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 R-60m: 모두 제자리

Chapter 4. 바닥을 찍고 나니 이제야 떠오르는구나 2021~현재

by Luci

장례를 치르고 나서 일주일은 집안을 정리하고, 은행과 세무서 등을 오가고,

엄마의 물건들을 정리하느라 바빴다.

엄마를 위해 샀지만 미처 쓰지 못한 의료용품은 무료로 나눔 하고,

좋은 옷은 아름다운 가게에 기부했고,

(이모는 망자의 물건이 좋은 사람에게 가면 망자도 좋은 곳으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난 그 이야기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남은 셋이 함께 강릉에 바다도 보러 갔다 왔다.

나는 아버지를 여전히 증오했지만, 엄마가 남은 셋이 잘 지내라고 한 유언 때문에

과거는 털어버리고 보통의 부녀 관계로 돌아가자 다짐했다.

동생이 운전하고 갔다가 둘이 대작하는 바람에 내가 운전을 하고 돌아왔지만 억울하지 않았다.

다만 빈자리 하나가 너무도 커서 쓸쓸했다.


복직하기 전에 마쳐야 하는 중요한 일정이 두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엄마가 마지막까지 편하게 병원에서 생을 마무리하도록 도와주신

호스피스 병동에 인사를 드리는 것이다.

어떤 선물을 할까 고민하다가 수제 초콜릿을 사서 포장을 하고, 카드를 썼다.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하고, 마지막까지 상담해 주신 간호사 선생님을 뵈었다.

선생님은 고생했다며 안아주셨고, 그렇게 울었는데 또 눈물이 났다.

선생님은 엄마가 떠난 것을 애도하며 쓸 수 있는 노트를 한 권 주셨고,

본인이 들었던 연수를 진행하신 강사분이

평생교육원에서 사별을 경험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강의를 연다고 하시니

관심 있으면 들어보라고 권유해 주셨다. 정말 감사했고, 너무 따뜻했다. 그 마음이 나를 조금 낫게 했다.


두 번째는 엄마의 비석에 어떤 문구를 새길 것인지 정하는 일이었다.

하고 싶은 말도, 비석에 새겨 두고두고 기억하고 싶은 말도 많았지만, 그렇게 길게 할 수 없었다.

후보 1) 티 없이 맑은 당신
당신의 사랑과 헌신을
영원히 기억할게요
평화로이 쉬소서 사랑합니다.
후보 2) 항상 사랑과 헌신으로 우리 가족을
감싸주셔서 감사합니다.
부디 그곳에선 걱정 없이 편히 쉬세요
사랑합니다.

이렇게 정리했는데 결국 다음과 같이 새기기로 했다.

-密陽朴氏鍾淑之墓-

영원히 기억할게요
평화로이 쉬소서 사랑합니다

비석 뒤에는 아버지와 나, 동생의 이름이 차례로 새겨졌다.


내 이름은 할아버지가 지어주셨다고 했다.

사내아이 이름은 ‘한’ 자 돌림이라 그런대로 나쁘지 않았는데

무슨 생각이셨는지 딸내미들 이름에도 ‘경’ 자를 넣어 이름을 지어주셨고,

내가 태어났을 때도 이름은 그렇게 정해졌다.

그 시절에도 촌스러운 이름이 지금은 더욱 촌스러워져서

두고두고 내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언젠가 개명해야지 생각했는데,

막상 이름이 비석에 새겨지고 나니 이젠 이름을 바꾸면 비석까지 다시 만들어야 하나 싶어서

그냥 내 팔자인가 하고 받아들이게 되었다.

엄마도 본인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했지만 끝내 바꾸지 못하고 떠난 것처럼.


낮에는 조금 살 만했다가, 저녁이면 괜히 마음이 어지러웠다.

그럴 때면 자연스레 뭔가 내 맘과 비슷한 사람들을 찾게 되었다.

매일 출근 도장을 찍듯이 드나들던 암 환우 카페에 더 이상 접속할 이유가 없어졌지만,

괜히 나 같은 사람이 있는지 들어가 보게 되었다.

그러다 남긴 댓글 같은데, 메모 앱에 이런 글이 저장되어 있었다.

남에게 쓴 글이지만, 나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2021년 2월 26일 오전 8:06

끔찍하게 아픈 이 세상에서 어렵게 삶을 이어가는 것과
평화롭고 편안한 저세상에서 지내는 것,
고인에겐 어떤 것이 더 나은지 알 수 없고
그리고 남겨진 우리에게도 무엇이 더 좋을지 알 수 없네요
다만 누구에게나 하늘나라 가는 것은 정해져 있다는 사실만이 분명하지요.
힘든 시간 보내고 있을 님처럼, 저도 같은 마음입니다. 고인께선 글 쓴 분이 이 세상 잘 살아가시길 바라고 계시겠지요. 같이 힘내봐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2021년 3월 1일

친구 P, B와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고 영화 ‘프록시마 프로젝트’를 보았다. P의 어머니로부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응, P야~”
“어 엄마, 나 지금 친구랑 영화 보는 중인데 이따 전화하면 안 돼요?”
“응, 그래. 알았다. 재미있게 보고!”
“응, 이따 전화할게요”
짧은 통화에 묻어나는 어머님의 다정함과 P의 자연스러움에 괜히 또 마음이 아려온다.
하루에 두세 번 짧게 통화한다며, 별 내용은 없고 밥은 먹었는지 무슨 일은 없는지 묻는 그런 평범한 안부 전화.
나는 엄마한테 전화하는 걸 일부러 피하기도 했었는데. 그래도 한 번 통화하면 한 시간이 넘도록 그렇게 오래 통화한 적도 있긴 했다. 내가 주로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지만.
아프기 전에, 엄마 숨이 멎기 전에 더 많이 이야기할걸. 한꺼번에 몰아서 하기엔 시간이 너무도 모자랐는데...
해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은 나의 삶 속에서 불쑥불쑥 나타나 때론 힘들게도 하겠지만,
그래도 그것 또한 내 삶에서 겪어나갈 내 몫의 무게인 것이라서 그냥 내 마음이 그렇구나 받아들이기로 한다.
엄마가 떠났어도, 내가 이곳에서 말하는 것이 하늘에 가서 닿지 않더라도, 엄마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는 일은 멈추지 못할 것 같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3월 둘째 날로 넘어가는 밤, 엄마의 몸에서 눈이 흩날리던 것처럼 하늘에도 가벼운 봄눈이 흩날린다. 오늘도 엄마를 그리워하는 밤이다.

일주일이 금방 지나가고 정신 차려보니 출근할 때가 되었다.

도저히 3월 2일부터 출근할 자신이 없었다. 학교엔 하루만 더 쉬고 나가겠다고 했고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휴직 사유가 소멸하면 당연 복직하는 것이 원칙이라,

엄마가 언제든 돌아가시면 내가 복직해야 하는 것은 정해진 일이었다.

하지만 다시 일을 시작하는 것이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나도 죽을 것 같았다.

슬프고, 힘들고, 지친 몸과 마음으로 아이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을지 나조차 장담할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집에서 쉬는 게 능사일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아직 코로나로 아이들이 전부 등교하지 않을 때라 일이 힘들지 않을 거고,

엄마가 떠났다는 슬픔에 매몰되지 않도록

일을 시작하는 것이 어떤 전환점의 계기가 될 수 있을 거란 생각을 했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결과적으론 잘한 선택이었다.


시간을 되돌려 엄마가 암이란 걸 처음 알았을 때로 돌아간대도

나는 똑같이 일을 쉬고 엄마 곁에 있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시간을 되돌려 엄마가 돌아가신 뒤, 복직을 할지 휴직을 이어갈지 선택하는 상황에 놓인다 해도

역시나 같은 선택을 할 것이다.


인생의 큰 교훈 하나는 어떤 선택을 할 때 시간을 되돌려도 변하지 않을 결정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후회해도 무조건 해봐야 안다는 것.

비록 땅을 치고 후회한다 해도 해야만 하는 일이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라면,

그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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