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서서히 가라앉는 중입니다. 끝없이 깊은 곳을 향해
2020년 7월, 계절은 한여름인데 마음은 차디찬 한겨울 같았다.
엄마가 처음 입원한 병원에서 담당 교수님으로부터 엄마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을 때도
어쩌면 그럴 리 없다고 부인하고 있었다.
조직검사 결과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최종 확인 도장 같은 것이었다.
사진으로 보이는 그 덩어리가 암이라고. 진짜라고.
심한 염증일 수도 있고, 양성 종양일 수도 있을 텐데.
논문 중에 그런 것도 찾아봤던 것 같다.
CT만 보고 암으로 오판하는 경우에 대한 논문.
‘의사도 사람인데 실수할 수도 있지. 실수라면 엄청나게 놀라긴 했지만, 암이 아니라면 그 정도 실수는 너그러이 이해해 줘야지. 의료사고라고 소송도 안 걸고 그냥 다행이라고 괜찮다고 넘어가 줘야지.’
하지만 조직검사 결과를 받기 전에 했던 PET-CT 검사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엄마의 몸 곳곳에 퍼진 암이 심각한 상태라고,
아무리 현대 의학이 발전하고 어쩌고 해도 엄마를 낫게 할 방법이 별로 없다는 것을
되풀이해서 알려줄 뿐이었다.
진단서에 쓰인 낯선 낱말. (주상병) ‘담낭의 악성신생물’
무슨 자연사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말이었다.
그게 암이라니. 그것도 우리 엄마의 몸속에 있다니.
담낭, 우리말로는 쓸개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 암은
간으로 쓸개즙을 보내는 담도와 간에도,
저 멀리 부신이라는 장기(생물 시간에 부신피질 호르몬 어쩌구 할 때나 들어봤지, 몸에 부신이라는 기관이 어디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에도,
심지어는 폐에도 퍼져있었다.
병원에서 내리는 기준으로는 담낭암 4기, 흔히 ‘말기’라고 하는 상태였다.
믿을 수 없다는 말을 그동안 너무 쉽게 썼나. 그래서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을 나에게 주는 걸까.
이걸 지금 나더러 어떻게 믿으라고 하는 것인지, 갑자기 며칠 새 이러는 게 어디 있나.
믿을 수 없었고 믿기지 않았다.
‘암’이라는걸 알게 되자마자 뭘 할 새도 없이 끝나면 어쩌나 하는 절망감에 휩싸였다. 앞이 보이질 않았다.
나는 기관지가 약해서 감기에 잘 걸렸고,
말을 많이 하며 때로는 소리도 지르는 직업을 가진 사람답게 인후염을 앓아누울 때면
‘그렇게 빌빌대서 무슨 일을 하겠냐?’며 엄마에게 비아냥을 듣곤 했다.
잔병치레 없던 엄마였기에, 엄마도 아픈 적 있지 않았냐며 따져 묻지도 못했는데. 그런데 암이라니.
아니, 차라리 자잘하게 계속 아프기라도 했으면 이해가 쉽겠는데, 아팠던 적 없던 엄마가 말기암 환자라고?
하루아침에??
암 진단을 전하는 건 교수님께서 잘해주셨지만,
차마 내 입으론 엄마에게 당신의 몸 상태가 어떻다는 걸 제대로 말해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괜히 놀라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더 상태가 나빠질까 봐, 모든 것을 포기할까 봐,
금방 엄마가 잘못될까 봐 말할 수 없었다.
나 혼자만 끙끙 앓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엄마는 다행히 교수님 말씀 덕분인지 병을 잘 이겨내 보려고 애쓰는 것이 보였다.
입맛이 없지만 밥도 먹고, 담즙을 빼내는 주머니(바일백)가 불편하지만
병원 건물 안에서라도 수액 걸이를 밀며 조금씩 움직여보기도 하고.
“의사 선생님이 계속 앉아 있거나 누워있기만 하면 안 좋대. 조금씩이라도 움직여야 빨리 낫는대.”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몰래 숨어서 아랫입술을 깨물며 혼자 끅끅거리고 울었다.
너무 울면 눈도 코도 빨개지니까 진짜 조금씩.
천장 쳐다보며 손바람으로 눈가를 적신 눈물을 말릴 수 있을 만큼만, 딱 거기까지만.
두 번째 병원을 무한신뢰하는 엄마와는 달리 나는 그 병원을 이유 없이 불신하고 있었다.
사실 처음 병원은 지역에 있는 병원이고 규모가 작으니 어떤 검사나 시술이 안 되는 게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두 번째 병원은 서울에서 나름 큰 병원이었는데도 첫 병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괜히 믿음을 잃었다. 우리나라에서 병원으로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S병원과 SV병원 진료를 엄마 이름으로 예약하고,
검사 결과지며 CT 이미지를 담은 CD 등을 챙겨 대리 진료를 보기로 했다.
당연히 엄마에게 이야기했더니 엄마는 펄쩍 뛰었다.
무슨 소리냐며, 뭣 하러 쓸데없이 다른 병원에 가서 발품을 파냐면서 잠자코 있으라고 잔소리를 했다.
하지만 엄마 말 듣고 한 귀로 흘리는 데는 이미 도가 텄고
이건 엄마와 협상할 여지가 없는 문제였다. 한시가 급했다.
가장 빨리 진료를 볼 수 있는 일정을 잡고, 예약한 날짜에 맞춰 몰래 병원으로 향했다.
처음 찾아간 병원은 신촌에 있었다. 병원을 가다가 문득 옛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내가 대학 입시를 준비하던 때만 해도 2호선 대학교에 입성하는 것이 대부분 아이들의 꿈이었고,
나 또한 마찬가지여서 (비록 수능을 망쳤지만) 점수에 맞춰
담임선생님이 추천하는 한 대학 간호학과에 정시모집 지원을 했다.
어차피 교대는 정해진 옵션이니까 나머지 두 군데는 내 뜻대로 소신 지원하겠다며
엄마와 상의도 안 하고 지원한 상태였다.
사실 간호사가 되고 싶은 건 아니었고, 그냥 학교 간판만 보고 지원한 거였는데,
엄마에게 나중에 말했다가 또 된통 잔소리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엄마: 너 미쳤니? 간호사가 얼마나 힘든 건지 알기나 해?!! 3교대로 밤잠도 못 자고 일해야 하고, 환자 상대하는 건 또 얼마나 힘든데, 도대체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으이구... 진짜 못 살겠다. 아주 제멋대로 하는 건 선수야...
나: 아니, 어차피 나는 거기 갈 생각도 없고, 담임선생님이 써보라길래 쓴 거야. 그리고 학교도 좋잖아. 원서 쓰는 것도 내 맘대로 못 해? 다른 집 엄마들은 원서 쓰는 것 때문에 학교도 오고 그러던데, 엄마는 아무 말도 없어서 내 맘대로 해도 되는 줄 알았지.
엄마: 아니 그래도 간호과는 아니야. 무슨 사서 고생을 하려고 그래? 너 진짜 붙으면 거기 갈 거야?
나: 가긴 뭘 가. 그래도 일단 써보고 싶었어.
수능을 보고 논술 시험이 있어서 아빠 차를 타고 엄마와 셋이 그 대학에 갔던 기억이 났다.
캠퍼스가 참 예뻐 보였고, 잠깐 이 학교에 다니는 내 모습을 상상해 보았던 것 같다.
‘강의 시간에 맞춰 부지런히 그 아름다운 캠퍼스 안을 걸어 다니고, 축제도 즐기고, 시험 때면 도서관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하겠지.’ 그런 꿈을 잠시 꾸었다.
논술 시험은 너무 어려웠는데 (내가 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은 탓이겠지만) 처음 읽어보는 지문 내용에 대해 나름 내 생각을 정리해서 열심히 썼고, 지친 얼굴로 나온 나를 엄마 아빠가 맞아주었던 (내 기억 속에 몇 안 되는 아름다운) 기억이 있다.
운이 좋게도 그 대학에 합격했지만, 합격 공지와 등록금 고지서만 뽑아보고 아쉽게 작별했던 기억이 난다.
십 년이 훌쩍 지나 그때 기억을 떠올린 건
엄마가 암에 걸리고 하필 그 대학의 병원을 예약하며 다시 신촌을 찾게 된 까닭이었다.
내가 그때 갑자기 간호대 가겠다고 나도 서울 간다며 그곳에 진학해서 간호사가 되었다면,
엄마가 아플 때 병원 걱정도 안 했을 테지.
아픈 사람을 간호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이지만 엄마를 돌보는 게 훨씬 수월했겠지.
종합 건강검진도 큰 병원에서 시켜줬으면 이 지경까지 안 왔을지도 모르고...
‘만약에’로 시작하는 많은 일들이 스쳐 지나가며 문득 후회되기도 했다. 물론 쓸데없는 후회였지만.
등록금이 비싸기로 손꼽히는 학교의 병원이어서 그런지 병원도 으리으리했다.
본관 건물 외에 암병원도 규모가 꽤 컸는데,
병원이 백화점이나 큰 쇼핑몰 같은 느낌을 주었고 돈을 많이 들고 가면 웬만한 병은 다 낫게 해줄 것만 같은 환상을 심어주는 곳이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병원에서 받은 자료를 타 병원 자료 입력 창구에서 접수하고 진료 순서가 오길 기다렸다.
십 분이나 십오 분쯤 걸렸을까. 자료를 보는 교수님의 반응은 너무 냉담했다.
이미 가망이 없는 상태라서 굳이 여길 와도 별다른 치료 방법이 있는 것이 아니며,
가까운 곳에서 치료받는 것이 좋겠다. 대충 이런 말을 들었다.
집에서 원주에 있는 병원(SV병원 계열)이 가까운데 거기서 치료를 받고
다른 조치가 필요할 때는 SV병원으로 전원도 가능한지 물었더니,
가능은 하겠지만 그것도 애써 그럴 필요가 없을 거라는 이야길 들었다. 마음이 또 한 번 ‘쿵’하고 내려앉았다.
그래도 대리 진료를 무조건 거부하는 곳도 많은데 진료라도 봐준 게 어디냐 싶었다가,
그렇게 냉소적으로 말한 것이 화가 났다가,
일말의 기대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자 나는 또 한 번 무너졌다.
그 병원은 최신 암 치료 기술인 중입자 치료가 가능하다고 해서 잔뜩 기대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중입자 치료는 엄마의 암종에는 적용되지 않는 방법이라 애초에 불가능했다)
이렇게 차갑게 거절당하다니 비참했다.
동생과 다른 병원을 몰래 알아보고 상의하다가 예약했던 S병원에 가도 비슷한 말을 듣겠다 싶었고,
결정적으로 대리 진료가 절대 불가하다는 이야길 듣고 나서 다른 병원 알아보기를 멈추었다.
대신 엄마와 같은 담낭암, 또는 담도암 환우 카페에서
여러 치료법이나 좋은 교수님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는 글을 탐독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사실 엄마 대신 내가 대리 진료를 봤던 날은 엄마의 59번째 생일이었다.
엄마 생일은 7월 27일인데 6월부터 엄마 생일까지 꼬박 한 달쯤을 병원에 있었다.
생일마저 병원에서 보내게 된다니 속상했다.
병원에서 한 아름 서류를 가져갔지만,
아무런 소득 없이 다시 터덜터덜 엄마가 있는 병원으로 돌아오는 길에 엄마의 생일인 게 뒤늦게 떠올랐다.
다○○에 들러 작은 고깔모자와 케이크를 샀다.
조용히 케이크에 초를 꽂고 노래도 불러주고, 안아드리려다가
엄마가 “갑자기 왜 안 하던 짓을 하냐?”라며 내 팔을 뿌리쳤던 것 같다.
‘오늘 나는 뭘 해도 안 되는 날이구나’ 싶었다.
엄마의 생일이라 기쁜 마음으로 축하해주고,
엄마 병을 낫게 할 방법을 찾았다며 환호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뭐 하나 되는 것 없어서 많이 울적했던 날이었다.
입원한 지 한 달이 넘어가니 집에서 멀리 떨어져 간병하는 것도 힘에 부치기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항암을 시작하려면 환자를 위해서도 집에서 가까운 곳이 좋을 거라는 조언에 따라
처음 입원했던 지역의 작은 C병원으로 옮겨 통원 치료를 받기로 했다.
동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넷이 집으로 가는 길엔
한여름이라 무성하게 자란 나무들이 한껏 초록빛을 발하고 있었고,
엄마는 그 풍경을 보며 드라이브하는 기분이라고 집으로 가니까 좋다며 조금 들떠 보였던 것 같다.
그렇게 넷이 다 같이 차를 타고 가는 건 정말 오랜만이었던 것 같다.
그게 하필이면 암 선고를 받은 병원에서 퇴원하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는 게 참 슬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