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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아들과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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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페리파토스 Jul 31. 2023

아주 사적인 갱년기

가장 어리석은 감정 "후회". 그것으로 가득 찬 나의 이력서.

이전에 없던 습성이 생겼다.


요즘엔 브런치 글보다 그 글을 쓴 작가 소개를 더 유심히 본다.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들이 참 많기도 하다. 브런치는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글을 쓰는 공간이고  좀 더 기회가 필요한 사람들의 공간이라고 생각했다.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들은 등단을 하던지 각종 매체를 통해 이미 본인을 알릴 기회가 얼마든지 있을 것이기에 적어도 글로써 자신을 표현하는 방법 외에 별다른 기술이 없는 이들에게 마지막 등용문 같은 곳이라 생각했다.


소박한 나의 바람이 무색하게 브런치 작가들의 경력은 실로 화려하기 그지없다. 다른 사람 살아온 이력이나 경력에 크게 반응하지 않던 내가 갑자기 예민스럽게 그 부분만 집요하게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이다. 전에 없던 타인과의 비교를 하기 시작했다. 드디어 미쳐가는 건가.


어떤 작가는 경력소개가 스무 줄이 넘는다. 그러고도 자세한 이력은 홈페이지를 참고하란다. 여러 작가의 소개글과 이력 및  경력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또 주책맞은 나의 갱년기 호르몬이 콸콸 쏟아지면서 우울세포와 불안세포들을 깨웠다. 결국은 초라한 나의 이력서를 소환했다.


18년 입시전문 사교육 강사.

누군가는 "우어~~~" 하는 탄성이 나올 수도 있으나, 잠시 넣어 두시라.

18년. 그나마 그 시간 대부분은 "잠시 머무르는 직업"이라며 강사로서의 정체성을 부정했고, 늘 마음속에 다른 꿈을 좇느라 그저 "열심히"는 했으나 "제대로" 일에 미쳐본 적 없다. 서양사를 전공한 나의 꿈은 세계문화유적지 여기저기를 찾아다니다가 학자로서 생을 마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과거 인류의 흔적들을 찾아다니다가 마음이 머무는 어느 작은 도시에서 읽고 쓰며 살아보는 것. 그것이 논문이 될지 소설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어쨌든 내가 보고 듣고 알게 된 것들이 내 이름을 달고 세상에 알려지기를 꿈꾸었다.

시오노 나나미처럼.


나이 60이 넘어 할머니 소리를 들을 때 쯔음에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예쁜 성이 내려다 보이는 작은 집에서 역시나 소설일지 논문일지 모를 글들을 읽고 쓰다가 노후를 마감하는 것이었다. 그곳이 그리스 어느 섬이기를, 멕시코 어느 해변이기를, 파리의 오래된 아파트이기를. 그곳에서 테르모필레 전투를 상상하고 , 카이사르와 사랑에 빠지고, 마추픽추로 떠날 짐을 꾸리는 것을 꿈꾸었다.


젊은 시절 그때의 나는 왜 훌쩍 유학을 떠나지 못했을까... 태생적 흙수저라는 것도 핑계 중 하나였지만, 아마도 가난한 뮤지션 (전)남편을 대신해서 가장 역할을 해야 하는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을 테지. 그 남자의 딸을 돌봐야 한다는 어쭙잖은 책임감 때문이었을 테지. 난 그것이 사랑이라 믿었고, 가족이라면 마땅히 함께 짊어져야 할 역할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함께'가 아닌 '혼자' 그 짐을 지고 있었고, 나는 사랑이었으나 그에겐 현금지급기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알기까지 10년이라는 세월에 비싼 수강료를 지불해야 했다.


스물아홉 겨울,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난 기꺼이 내 꿈을 봉인하고

그의 가장이 되기로 결정했다.

어리석고 부끄러운 이력이 시작된 것이다.  



학원계에서 꽤나 실력 있다는 소리도 종종 들었으나 이 바닥에서 성공해 보겠다는 욕심은 1도 없었고, 그저 가족을 부양해야 하는 생계수단이니까 성실하게 열심히는 뛰었다. 평달에 버는 돈은 (전)남편을 대신해서 생계를 꾸리고, 그 뮤지션의 대학원비와 품위유지비를 대느라 다달이 소진되었다. 그나마 생활비 외에 목돈이 손에 쥐어지는 건, 아침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잠자는 시간 빼고 18시간 이상 혓바닥에 쥐가 나도록 수업을 해야 하는 방학특강 때였다. 그렇게 목돈이 생기면 겨우 겨우 시험기간을 피해, 특강을 피해, 일주일이나 열흘 정도 수업을 비우고 타지마할을 보러 루브르를 만나러 앙코르 와트를 탐닉하러 떠날 수 있었다. 철없는 그 뮤지션은 나의 유적답사를 매번 빼놓지 않고 해맑은 뇌를 탑재한 채 쫓아다니며 행복해했다. 재즈 뮤지션에게 일 년에 두 번씩 하는 해외여행과 유적답사는 지적 페로몬을 충전시키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였고, 여권에 찍히는 도장이 늘어날수록 더 많은 암컷들을 유혹할 무기가 다채롭게 채워지는 일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내가 또다시 생활비와 답사비를 벌기 위해 일터에 묶여 있을 때, 가난한 뮤지션은 우아한 지적 페로몬으로 치장한 공작털을 촤라락 펼치고는 화려한 손놀림으로 피아노를 치며 암컷들을 후려대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이 반쯤 나간 암컷들을 옆에 끼고 타지마할을 노트르담성당을 무라카미 하루키를 쏟아내기 시작하면 열이면 둘셋은 나머지 정신줄도 놓아버리고 그림자 스폰서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결혼생활 10년쯤 지나서 그 암컷들 중 몇몇과 깊은 정분을 나누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고, 난 그 뮤지션에게 그저 합법적인 스폰서이면서 그의 딸을 키워 줄 보모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난 그 뮤지션을 버렸고, 아내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꺼이 그의 세컨드 와이프 역할을 해준 해금 연주자에게 그를 양도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뮤지션을 양도받을 수 없었다. 이미 법적으로 남편이 있는 일명 '유부녀'였으며, 지역사회에서 꽤나 유명한 인사였기 때문이다. 살면서 이런 추잡스러운 치정 드라마에 내가 얽히게 될 줄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으랴...


그 이후 내 이력은 홧김에 서방질하는 심정으로 아주 가볍게 친구처럼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그렇게 결혼까지 가서는 안 되는 거였지만, 나한테 손 벌리지 않고 "제 밥벌이는 할 수 있는 남자"라는 장점 하나만으로 두 번째 청혼을 받아들이고 만 것이다. 마흔두 살에 아이를 낳아 엄마가 되었고, 팔자에 없는 자영업 사장님이 되었다. 선생님, 원장님 소리를 18년 동안 듣던 나는 사장님 호칭이 다소 낯설었지만, 뭐든지 열심히 부지런히 하는 나는 또 그 일을 그럭저럭 해 냈다.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열심히 한다는 것이 곧 성공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뭔가를 팔아본 적이 없는 나는 지금도 이 일이 나의 업인지 아닌지 확신이 서지 않을 때가 많다. 어여어여 사업이 목표지점에 다다르고, 아이도 더 이상 내 돌봄이 필요 없어지면 하루빨리 이 울타리들을 벗어나 마추픽추에서 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기를 희망할 뿐이다.


몸이 있는 곳에 마음이 함께 있지 않아서 그런가.

사업에 소질이 없어서 그런가.

뒤늦게 엄마로 사느라 그런가.

제대로 일에 미친다는 게 힘에 부친다.  


더더욱 아들이 초등학교 입학 후에는 학교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시도 때도 없이 받게 되는 일이 많아져서 일은 우선순위에서 자꾸 밀려났다. 일보다 아이가 우선이기 때문인 것도 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일과 육아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감당하기가 어려워진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아들의 ADHD는 정신과 질환이 아니라 그저 다양한 신경세포를 가진 독특함이라고 믿고 시각을 달리하니 별 문제될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저 그런 범생이로 사는 것보다 인생이 더 버라이어티 하겠거니 했다. 뭘 해도 제 이름 석자를 그럴듯하게 날릴 놈이거니 했다. 심지어 천재라는 착각이 드는 순간들도 많았던 아들바보였다.


하지만 요즘은 특별한 일이 아닌데도 자꾸만 아들과 부딪힌다. 서로 언성이 높아진다. 두렵다. 아들과 멀어지게 될까 봐, 아들을 미워하게 될까 봐. 그러다 보니 사업은 자꾸 관심밖으로 밀려난다. 잘 될 턱이 없다. 그럴듯한 이력이 만들어질 리가 없다. 아들의 ADHD가 아니라 나의 갱년기 때문이라고 자꾸 핑계를 대보려는데 그 또한 너무 성의 없어 보인다. 그냥 일이 하기 싫은가 보다.


뭐 이리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이력이 다 있을꼬. 한 순간도 대충대충 어영부영 살아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아무것도 남은 게 없지?


불면증

안면 홍조

특정 대상을 향한 짜증.

등등의 갱년기 증상에 덧붙여

나에게는 한 가지 증상이 더 있는 듯하다.


짙은 후회.
그 옛날 어리고 어리석었던 나의 선택들.



시시때때로

내 삶이 온통 초라하게 보인다는 것.

분명 그렇지 않을 구석이 많을 텐데

그냥 하염없이 보잘것없는 인생처럼 느껴지는 것.

자꾸 하염없이 내 선택에 후회가 밀려오는 것.

안 되는 줄 알면서 자꾸 다른 삶을 꿈꾸는 것.

세상의 모든 긍정 언어를 쓰레기통에 쳐 박고 싶은 것.

아직 엄마의 도리를 더 해야 함에도 자꾸만 혼자 있고 싶은 것.


가장 바보 같은 감정이 "후회" 라던데

가장 미련한 사람이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는 거라던데.

나는 나의 30대가 너무 아까워서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느라

지금 또 같은 실수를 하려 하는가.


아직 어린 10살 아들을 위해 포커페이스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갱년기는 그딴 사정에 얄짤없다.


마음을 다잡아 보지만,

왜 과거와 다르지 않은 선택을 하게 될 것만 같은지.


남들이 뭐라 해도 내 삶에 만족하고 나름 대견해하며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근거 없이 긍정적이었다. 쥐뿔 가진 것 없어도 어디서든 당당했고, 세상이 날 속여도 내 미래는 반드시 반짝반짝 빛날 거라 믿었으며, 무수한 태클에도 굴하지 않고 오뚝이처럼 굳건하던 나였다. 온통 먹구름 띤 현실도 아들을 동력 삼아 더 건강하게 더 젊게 더 기운차게 살고 싶던 나였기에,


다른 작가들의 이력을 기웃거리며

지금의 이 초라해진 감정을 설명할 길이 없어

애꿎은 갱년기에게 그 핑계 같은 이유를 찾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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