하는 듯도 하고, 초점 없이 나와 다른 시공간 속을 여행하는 듯한 엄마의 눈을 본 적이 있다. 그런 눈으로 이모와 우리 가족들에게 전할 말을 정리하고 있었을까 짐작해 보았다.
그래도 이모가 가져온 반찬을 꽤 드셨다. 먹는 것만 보아도 기뻤다.
2021년 2월 7일 일요일

차분한 주말의 끝자락, 아침에도 삼사십 분 정도 작은 이모와 통화를 했다. 이모는 어제 엄마를 직접 본 뒤 걱정이 되었는지 전화를 걸었는데 받지를 않는다며 내게도 물어보셨다. 나는 엄마가 여느 때와 같이 감자전에 부추랑 오징어 넣어 부쳐오라고 전화로 시킨 터라 컨디션이 꽤 괜찮다고 생각했던 터였다. 이모는 엄마의 다른 형제들에게 엄마의 상태를 알렸다고, 알고는 있어야 할 일인 것 같아 말했는데 엄마에겐 모르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하셨다. 아빠에게도 엄마 형제들이 엄마 아픈 걸 아신다는 사실을 비밀로 하자고 말했다.
점심도 조금 먹고 병동에서 걸음도 몇 걸음 걷고 저녁도 먹은 뒤 평화로운 오후 시간을 보내다가 아빠와 통화를 하는데 아빠가 큰외삼촌이 전화하셨다고 전했다. 엄마는 낮은 목소리로 누가 전화했냐며, 일단 알겠다고 한 뒤 통화를 끊었다. 큰 이모, 작은 이모, 넷째 외숙모 댁에도 전화를 해서 큰외삼촌에게 알렸는지 캐물었다. 엄마는 몇 마디 짧은 대화로 오감과 육감까지 동원해 큰 이모가 말했다는 것을 심증만으로 알아차렸다. 큰 이모는 미안하단 말 대신 역정을 내셨고, 아프단 사실을 숨겨달란 엄마를 이상한 사람으로 몰아세웠다. 병을 다스리는 것도 마음의 문제인데 그렇게 마음을 먹어서 되겠냐며…. 본인도 힘든데 엄마를 위해 기도하느라 더 힘들다, 그렇게 마음을 먹으면 아픈 것도 안 낫는다, 여느 래퍼 못지않은 속도로 말을 내뱉으시는 통에 엄마가 듣고 속상해할까 싶어 심장이 철렁했다. 엄마가 이모의 말씀을 듣는 게 힘들겠다 싶어 핸드폰을 멀찍이 떼어놓기도 했지만, 엄마는 꿋꿋이 한참 듣다가 말이 통하지 않자 결국 통화를 끊으라고 했다. 나는 이모에게 죄송하다 하고 전화를 끊었다.
엄마는 흥분된 마음을 물 한 모금으로 가라앉히고 작은 이모에게 한참을 하소연하며 작은 이모가 엄마를 보고 나서 그 후에 큰 이모에게 이야기해 이런 슬픈 일이 일어났음을 각인시켰다. 작은 이모는 연신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고 나서는 큰 이모의 큰아들에게 다시 전화해 또 한참을 이야기했다. 큰 이모의 성격을 잘 알 테니 내가 전화한 일은 비밀로 해달라 당부하면서. 차분한 성품의 목회자인 사촌 오빠는 엄마 이야기에 귀 기울여 잘 들어주셨고 덕분에 엄마의 불편한 마음도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았다. 그리고 엄마에게 진심 어린 기도를 해주셔서 정말 감사했다. 조카와 통화한 뒤, 다른 조카도 생각났는지 큰 이모의 둘째 딸에게도 전화해서 내가 예전에 참 예뻐했다며 따뜻하고 아름다운 말들을 전해주었다. 목소리엔 예전만큼 힘이 실리지는 않았어도 부드럽고 나긋한 목소리로 통화하는 걸 듣고 있노라니 엄마에게 이런 면도 있었나 싶었다. 엄마는 겉으로는 무뚝뚝하고 때론 차갑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속은 세상 여리고 애정이 많은 사람이었단 걸 새삼 느꼈다. 자신이 가진 따뜻함을 미처 내보일 새가 없었을 뿐이었다.
사람 속은 참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엄마는 한겨울 화롯불 같은 통화를 끝내곤 옛날에 큰 이모, 조카들과 함께 기차를 타고 여수까지 여행을 다녀온 이야기도 해주었다. 내가 역마살이라도 낀 것처럼 여기저기 잘 돌아다니는 것은 엄마를 닮았기 때문인가 생각했다.
2021년 2월 8일 월요일

아침에 엄마가 녹두죽을 먹는다고 아빠에게 끓여 오시라 했지만, 아빠는 본인이 못하겠다며 내게 집으로 와서 끓여달라 했다. 부리나케 집으로 가서 죽을 쑤고 미나리를 달여 물을 만들었다. 다시 병원으로 와서 병동의 사회복지사 분과 간호사님들과 상담하고 교수님 회진 때 컨디션 말씀을 드리고 아빠와 교대했다. 엄마는 집 안에 있는 볼품없는 가구를 바꾸고 집 안도 정리하라고 일러주었다. 본인이 떠나고 난 뒤에, 집에 누군가 찾아올 것을 생각해 집을 말끔하게 하고 싶었나 보다. 엄마가 속으로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나는 다 헤아릴 수조차 없다.
엄마가 일러준 가구점에는 마땅한 가구가 없었다. 몇 가지 후보를 사진 찍어 보냈지만 적당하지 않았다. 다른 가구점을 나중에 가보기로 하고 바삐 미용실로 향했다.
엄마는 내 헤어스타일을 맘에 들어하지 않았다. 여름에 자른 머리가 어느새 길어 어깨 아래로 내려올 동안 엄마의 몸속 무시무시한 암 덩어리도 위세를 떨쳐 이제 장기들이 제 기능을 하지 못할 정도가 되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머리카락 자르듯 싹둑 잘라낼 수만 있다면. 지나온 모든 시간이 하룻밤 꿈만 같다. 한여름 달빛 가득한 창가 아래 간이침대를 놓고 엄마 옆에서 쪽잠 자던 기억도, 파란 하늘이 눈부시던 가을날 병원에 혼자 있는 엄마가 기다릴까 봐 반찬이며 먹을 걸 챙겨 부리나케 달려가던 기억도…. 12월 서울대병원에서 이제 더 이상 해줄 것이 없다는 의사의 말을 들었단 기억도…. 엄마에게 남은 시간을 의사에게 전해 듣던 순간도…. 머리카락이 자라는 동안 힘들었던 기억도 더해졌지만 때때로 웃을 수 있었고 하루하루가 감사했다. 엄마는 내 머리를 손으로 툭 치며 머리 좀 자르라고 했다. 예전 같으면 손으로 때렸다고 기분 나빠하거나 내 머리도 마음대로 못 한다고 열 냈을 텐데. 이제는 머리를 때리는 엄마의 손에 기운이 없어 아프지도 않다. 내가 엉뚱한 생각을 할 때 가끔 머리를 쥐어박아 주던 엄마가 없으면 어쩌나…. 그리울 땐 어쩌나….
미용실에 예약을 급히 했는데 다행히 머리를 잘 자를 수 있었다. 머리를 자르고 산뜻한 기분으로 와플을 사 먹고 집에 들러 설거지를 하고, 부장님께 전화를 드려 다음 주엔 학교 나가기 어려울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마트에 들러 엄마가 일러준 대로 카펫을 사고 미나리 물을 달여 병원에 갖다주고 집으로 와서 저녁을 지어먹었다. 동생이 퇴근해서 왔길래 밥을 먹고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엄마가 영상통화를 하자고 한다. 내가 머리를 어떻게 잘랐는지 궁금하단다. 남자 친구와도 해본 적이 없는 영상통화를 엄마와 처음 해보았다. 내 머리를 보더니 앞머리도 좀 더 잘랐어야지 한다. 엄마가 뭐라고 한마디 하겠구나 싶었는데 역시나였다. 그래도 기분이 좋았다. 엄마의 위시리스트를 또 하나 이뤄줄 수 있어서. 오랜만에 엄마와 또 웃었다. 감사한 하루였다.
2021년 2월 9일 화요일

엄마가 밥을 못 먹었다고 아빠가 그런다. 통증이 왔나 보다. 머리를 자르고 난 뒤 내 모습을 실제로 본 엄마가 예쁘다 해주어 감사했다.
엄마가 자리에서 일어나질 못했다. 계속 잠에 빠져 있다. 눈을 뜨려 했다가 다시 눈이 감기기를 반복했다. 깨어있는 것도 깊이 잠든 것 같지 않은 모습이 이어졌다. 아직 정신은 또렷하단 사실이 위안이었다. 교수님이 회진 때 배를 살펴보시다가 초음파 기계로 복부를 보신 뒤 필요하면 복수를 빼야겠다고 말씀하셨다. 복수를 뺀단 이야기는 다른 사람의 사례에서만 보았지,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무섭고 두려웠다. 배에 바늘로 찔러 복수를 뺄 예정이며, 장 천공 등의 부작용이 있다는 의사의 설명을 듣고 나선 동의서에 서명했다. 엄마에겐 말하지 못했다. 내가 대신 듣고 내 심장이 떨리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서.
밥 한 끼도 못 먹겠다고 했다. 엄마는 복수 때문인지 도통 밥을 먹지 못했다. 그 와중에 내게 밥을 굶으면 어쩌냐며 밥을 먹고 오라 했다. 병원에서 환자식이 나오면 양이 많다고 엄마는 나눠 먹자 했지만 나는 한사코 먹는 것이 불편했다. 아픈 사람의 밥을 빼앗아 먹는 것 같아, 아픈 사람이 먹고 나으라고 차려진 밥상을 탐해 벌을 받을 것 같아, 왠지 엄마가 낫지 않을 것 같아서…. 그래도 꾸역꾸역 엄마가 남긴 밥을 먹었다. 밥을 먹어야 간병도 할 수 있을 터였다. 먹어야 했다. 미안하게도 목구멍으로 밥이 넘어갔다. 엄마가 나를 먹여 살리고 있었다.
오후에 시술받으러 간다고 했는데 네 시가 넘어도 감감무소식이더니 다섯 시가 되어 출발했다. 엄마가 내시경이며 배액관 시술이며 여러 번 받는 걸 지켜봤는데도 무척 떨렸다. 괜히 잘못되는 것은 아닌지 마음을 졸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초음파실에 들어간 지 이삼십 분쯤 지났을까 엄마가 나왔다. 힘없는 모습이었다. 병실에 도착해 간호사님이 시술 부위를 확인하고 배에 연결된 관을 통에 걸쳐두었다. 콕을 열자, 복수가 콸콸 쏟아졌다. 노란 액체가 엄마의 몸에서 흘러나오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담즙이 나오는 것은 많이 보고 별 느낌이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복수를 빼는 걸 보고 있자니 만감이 교차했다. 장기들이 제 할 일을 하지 못해 배속에 물이 고이고 몸 곳곳에 스며들어 귀하게 쓰여야 하는 영양소마저 같이 빠져나온다고 생각하니 내 몸의 피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가득 찬 통을 비우며 다리에 힘이 풀렸다. 맥이 빠진다는 느낌이 이런 거구나 싶었다. 3L쯤 비우니 더 이상 복수가 나오지 않았고, 의사가 와서는 복수를 빼느라 몸에 찔러 넣은 바늘을 쑥 빼냈다. 통증이 느껴지는 듯했다. 마취도 없이 이 엄청난 과정을 겪은 엄마는 자기 몸이 실험 대상 같다고 했다. 슬픈 현실이었다. 부풀었던 배가 조금 꺼진 것 같았고 가쁘게 쉬던 숨도 차분해진 느낌이 드는 게 그나마 위안이었다. 아프지만 편안해지기 위해 견딜만한 일이었다는. 하지만 다시 겪는 걸 보고 싶지는 않았다. 엄마는 편안히 잠이 들었다.
2021년 2월 10일 수요일

복수를 빼고 나면 이삼일은 기력이 없다고 한다. 알부민(세포의 기본 물질을 구성하는 단백질의 하나. 혈관 속에 체액이 머물게 하여 혈관과 조직 사이의 삼투압 유지에 중요한 역할을 한다. - 서울아산병원 건강정보)을 바로 맞았는데 그걸로는 당연히 역부족일 테다. 아침에 반찬도 통 안 해오고 신경을 안 쓴다고 하며 투정을 부려서 또 연신 미안하다 했다. 월요일엔 분명히 엄마가 해오라는 것만 해오고 다른 것 한다며 시간 쓰지 말라 했는데…. 아빠에게 하는 소리일까, 아니면 간이 좋지 않아 약하게 나타난 간성혼수나 섬망일까. 괜히 예민해진다. 엄마의 정신은 아직 또렷한데. ‘내가 또 설레발쳤구나’라고 생각한다.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 눈을 감고 있는 모습을 더 많이 보게 된다. 엊그제만 해도 내 눈을 빤히 쳐다보길래 괜히 또 면박당할까 민망해하며 눈을 피했는데…. 노란 눈의 엄마가 나를 보지 못하고 계속 잠에 빠져 있다. 며칠 잘 자고 일어나주길. 이제 눈을 피하지 않고 예전처럼 눈이 마주치면 “사랑해!”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이나 떠오르는 기억 들을 재잘거리는데 엄마가 검지를 입가에 가져간다. 나는 조용히 엄마가 잠자는 것을 돕기로 한다. 가끔 잠자며 꿈속에서 무슨 말을 하는 것 같이 입을 움직일 때가 있다. 마치 아기가 옹알이할 무렵 입을 움직이는 것같이 보인다. 아기는 자신 앞에 펼쳐질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 하지만 어렴풋이 인식하고 무언가 알게 된 것을 자신만의 언어와 방식으로 표현하는 것 같다. 죽음이 머지않았다는 선고를 받은 엄마도 내가 알지 못하는 엄마만의 언어로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것, 죽음과 삶의 경계 어딘가에서 보이는 것에 대해 말하는 것만 같다. 몸을 가누기 힘들어하는 것도 아기와 닮았다. 엄마가 아기였던 나를 돌보아 주었고, 나는 엄마가 아기처럼 변한 지금 엄마를 돌보고 있다.
부어있는 다리를 주물러주고 발을 닦아주고 이런 작은 일부터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면 뒤처리하는 일까지도.
화장실에 갔다가 침대에 다시 누우려는데 평소처럼 침대에 걸터앉았다가 침대 위로 올라갔다. 몸을 침대 위쪽으로 옮기려 엄마는 엉덩이 옆에 손을 대고 엉덩이를 들어 조금씩 움직이려 했고 나는 무릎 밑에 손을 두고 엄마의 하체를 살짝 들어주는 데 팔에 힘이 풀린 엄마가 뒤로 풀썩 넘어갔다. 엄마는 팔이 부러질 뻔했다며 울음을 터뜨릴 기세였고 나는 당황해 어쩔 줄 몰라 계속 미안하단 말만 반복했다. 엄마는 정말 화가 난 듯 미안하다면 다냐고 다그쳤다. 잘못하면 엄마는 팔이 부러지고 나는 허리가 나갈 뻔했다며. 이럴 때는 내가 힘이 정말 센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번쩍 엄마를 들어 옮길 수 있는. 내가 할 수 없는 일 또 하나를 자각했다.
저녁은 끝내 안 먹는다고 해서 내가 엄마의 식사를 해치웠다. 엄마는 밥 대신 약을 먹었다. 어제 복수를 빼면서 복수를 검사해 봤더니 염증 소견이 있다며 항생제를 쓴다고 했는데. 항생제 탓에 입맛이 더 떨어진 건가. 식욕 촉진제도 소용이 없었다. 설음식은 조금 드셔주시면 좋겠는데…. 간절히 기도드린다.
2021년 2월 12일 금요일

설날. 새해다. 가족들이 모여 앉아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며 따뜻함을 나누는 것은 코로나-19 때문에 조금 어려워졌다. 그래서 한편으론 다행이다. 모두가 화목하고 즐거운데 우리 집만 엄마가 아파서 슬펐다면 더 우울했을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나물을 볶고 엄마가 마실 미나리물을 끓이고 만둣국도 끓였다. 어제 동생과 만든 전을 통에 담고 갈비찜도 담아본다. 만두와 떡은 따로 건져 통에 담고 국물도 담는다.
서둘러 병원으로 가서 엄마와 아침 먹을 채비를 했다. 가져오는 동안 만두와 떡이 불었을까 조마조마했는데 역시나 떡은 너무 퍼져있었다. 그래도 엄마가 떡 한 점, 만두 1/4개, 취나물 약간, 오이무침을 조금 드셨다. 먹으면 배가 아프고 불편하다고, 안 먹는 게 훨씬 편하다고 한다. 설날이라고 식사를 조금 해준 엄마가 고맙다.
엊그제만 해도 화장실 갔다 온 뒤에 몇 걸음씩 걸었는데 이제는 화장실 갈 기운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소변줄과 소변기, 기저귀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기저귀를 했다. 편의점을 세 번 왕복해 필요한 것들을 사고 입히고 맥이 풀렸다. 동생에게 상황을 설명하고 당부했다. 해보겠다고 하는 동생 놈이 신기했다. 이제 좀 컸구나 싶다.
집에 와서 아버지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것 같은 아버지에게 상담이든 병원 치료든 필요한 걸 받자고 잘 이야기했다. 꽤 신경 쓰는 말투로. “고맙다.” 말하곤 바람 쐬러 나간다더니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역시 아버지란 인간은 구제 불능이다.
2021년 2월 13일 토요일

아침부터 기분이 더러웠다. 아버지와 있는 것이 끔찍해 어서 병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미나리를 씻어 놓고 아침을 대충 먹고 씻고 빨래를 돌리고 물건을 챙기고…. 아비가 병원에 가겠다고 하자마자 버럭 화를 냈다. 어딜 가냐고, 그렇게 술이 마시고 싶냐면서 뭐라고 했더니 엄마랑 똑같다 하길래 이런 소리를 들어도 본인한테 문제가 있다고 생각되지 않냐며 치료받으라고 화를 냈다.
베란다에서 엄마 속옷을 빨다가 갑자기 와락 눈물이 났다. 소리 내 엉엉 울었다. 날씨가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내복이 필요해 마트에서 엄마가 입을 도톰한 내복을 샀던 일, 그때만 해도 지금보다 훨씬 건강했던 엄마의 모습이 떠올라 기력이 거의 소진되어 자리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는 엄마의 현재가 더 처량하게 느껴졌다. 언젠가는 지금처럼 숨 쉬고 몇 마디 말이라도 할 수 있는 순간이 더 낫다고 되돌아볼 때가 올까?
미나리 달인 물이며 내 물건들이며 이것저것 챙겨서 병원으로 왔다. 엄마는 왜 이리 늦었냐고 말하며 나름의 방식으로 반겨주었다. 머리 자른 걸 다시 보자더니 잘 잘랐다며 엄지를 들어 보인다. 나도 고맙다며 같이 엄지를 들어주었다.
아침에는 귤 몇 조각을 드셨다더니 내가 온 뒤로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겨우 물을 마시는 게 전부. 수액에 의존할 수밖에. 가끔 눈을 뜨곤 김치를 꺼내라고 하거나 유재석 이야기를 한다. 그리곤 내가 꿈인지 아닌지 헷갈린다고 말한다. 나는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리는 걸 알기만 해도 다행이라고 괜찮다 한다.
아프고 배가 불편한가보다. 모르핀을 자꾸 찾는다. 될 수 있으면 삼가고 싶었는데, 내가 대신 나눠 가질 수 없는 통증을 줄이기 위해선 모르핀 말곤 다른 수가 없다. 긴긴밤 간간이 엄마는 어떤 말을 중얼거리곤 해서 잠을 자다가 일어나야 했다. 밤이 낮이 되고, 낮이 밤이 되었다. 엄마의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었다.
2021년 2월 14일 일요일

어제저녁, 기저귀에 한 번 소변을 보고 난 뒤로는 답답함만 호소하고 소변을 제대로 보지 못하여 새벽에 소변줄을 했다.
복수를 빼기 위해 바늘 꽂고 관을 연결했지만 500mL 남짓. 그 이상은 나오지 않았다. 그래도 빼고 나서는 한결 편안한 것 같았다.
낮에는 거의 잠을 자는 엄마, 수건을 가져다 놓았더니 저 떡국은 뭐냐 묻고, 내 가방이 열려있는 모양을 보더니 이상한 게 보인다고 하고 그게 뭐냐고…. 섬망이 계속되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말기암 환자에 대해 알아보라며 이야기한다. 이럴 때는 엄마가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단 생각이 든다. 겁먹고 호들갑 떨 일이 아니라 정확하게 알아야 할 것을 기억하고 상황을 잘 판단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이야기했겠지. 나는 너무 맞는 말에 알았다고 할 수밖에 없었다.
간간이 이야기도 하고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라라랜드 OST도 들으면서 이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에서 나오는 음악이라며 같이 듣고, 밥 로스 아저씨가 30분 만에 뚝딱 그려내는 그림도 같이 보고…. 흐린 날의 일요일 오후는 그렇게 평화로웠던 것 같다.
9시 무렵 잠자리를 준비하며 물도 마시고 준비하는 데 뜬금없이 전화기를 달라고 하더니 연락처를 정리한다. 엄마의 형제들과 아끼는 조카 몇몇, 우리 식구, 엄마의 베스트 프렌드 외의 전화번호는 남김없이 삭제, 삭제, 삭제.
낮의 평화로운 시간이 무색하게 밤의 불안과 공포가 엄마를 엄습했다. 병실 문에 있는 유리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막아야 했다. 섬망이 있는 환자는 약간 빛이 있게 해야 안정이 된다던데 엄마는 빛을 막아달라고 한 게 의아했다.
물을 더 찾고 마른 입을 축이기 위해 가제 손수건에 물을 묻혀 입가에 대주어야 했다. 그러다 다시 간호사 선생님을 소환해 침대에서 몸을 움직이는 것을 도와야 했고 엄마 눈에만 보이는 허깨비들과 엄마 귀에만 들리는 이상한 소리들을 짐작해 쫓아내고 안심시켜야 했다. 실체가 없는 것들과 싸워야 하는 일은 얼마나 암울하고 고독한 일인지. 먹은 것도 없는데 불러오는 배와 부어있는 다리, 앙상한 팔과 얼굴. 엄마의 모습은 점점 낯설어져만 간다.
새벽 네 시, 엄마가 몸에 연결된 줄을 다 떼자고 한다. 이런 연명치료 안 받겠다며 이제 이렇게는 못 산다고 아빠를 부르라 한다. 절망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것이구나. 엄마의 심장은 아직도 뛰고 있고, 숨 쉬는 것도 호흡기가 필요할 만큼 어렵지는 않은 것 같고, 아직 손도 너무나 따뜻한데…. 의학의 힘을 빌려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게 아니라 엄마 스스로 잘살고 있는 것 같은데…. 엄마는 무엇이 그렇게 절망적이어서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했을까. “엄마, 연명치료는 수액 맞고 이런 게 아니래. 심폐소생술하고 그런 거래.” 울면서 엄마를 가르쳐야 했다. 엄마에겐 엄마답지 않은 모습으로 사는 게 너무도 괴로운 일이 아니었을까. 엄마의 또렷하고 명료하던 의식이 흐려지는 순간이 위기였고, 그게 무너진다면 육신은 살아 있으되 진정으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기에. 엄마의 깊은 뜻을, 나는 감히 물어볼 수도 없었다. 아니 묻고 싶지 않았다.
해가 뜨기 전의 시간은 길었고 이상하리만큼 더디 흘러가는 것 같았다. 어서 월요일 회진 시간이 되어 교수님께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무엇이든 좀 해달라고, 도와달라고. 무릎이라도 꿇고 빌고 싶었다. 제발 죽고 싶다는 엄마의 말만은 멈추게 해달라고.
4년여 전에 우울증으로 사는 것이 의미 없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었다. 엄마의 마음에 대못을 박는 말인지도 모르고 내가 힘들다며 내뱉었던 말이 내게 다시 비수가 되어 꽂혔다.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데…. 제발 좀 더 곁에 있게 해 주세요.
2021년 2월 15일 월요일부터 - 2021년 2월 19일 금요일 새벽까지

월요일 아침, 주치의 선생님이 다녀가셨다. 간호사 선생님들도 엄마를 걱정스럽게 바라본다. 노련한 간호사 선생님이 엄마를 보시더니 호흡이 달라졌다며 가족들이 곁에 있는 게 좋겠다고 한다. 내가 느끼기엔 아직 엄마가 숨 쉬는 것이 괜찮은 것 같은데. 월요일에 출근했던 동생이 조퇴하고 바로 병원으로 왔다. 네 식구가 다시 모였다. 병원에 입원하고 열흘 만이었다. 엄마는 우리가 곁에 더 가까이 있었으면 했나 보다. 코로나-19만 아니었어도. 면회도 자유롭고 더 자주 볼 수 있었을 텐데 열흘 동안 한 사람씩만 곁에 있는 게 허전했나 보다. 엄마가 숨을 거두는 순간을 두려워하며 옆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저 미안할 뿐이다.
이틀을 밤새 있다 보니 몸이 내 몸 같지 않았다. 머리도 멍했다. 그래도 담당 교수님 회진하실 때까지는 있어야지 생각했다. 교수님은 일주일 만에 급속히 나빠진 엄마의 모습을 보시곤 다소 놀라신 듯했다. 마약성 진통제를 한 시간에 1mL씩 주입되는 장치를 연결하도록 하시곤 밤에는 잠을 푹 잘 수 있도록 약을 주시기로 했다. 그렇게 간절히 기다리던 회진은 짧게 끝났다. 나는 살려달라곤 할 수 없었다. 교수님은 신이 아니기에 엄마를 우리가 원하는 만큼 살려줄 수 없다. 다만 고통을 줄이기 위한 약을 처방하고 섬망으로 힘든 시간들을 견디기 위해 잠들게 할 뿐 우리와 함께 이야기하고 웃을 수 있게 해주지는 못했다. 다 알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눈을 감고 있다가 가끔 눈을 떠서 샛노랗게 변한 눈으로 나를 바라볼 때, 엄마의 눈동자는 나를 스쳐 지나가 내가 볼 수 없는 피안의 먼 곳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그 노란 눈이 때로는 너무 낯설어서, 엄마의 맑은 눈이 아니라 암이라는 무서운 병마에 사로잡혀 내가 알고 있는 엄마가 아닌 다른 존재가 된 것 같아 눈 마주치는 것을 슬쩍 피할 때도 있었다. 얼마나 쓸쓸했을까. 내가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회피하고 있었을 때 엄마는 많이 외로웠겠구나. 가끔씩 눈을 뜨는 엄마가 신음인지 울부짖음인지 알 수 없는 소리를 내거나 양손을 휘저으며 무언가를 해달라고 할 때 그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 들어도 피하지 않고 눈을 마주쳐야지 고개를 끄덕이며 나 여기 있다고 말해주어야지, 괜찮다고 말해주어야지 생각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곁에 머물러있고, 옆에 있다며 안심시키는 일밖에 없으니.
다시 밤이 깊어져 갔다. 몸은 한없이 지치고, 하필이면 몸의 중요한 부분에는 뾰루지 같은 것이 나서는 계속 따끔거리기 시작했다. 불안했다. 내 몸에도 이상이 있으면 엄마를 제대로 보살펴 드릴 수 없는데. 나도 혹시 암일까. 온갖 근거 없는 걱정들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9시 반이 넘어 엄마가 수면제를 맞았다. 오늘 밤은 그래도 약을 맞았으니 잠을 편하게 잘 수 있을까. 아버지가 저녁부터 집에 가라고 했는데 엄마가 잠드는 걸 보고 가겠다고 하고는 한참이 지났다. 낮에 거의 잠들어 있어서 밤에 푹 잘 수 있을까. 간호사 선생님께 약효가 언제쯤 나타나는지, 잠자는 것은 얼마나 지속될지 물어보았다. 약은 맞은 뒤에 30여 분 뒤면 잠들 거고, 사람마다 효과는 다르지만, 수면제를 맞고 아침까지 푹 주무시기도 한다고 말씀해 주셨다. 이틀간 잠을 제대로 못 잤으니 약을 맞아야 한다는 것이 찜찜하지만 그래도 오늘 밤은 평안히 보내실 수 있기를 기대하며 나도 집으로 가서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산부인과에 가서 진료받았다. 엄마는 병원 중에 산부인과가 제일 무섭다고 했는데, 요상한 의자에 앉아 다리를 올리고 나의 소중하고 비밀스러운 신체 부위를 의사에게 드러내 보인다는 건 이런 기분이구나 생각하며 엄마의 말에 공감했다. 의사가 내 밑을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마치 몸속 깊숙한 곳에 숨겨둔 내밀한 곳까지 다 들통나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기분이 든다. 그래서 큰일이 날 것만 같은 불안에 사로잡힌다. 의사 선생님에게 설명하기도 애매한 부분을 알려드리곤 엄청난 고통이 밀려왔다. 무언가를 짜내는 것 같았는데 끔찍하게도 아팠다. 고작 뾰루지를 짜낼 뿐이었는데.
엄마 배 속에 내가 있다가 다 자라 세상 밖으로 나올 무렵, 나는 머리부터 나오지 않고 반대로 있어서 제왕절개 수술을 해야만 했다. 엄마의 배를 가르고 나는 태어났다. 마취를 했지만, 엄마의 예쁘고 소중한 배에 차가운 메스가 지나가며 붉은 피가 흘렀을 것이고 열린 배 안으로 의사는 손을 넣어 나를 꺼냈겠지. 엄마는 얼마나 아팠을까. 나는 겪어보지도 못한 고통을 엄마는 혼자서 이겨내고 나를 만나 기뻐했을까. 나를 품에 안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까. 엄마가 덜 아프려면 뱃속에서 내가 머리를 하늘로 향하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번지점프 하듯이 머리를 숙여 아래를 보고 있었어야 했는데. 그것이 나의 원죄였다. 그때부터 나의 불효는 시작이었구나. 먼지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떠다니다 지나가니 처치가 끝나고 항생제를 주사로 한 대 맞고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의사 선생님은 연고를 처방해 주며 또 생기면 다시 병원에 오라고 하셨고, 자궁경부암 검사도 받아야 한다고 하셨다. 나도 내 몸에 혹시 모를 암 덩어리가 자라고 있지 않나 조금 염려하게 되었다. 혹시 암이 있다고 하면 엄마처럼 울지 않고 받아들일 자신은 없지만.
병원에 도착하니 진통제는 2mL로 늘어나 있었고, 엄마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잠에 빠져 있었다. 땀이 얼굴을 타고 흘러 내려와 목에 맺혀서인지 허옇게 되어있었고, 시큼한 냄새도 약간 났다. 목을 닦아주니 불편해했지만, 조심스레 닦아주고 나니 한결 마음이 편했다. 원래는 깔끔한 엄마가 제대로 씻지도 못한 지도 한참이었다. 물을 쓰지 않고 환자를 닦아드릴 수 있게 나온 샴푸나 바디워시를 사려고 했는데, 엄마가 귀찮아하고 거슬리는 듯 밀어내니 함부로 닦아줄 수도 없었다. 따뜻한 물에 수건을 적셔 발과 다리를 닦아주고 주물러주는 것만 할 수 있었다. 그렇게라도 엄마를 위한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었다.
복수가 차올라 숨 쉬는 소리가 하루 만에 확연하게 달라졌다. 어제 간호사 선생님이 말씀하실 때만 해도 느끼지 못했는데, 불과 하루 만에 헉헉거리며 거칠어진 숨소리가 내 두려움과 불안을 더 증폭시켰다. 믿을 수 없었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엄마가 숨 쉬는 건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게다가 아버지가 밤에 엄마 곁에 있는 동안 엄마가 깨어나선 나를 찾았다고 했다. 내가 곧 올 거라고 잠깐 화장실 갔다고 했다는데, 엄마는 내가 집에 간 걸 알았을 텐데…. 도망가려고 집에 간 건 아니지만 그 몇 시간 잠시 곁을 지키지 못했다는 게, 엄마가 나를 찾았을 때 나는 없었다는 게…. 정말 미안했다. 밤이라도 전화했으면 왔을 터라고 말했더니 아빠는 너무 늦은 새벽 시간이었다며 그럴 수 없었다고 했다. 엄마가 그토록 무서워했던 밤을 견디는 게 또 얼마나 괴로웠을까.
화요일 회진 때는 엄마가 잠들어 있었다. 교수님에겐 일요일 새벽에 엄마가 연명치료 안 받겠다며 몸에 연결된 관을 떼어달라 했다고 말씀드렸던 것 같은데, 깜빡하신 것 같아 다시 말씀드렸더니 엄마가 참 강한 분이라고 하셨다. ‘네, 맞아요. 엄마는 본인의 삶을 본인 뜻대로 할 수 없고 다른 사람이 어떻게 해야지 겨우 삶을 이어갈 수 있는 이 상황을 못 견디게 거부하는 것 같아요.’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섬망으로 밤에 힘들어한다고 했더니 ‘페리돌’이란 진정제가 필요하면 투약해 달라고 간호사 선생님께 말씀하셨다.
간이 의자에 앉아 기도하는 시간이 늘었다. 너무 고요해서 숨이 막힐 것 같아 작게 라디오를 켰다. 예전에 공부할 때나 듣던 KBS 1FM에 주파수를 고정하고 클래식을 들었다. 엄마가 아프고 난 뒤 내 생활은 수험생이었던 시절로 돌아갔다. 일찍 일어나고, 온종일 암에 대해 공부하고, 밤늦게 잠드는 생활. 시험 준비할 때나 쓰던 플래너에는 그날의 식단과 엄마의 컨디션, 투약 상황, 바일백에 모인 담즙의 양, 체온 등등이 매일 기록되어 있었다. 뭔가 놓치면 큰일 날까 봐 자세하고 꼼꼼하게 적었다.
내가 임용시험을 준비할 때, 독서실에서 집까지 밥 먹으러 왔다 갔다 하는 게 귀찮아서 편의점 삼각김밥과 컵라면을 자주 먹었다. 그러다 엄마가 그런 걸 계속 먹으면 어쩌냐고 도시락을 싸 주었다. 옛날 스타일로 도시락통을 커다란 면포에 싸서 들고 가도록 해주었던 기억이 났다. 엄마가 해준 감자나 어묵을 조린 것, 멸치볶음 같은 반찬에 콩밥을 먹던 내가 이제 엄마에게 밥을 해주는 사람이 되었는데 이젠 그마저도 못 먹게 되었다. 아니, 사실 나는 엄마 밥을 더 많이, 오랫동안 먹고 싶었다. 어릴 적 햇살 좋은 날에 넓적한 채반에 가지며 호박이며 말려서 냉동실에 두었다가 마땅한 반찬이 없을 때면 꺼내어 물에 불린 나물을 기름에 볶아 맛깔난 반찬을 해주었던 엄마, 내가 본가에 내려갔다가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면 집에서 뭘 해 먹기는 하냐며 밑반찬을 통마다 가득 담아주곤, 들고 올라가는 게 무겁진 않은지 물으며 배웅하던 엄마. 하지만 지금 엄마는 숨을 헐떡이며 남산만 한 배를 하곤 침대 위에 누워있다. 제발 버텨달라고 기도하는 나를 보고 있을까.
TV에서나 보던 ‘바이탈 사인 모니터(vital signs monitor)’를 엄마 몸에 연결했다. 이제 모든 장기 중에서 마지막으로 심장마저 힘들어하는구나 싶었다. 호스피스 병실 창밖으로 해 질 녘 하늘이 붉게 물들었다. 엄마의 여명도 이제 분초 단위로 헤아려야 할 정도로 짧아졌다.
아버지와 함께 병실에 있다가 신문지에 아버지가 뭔가를 쓰는 걸 보게 되었다. ‘謹弔(근조)’라고 한자로 쓴 걸 보고 또 화가 났다. 그렇게 엄마 죽는 걸 빨리 보고 싶었냐고. 그걸 왜 병실에서 쓰고 있느냐고 나와서 소리쳤다. 아버지는 아무 뜻 없이 쓴 거라며 왜 별것도 아닌 것에 화를 내냐고 오히려 나에게 성냈다.
목요일쯤 엄마의 숨소리가 더 가빠졌다.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엄마 손을 꼭 잡은 채 숨을 잘 쉬고 있는지 살피기 바빴다. 금방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밤이 되자 맥박이 낮아졌고, 나는 울면서 엄마 옆에 붙어 엄마 대신 숨을 들이쉬었다 내쉬면서 숨 쉬는 것마저 가르치고 있었다.
금요일 자정이 지나, 바이탈 사인(vital signs)이 심상치 않게 변했다. 오늘이 아니길 바랐는데, 결국 엄마는 새벽에 숨을 거두었다. 엄마의 숨이 멎자 놀란 나는 간호사 선생님을 불렀고, 곧 당직의가 와서 몇 가지를 확인하더니 드라마에서나 보던 사망선고를 내렸다. 오전 1시 35분이었다. 간호사 선생님이 오셔서 가족들에게는 천천히 인사를 하라고 했지만 아무리 인사를 해도 모자란 시간이었다. 사람의 감각 중에 가장 마지막까지 살아있는 것이 청각이라는 말을 기억해 냈다. 엄마 귀에 대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했다. 엄마는 대답이 없었다. 아니, 대답할 수 없었다. 엄마가 양복을 담을 때나 보던 검은색 부직포 주머니에 담긴 채, 지퍼가 올라가자 이동 침대에 실려 가던 모습을 본 게 마지막이었다. 정말 모든 것이 그렇게 허망하게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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