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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리파토스 Jan 06. 2022

二色國. 두 개의 색만 존재하는 나라

백신 한방으로 내 정체성이 규정되는 놀라운 경험.


내 이름은 빨강. 

오르한 파묵의 소설 <내 이름은 빨강>을 이야기를 하려는 게 아니다. 뭐 비슷한 맥락이 아예 없지는 않지만. 






초등학교 시절. 아니 나는 국민학교 시절이라 해야겠구나. 어쨌든 내가 어릴 적에는 반공 포스터를 많이 그렸다. 미술시간 내내 북한군 때려잡는 그림을 그리고 그 실력을 모아 반공 포스터 대회를 했다. 어느 날 선생님께 물었다. 그래도 같은 민족인데 꼭 이렇게 무섭게 그려야 하느냐고. 선생님이 목소리를 낮춰 말씀하셨다.

 

"쉿 그런 말 하면 빨갱이 된다." 


처음 빨갱이란 말을 들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친구의 언니가 서울대 학생이었는데. 우리를 앉혀놓고. 광주항쟁과 87년 민주화 운동을 설명해 주었다. 지금은 교과서에도 나오는 역사지만 그때(88년)는 금기어였다. 금기어 인지도 모르고 배운 대로 집에 가서 부모님께 아는 척을 하며 말씀드렸다. 그거 아시냐고. 광주사태가 아니라 광주 민주화 항쟁이라고.


그날 밤, 쫓겨날 뻔했다. 나보고 빨갱이란다. 그날 이후로 잠시 동안 그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나는 그럴수록 부모님 눈을 피해 근현대사 공부를 더 가열차게 해댔다. 결국은 역사로 밥벌이하는 사람이 되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참 교육을 외치는 전교조가 결성되었고 거기에 가담한 선생님들이 줄줄이 해직되었다. 대부분 권위적이지 않고 학생들과 소통이 잘 돼서 인기가 많은 젊은 선생님들이었다. 그런 분들이 수업시간에 끌려 나가기도 하고. 혹은 소리 소문 없이 학교에서 하나 둘 사라지기도 했다.


선생님들의 해직을 막으려 전교생이 운동장에 모여 수업을 거부한 적도 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지금의 전교조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89년 전교조 선생님들은 하나같이 학교 비리와 학생들의 인권을 말씀하시던 분들이었다.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적극적이었다. 정치는 모르지만 시비 정오는 분간할 나이는 되었으니까 그분들께 동의하는 바가 컸다. 그랬더니 친구들과 부모님이 또 나보고 빨갱이 짓 하지 말고 공부나 하란다. 


대학 때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었더니 또 빨갱이란다. 참 일관되게 뚝심 있는 네이밍이다. 역사학도들에게는 음지의 필독서였고. 지금은 고전의 반열에 오른 책인데 말이다. 숨만 크게 쉬어도 빨강이 되는 세상이었다. 



그래, 이념적으로 날카롭게 대립했던 냉전체제의 후유증이라고 치자. 분단국가의 상처 때문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90년대 초였으니까 빨강에 대한 알레르기가 아직까지는 심했을 거다. 오른쪽 끝에 있는 분들도 다 그만한 이념적 명분이 타당했으리라 본다. 그렇게 내 이름은 빨강이 되어가고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의 10년이 지나가고 나는 또다시 광우병 사태와 노란 리본 그리고 박통 탄핵정국에서 촛불을 들었다. 나꼼수 시절부터 뉴스공장까지. 두둑한 뱃살과 지저분한 수염도 안 보이게 할 만큼 섹시한 뇌를 가진 참 언론인을 애정 하며 독립운동하듯 팟캐스트를 구독했다. 언론의 공정성을 염원했다. 기울어진 운동장의 균형을 조금이라도 잡아보고 싶었다. (요즘도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진 건 변함이 없다는 게 팩트)


하!  냉전이 끝난 지가 언젠데 그런 방송을 듣는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에게 저쪽의 그들은 여전히 참 일관되게 색칠을 해댄다. 이 얼마나 바위같이 흔들림 없는 우직한 신념이란 말인가!!


그래 이제는 뭐. 그냥 내 피는 빨간색이니까 이상할 것도 없었다. 반골기질이 팔자려니 했다. 그렇게 내 이름은 빨강이었다. 오른쪽 끝에 있는 분들이 나 같은 사람에게 평생을 그리 불러주었다.


정권교체가 되고 이제는 좀 사람이 먼저인 세상이 오려나 기대했다. 나는 이 정부를 지지하니까 적어도 색칠당하며 손가락질은 안 받겠지 생각했다.





백신 비접종이 준 선물 : 극우 

예상치 못한 선물이 도착했다. 사람이 먼저가 아니라 제약회사와의 계약이 먼저인 세상이 되었다. 백신이 처음 나올 때부터 의아했다. 벌써 만들어졌다고? 임상도 안 끝난걸 우리에게 맞힌다고? 믿어지지 않았으나 전 세계가 두려워하니 정부로서도 어쩔 수 없는 판단일 거라 생각했다. 그러다가 곧 멈출 거라 생각했다. 내가 믿고 있던 대통령은 합리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사람이 먼저라고 했던 분이니까. 어준이 오빠도 진심은 아닐 거야. 정치적 판단일 거야. 노래 가사처럼 나는 절규하고 있었다. 


“이게 진짜일리 없어~~~~”


현실을 부정하며 그렇게 일 년이 또 지나갔다. 나는 정신을 차려야 했다. 내 이름이 바뀌어 있었으니까.


내 건강 내가 지키고 싶어 백신을 안 맞았더니 “같은 류”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이 갑자기 나보고 반정부 극우 보수 꼴통이란다. 왼쪽에서 얼쩡대지 말고 꺼지랜다. 허 참. 내 평생 처음 들어보는 참신한 정체성이다. 이 얼마나 아메바적이고도 단순 명료한 해석인가!!!!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나는 완전히 오른쪽으로 밀려나지도 못했다. 백신 반대 커뮤니티에서 백신만 논하면 될 것이지 극심한 인신공격과 비하 발언을 동반한 인격모독이 난무하였다. 때는 이때다 싶어 물어뜯을 거리가 생긴 사람들이 백신과 박근혜 사면을 묶어 과거 정치 세력들의 부활을 꿈꾸고 있길래 


 어허 형제자매님들 수준 떨어지는 초딩적  발언은 삼갑시다” 


했더니 빨간 애가 왜 여기서 얼쩡거리냐며 댓글 알바 중인 거냐 프락치냐 분탕질하러 들어왔냐며 또 꺼지랜다. 아~~~ 너무 재밌다. 유아적이며 천진난만스러움이 솜사탕처럼 둥둥 떠다닌다. 지금 생각해보니 진짜로 내가 상대한 사람이 초딩일지도 모르겠다. 그러지 않고서야. ㅎㅎㅎ


핵폭탄급 코미디다. SNL 보다 더 재밌어. 완전 동심의 세계다. 

 

생각이 어쩜 이렇게까지 간결한지 아주 깔끔해 그냥. 

군더더기가 없어.


맞으면 빨강  안 맞으면 안빨강

(오른쪽 애들은 색을 수시로 바꿔서 상징적인 색이 안 떠오른다)


맞으면 친정부 안 맞으면 반정부

맞으면 좌파 안 맞으면 우파

맞으면 진보 안 맞으면 보수

맞으면 친문 안 맞으면 박X혜 사면


무조건 내편 아니면 적 밖에 없어. 

뭐 이렇게 원시적이고 순수해. 아주 귀여운 생명체들이야. 원더랜드~~


정말 놀랍지 않은가? 이런 생각은 정치인들만 하는 줄 알았는데. 인종 다양성도 인정되고 생물다양성도 인정되고 심지어 성소수자도 인정받는 마당에 백신 거부자는 곧 우주 미아가 될 판. 


백신이 나의 호모 폴리티쿠스의 본능을 일깨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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