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심 30+αm: 일을 쉬어도 여전히 바쁘다 바빠

Chapter 3. 서서히 가라앉는 중입니다. 끝없이 깊은 곳을 향해

by Luci

본가로 돌아오니 본격적으로 암 환자가 된 엄마와 우리 가족의 항암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여름방학을 맞이해서 본가로 내려갔고,

엄마가 집 근처 병원에서 치료를 받겠다는 결정을 내리고 나서는 휴직을 결심했다.

엄마의 남은 시간이 길지 않다면...

조금이라도 더 내가 엄마 곁에 머물고 보살펴 드리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코로나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에 오지 않아 예전보다 일이 훨씬 덜하다고는 해도 신경 쓸 것이 워낙 많으니,

하나라도 짐을 덜어야 했다.

같은 학년 선생님들과 부장님께 엄마가 아프다는 사실은 말씀드렸었지만,

막상 휴직한다고 하니 기분이 묘했다.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괜히 부장님이 안아주시면서 어깨를 토닥여주실 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엄마만 챙기지 말고 내 몸도 돌보라는 그 말이 너무 따뜻했고 감사했다.

엄마 병원에 가느라 부지런히 연가를 썼는데

알고 보니 6개월 휴직을 하면 연가일수가 줄어드는 줄 모르고 초과로 연가를 써서

월급 일부를 반납하기도 했다. 휴직 사유 9호: 가사휴직.

가사휴직은 2023년에 가족돌봄휴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코로나로 자주 보진 못했지만 몇 달간 맡았던 반 아이들과 학부모님께도 인사를 드리고

나 대신 우리 반을 맡아주실 선생님께 이것저것 설명해 드리고 나니 새삼 휴직하는 게 실감 났다.

‘아이를 낳지 않아도 휴직하게 되는구나.’


다시 본가로 돌아온 나의 주 임무는 엄마 간호였다.

퇴원 전에 병원에서 배운 대로

엄마의 배에 달린 담즙 배출관 주변 소독과 주머니(바일백) 관리를 했다.

(나름 실력이 나쁘지 않았던 것 같아서 그냥 간호대 갔어도 됐겠다는 생각을 잠시 했었다)

두 번째 주 임무는 식사 챙기기.

그 밖의 잡다한 일인 청소와 빨래 같은 집안일, 항암 정보 공부까지 하려면 하루가 이상하게 바빴다.

그래도 엄마는 다행히 집에 오니 훨씬 편안하다고 했다. 그나마 그게 다행이었다.

엄마가 아프기 전까지는 요리와 담쌓고 살면서 주로 얻어먹는 사람으로 지내다가,

암 환자가 된 엄마를 대신해 이제 요리는 주로 내가 맡아서 하게 되었다.

엄마가 코치하기는 해도 30년 넘게 숙련된 엄마의 솜씨를 감히 내가 어찌 따라갈 수 있었겠는가.

엄마는 험한 학교 조리실에서 수백 명 분량의 식사를 지어내던 사람이었다.

요리는 엄마의 자부심이었다.


나에게 요리는 남이 해주는 것이어서 안 그래도 능력치가 없었는데

갑자기 TV에 나오는 셰프 정도의 실력을 발휘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엄마는 원래도 까다로운 입맛의 소유자였는데 항암치료로 인해 입맛을 더더욱 잃어 뭐든 맛없다 했고,

날이 갈수록 눈에 띄게 살이 빠졌다.

그래서 나를 낳고 난 뒤로는 평생 통통했던 엄마가 점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갔다.

그게 슬퍼서 어떻게든 맛있는 음식을 해주고 싶어 고군분투했지만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시골 할머니들이 바리바리 짊어지고 와서 파시는 식재료를 사러 오일장에 자주 갔다.

귀한 호박잎, 나물 등을 사다가 요리해도 과하게 데치거나, 양념을 잘 못 하거나,

손으로 조물조물 너무 버무려서 식감을 살리지 못하는 등

내가 만든 요리는 여러 가지 이유로 엄마가 만든 요리에 미치지 못했다.

‘MSG의 시대’에 살면서 조미료를 거의 쓰지 않은 채로 어떻게 맛을 낼 수 있었는지

아직도 의문(과학적으로 입증은 어렵겠지만, 손맛은 진실로 존재한다)이지만,

어쨌든 엄마의 요리는 맛있었고 내가 만든 요리는 그에 비하면 너무 어설퍼서

엄마의 매서운 미각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나는 매일 매 끼니마다 좌절했다.

삼시 세끼를 차리는 것은 형벌에 가까웠다.

아무리 애써도 ‘불합격입니다!’를 외치는 심사위원 앞에 선 기분이란 이런 거구나.

식탁 위에 하나둘 만든 음식을 올릴 때마다 엄마가 어떤 걸로 타박할까 싶어 떨렸고,

먹을만하다는 소리를 들을 때는 뛸 듯이 기뻤다.

가뜩이나 암 환자는 잘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요리 실력이 필요할 줄 알았으면 문화센터 요리 교실이라도 다닐 걸 그랬나 하는 후회가 또 들었다.


엄마의 입맛은 어린 시절 시골에서 자란 탓인지 매우 순박하고 예스러운 맛을 추구했는데,

제일 인상적인 것은 삭힌 감자녹말로 만든 감자범벅이었다.

특유의 쿰쿰하고 꼬릿꼬릿한 냄새가 가득한 음식은 먹성 좋은 나도 차마 도전하기 힘든 음식이었다.

아프기 전에 봄이면 산에 가서 잔뜩 나물을 뜯어다가 두고두고 꺼내먹기도 했고,

취나물을 잔뜩 뜯어오면 잘 손질하고 데쳐서 얼려두었다가 떡을 해 먹었다.

집에 있는 자그마한 돌절구에 찹쌀밥을 넣어 치대고 떡취나물 데친 것을 넣어

다시 토끼가 달에서 절구질하듯 열심히 치대면 밥알 식감이 살아있는 떡이 된다.

그걸 한입 크기로 만들어 통에 담아두고 입맛이 없다 할 때 조금씩 드시게 했다.

절구질이 힘들어 동생이랑 도란도란 이야기하며 열심히 치대면

그래도 그럴듯한 떡이 나와 엄마도 맛있게 드시니 힘든 보람이 있는 음식이었다.


음식 하는 게 제아무리 힘들다 해도, 집에서 요양하며 지내는 건 그나마 양반이었다.

항암제를 맞으러 병원에 가는 건 몇 배는 더 힘든 일이었다.

항암치료는 크게 수술, 방사선, 약물치료 세 갈래로 나뉘는데

엄마는 수술과 방사선 치료가 아예 불가능한 단계라 기댈 것은 항암제밖에는 없었다.

건강보험 적용 방식이 바뀌어서

미국의 지미 카터 대통령이 몇 달 만에 기적적으로 치료되었다는 면역항암제 같은 것은 바로 쓸 수 없었다.

대신 수십 년 전에 처음 개발되어 지금까지 쓰이고 있는 세포 독성 항암제부터 차례로 쓸 수밖에 없었다.

암 치료한다고 하면 부작용으로 머리카락이 빠지고, 토하기도 하고,

얼굴이 점점 상해가는 그런 이미지가 세포 독성 항암제를 쓰는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이라는 걸 그때 알았다. 아주 독한 약이 몸속으로 들어가 암세포만 죽이는 게 아니라

건강한 세포까지 죽여서 온갖 부작용이 나타나는 것이라는 걸. 그걸 겪게 되는 사람이 엄마가 될 줄이야.


항암제 투약 주기는 보통 3주라고 했다.

서울의 병원에서 처음 항암제를 맞았을 때는 조금 힘들어했지만

감사하게도 부작용이 심하다는 느낌은 없었는데,

집에 내려와서는 아주 허름한, 문제의(내가 혐오하는) C병원에서 항암제를 맞고

퇴원해 집에서 지내다가 며칠 만에 늦은 밤 응급실에 간 적이 있었다. 그날의 문제는 변비였다.

변의는 있지만 계속 나와야 할 것이 나오지 않아 병원에서 관장을 하고

화장실에 들어가서 씨름하며 엄마가 많이 울었다.

아프다고,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굵은 주삿바늘이 팔의 피부를 뚫고 혈관에 꽂혀 있을 때도 울지 않던 사람인데, 소리치며 울었다. 아프다고. 망할 항암제 부작용에 변비도 있는 줄은 몰랐는데

그것 때문에 한밤중 응급실에서 엄마랑 둘이 울고 있을 줄이야. 암세포란 정말 잔인한 녀석이었다.

그 독한 약에도 기세를 굽히지 않는 지긋지긋한 것.

건강하고 멀쩡한 세포를 잠식하고 스스로 증식하며

끝내 파국으로 치닫는 자기 파멸의 존재라니 모질고도 고약한 것이었다.


엄마가 항암제를 맞으러 병원에 입원하면

아빠, 나, 동생 중에 한 사람은 보호자로 하루씩 곁에 있을 수 있었다.

코로나의 광풍 때문에 외부인 출입이 제한되어 있었는데

가족이 돌아가면서 병간호할 수 있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빠나 동생이 병원에 있을 때는 집에서 조금 여유를 가질 수는 있었지만,

엄마 마음에 들지 않는 병원 식사를 보충하기 위해 집에서 이것저것 반찬을 만들어 가지고 갔다.

(당연히 열과 성을 다해 만든 반찬이지만, 그것도 ‘불합격’ 판정을 받는 날이 대다수이긴 했다)


내가 병원에 보호자로 있을 때면 몸을 닦는 것이나 말동무되어주기 같은 것이 중요한 일이 되었다.

생각해 보면 사지 멀쩡한 사람도 병원에 있는 것이 지루한데,

잘 움직이지도 못하고 거의 침대에서만 머무르는 환자는 얼마나 답답할까 싶다.

다인실에 머물면 주위에 있는 환자들과 담소를 나누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이 무료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을 텐데 어찌 버텼나 싶다.

다양한 이유로 입원한 사람들 속에서 얼른 나아서 병원을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으로 버티지 않았을까.


하루는 동생이 보호자로 병원에 있던 날,

엄마 병상 옆에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계셨는데 새벽에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셔서

의료진이 오더니 침대를 밖으로 옮겨 처치하는 걸 보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분은 결국 돌아가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엄마가 새벽 잠결에 그 상황을 자세히 보았는지 나중에라도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남자인 동생조차 아주 무섭고 오싹한 경험이라고 했다. 이야기를 듣는 나도 소름이 끼쳤다.

죽음이라니, 어렴풋이 관념 속에서만 자리했던 죽음이 눈앞에서 일어나다니.

동생이 해준 이야기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엄마가 암 환자라는 건 이제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그래서 정리해야 할 것도 생겨났다.

이제 납입할 필요가 없어진 보험 계약은 파기하고,

오래전 TV홈쇼핑에서 가입했던 암 보험이 있어 보험금 청구를 하고 서류를 보냈다.

우리나라의 훌륭한 국민건강보험제도 덕분에

암 환자는 ‘산정특례제도’를 적용받아 병원비가 생각만큼 엄청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험금을 받아 다른 치료도 할 수 있겠다고 기대하고 있었다.

그때 암 환자 카페에서 본 치료법 중 환자의 피를 뽑아 혈액 속 면역세포를 배양하여

다시 환자 몸에 주입해서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에 소위 ‘꽂혀’ 있었다.

엄마를 설득해 몇 회 정도 해보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중,

당연히 나오겠거니 했던 보험금은 지급이 거절되었다.

너무나 황당하게도 이유는 조직검사서에 있었는데,

조직검사지 내용에 ‘임상적으로 암이라 추정된다.’라고 적혀있으니

암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게 지급 반려 사유였다.

정말 ‘보험사 X들’이라며 사람들이 욕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 독한 항암제를 맞으며, 응급실에 실려 가며 암 치료를 받는 사람한테

‘당신은 암이 아닐 수도 있으니 암 보험금을 못 줍니다’라고 말하는 뻔뻔함에 치가 떨렸다.

돈이란, 기업이란 정말 매정하고 무섭다는 생각과 함께

어떻게 해서든 그 돈을 받아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다.

잔뜩 약이 오른 나와 달리 엄마는 아파서 돈에도 초연해졌는지 다 그만두자고 했다. 그럴 수는 없었다.

보험회사 따위가 감히 암과 싸우는 엄마를 무시하기라도 한 것처럼 느껴졌는지,

그동안 엄마가 열심히 벌어서 낸 보험료가 있는데

계약에 있는 보험금도 못 받으면 억울해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악착같이 받아내기로 했다.

보험사정 하시는 분을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고 처리를 의뢰했다.

보험사정인은 보험사에서 일반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라며

엄마가 암 치료를 받고 있다는 걸 입증할 수 있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했다.

엄마의 외래 진료 날 보험사정인과 함께 담당 교수님을 찾아갔다.

엄마를 맡은 교수님은 백발에 안경을 쓴 지적인 이미지의 전형적인 의사상(像)을 갖춘 분이었다.

말투에 다정함이 느껴졌고, 궁금한 것을 물어보면 설명을 자세히 해주셨으며

엄마 상태를 세심히 살펴주셔서 감사했는데, 막상 부탁을 드리려니 민망하고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니었다. 걱정과 달리 보험과 관련된 사정을 말씀드리고 소견서를 부탁드리자 귀찮아하지 않으시고 흔쾌히 써주셨다. 그것도 재킷에서 만년필을 꺼내어 손수 적어 주셨다(지금도 떠올리면 정말 감사하다).

그 정성 덕분인지 보험사에서도 결국 보험금을 지급해 주었다.

‘보험금 지급 거절 사건’은 나에게 꽤 중요한 걸 일깨워주었다.

세상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고 오히려 기만하기 쉬우며,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라는 그 말이 정말 맞는 말이라는 걸. 그걸 일깨우고 얻어낸 나만의 작은 승리였다.


엄마가 아프니까 그걸 극복해 내기 위해서라도 나머지 가족들이 조금씩 희생해야 하는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가족이니까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할 수 있길 바라는 건 너무 큰 기대였을까.

특히 아빠와의 관계는 점점 나빠졌다.

사실 내가 어렸을 때부터 엄마와 아빠가 자주 싸우긴 했지만,

아빠가 직장을 옮겨 다니며 주말부부 생활을 하면서 그나마 같이 덜 지낸 덕에 덜 싸웠는데

문제는 아빠의 은퇴 후에 일어났다.

남자가 은퇴하면 ‘삼식이’ 소리를 들으며 부부 사이가 냉랭해진다던데,

엄마와 아빠는 같이 살다 보니 예전과 다름없이 여전히 뜨겁게 싸웠고 때로는 예전보다 더한 것 같기도 했다. 언젠가 집에 갔더니 현관에 무슨 자국이 있어 엄마에게 물어보니

아빠와 싸우다가 화가 나서 식탁에 있던 대봉시를 집어던져 생긴 자국이라고 했다.

엄마 아빠는 그런 사이였다. 가까이하기엔 너무 먼 당신.

그래도 엄마가 아프니까 아빠는 보호자 노릇을 하며 좀 달라지겠거니 했는데, 역시 섣부른 기대였다.

데면데면했던 아빠와 내 사이도 멀어지고 가끔 싸우기도 했다.

엄마가 아프니 원래도 부실했던 가족 관계가 더 흔들리고 조금씩 붕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다.


2020년 9월 20일

병원에서의 시간이 점점 길어져만 간다. 금방 입원했다 퇴원할 수 있으리란 기대가 아주 많이 빗나갔다. 희망이 또 하나 저물었다. 열이 떨어지지 않고 염증 수치가 높아 며칠째 항생제만 맞고 있는데, 원인을 확인하려고 찍은 CT 결과가 좋지 않다. 그 독한 항암제에도 망할 암세포는 엄마의 몸속 장기들을 점령해 가고 있었다. 교수님에게서 들은 이야기가 다시 눈앞을 멀게 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암담하다.
아버지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일 테지만, 같은 상황을 마주해도 절박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당연하다는 듯 아주 태연해 보인다. 야구도 당구 경기도 잘 보고 테니스 치러 가는 것도 여전하다. 내가 토요일에 집에 다녀오느라 엄마 옆자리를 비웠을 때 하필 교수님이 왔다 가셨다. 그때 나 대신 있었던 아빠는 멀뚱멀뚱 아무 말도 없었다는 이야기에 답답해서 “괜찮냐고 뭐라도 물어봤어야지!” 말했더니 도리어 내게 역정을 냈다. 교수가 먼저 이야기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며, 본인은 의학 지식이 아무것도 없는데 뭘 어떻게 하냐며 화를 냈다. 역시 그러면 그렇지. 기대도 없었지만 상대하자니 내 기운만 빠지고 나만 속상할 뿐. 이럴 땐 맞대응해봐야 소용이 없다. 화내는 아비에게 냉정하게 상대해야 하는 법. 세상 차가운 딸년이 되어주마. 꼴 보기도 싫다. 아빠 없는 곳에서 한바탕 욕을 해주었다.
너무 빨리 항암제 내성이 찾아온 것 같다. CT에서 림프절에 있는 암 덩어리가 그대로 보인다며... 항생제를 계속 쓰는 상황에서 항암을 그대로 진행할지, 완화해서 안전하게 치료를 할지 방향을 정해야 할 것 같다고 하셨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엄마의 시간을 어떻게 보낼지 내가 감히 어떻게 정할 수 있을까. 나중에 정말 한참 뒤에 엄마의 의식이 흐려졌을 때는 어쩔 수 없이 내가 대신 선택하게 될진 몰라도... 아직은 때가 아니다.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항암제는 아프면 맞는 수액처럼 언제든 맞을 수 있는 줄로만 알았는데,

약이 워낙 독한 탓에 어느 정도 몸의 상태가 괜찮아야지만 맞을 수 있었다.

원래는 3주 간격으로 맞는 항암제를 계획된 일정대로 맞은 적이 없었다.

어떨 때는 열이 나서, 어떤 날은 간 기능 수치가 기준보다 높아서 투약이 미뤄졌다.

나는 초조해졌다. ‘그래도 괜찮겠지’ 기도하면서도 떨렸다.

제발 항암제가 효과를 발휘해 주길, 조금이라도 함께할 시간을 늘려달라고.

하지만 안타깝게도 독한 항암제는 소용이 없었다.

지독한 암이 이겼다.

작은 승리가 무색해지는 완벽한 패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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