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타부리 | 4
차오프라야 강을 따라 논타부리 쪽으로 올라가다 보면 지도에 크게 표시되지 않은 작은 장소들이 하나둘 나타난다. 관광객이 붐비는 유명한 사원이 아니라 그저 동네 사람들만 오가는 조용한 강변 사원들이다.
왓 꼬 파야 쳉 (Wat Koh Phaya Cheng)
수난타 왕비 기념관 (Queen Sunantha Memorial)
그리고 왓 꾸 (Wat Ku)
세 곳 모두 태국 역사 속 한 사건과 연결된 장소들이다.
그리고 그 사건은 태국 왕실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 남아 있다.
1880년 차오프라야 강에서 일어난 왕비의 죽음이다.
왓 꾸는 논타부리 강가에 자리한 사원이다. 처음 가보면 특별한 느낌은 없다. 관광 명소라기보다는 그저 평범한 동네 사원에 가깝다. 하지만 이곳에는 조용히 세워진 건물 하나가 있다. 수난타 꾸마리랏 왕비를 기리는 기념 건물이다. 태국의 라마 5세, 즉 출랄롱꼰 왕의 왕비였던 인물이다.
태국 역사에서 라마 5세는 노예제 폐지와 행정 개혁을 추진하며 나라를 근대 국가로 바꾸기 시작한 왕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에게도 지우기 어려운 개인적인 비극이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이 바로 수난타 왕비다.
수난타 왕비는 왕실에서 태어난 공주였다. 그리고 매우 어린 나이에 라마 5세의 왕비가 되었다. 사고가 일어난 당시 그녀의 나이는 겨우 19세였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녀가 혼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왕비 곁에는 어린 딸이 함께 있었고 왕비의 뱃속에는 다섯 달 된 아이가 있었다.
세 생명이 한 배에 타고 있었다.
1880년 5월.
왕비 일행은 방콕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방파인 왕궁 (Bang Pa-in Palace) 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당시 왕실 이동은 여러 척의 배가 함께 움직이는 일종의 왕실 선단 형태였다.
왕비의 배는 호위선들과 수행선 사이에서 차오프라야 강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예상하지 못한 사고가 발생한다.
왕비가 타고 있던 배가 갑자기 균형을 잃고 뒤집힌 것이다. 왕비와 어린 공주는 강물 속으로 떨어졌다.
사고는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났고 강 위의 선단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그리고 그 결과는 너무도 비극적이었다. 왕비와 공주는 끝내 구조되지 못했다.
이 사건을 이야기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다.
“아무도 왕비를 구하지 못했다.”
그 이유로 자주 언급되는 것이 몽티엔반 궁중법 (Kot Monthien Ban) 이다.
이 법은 왕실 질서를 규정한 궁중 규범이다.
왕족에게 함부로 접근하거나 몸을 접촉하는 행동은 엄격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오래도록 이 사건은 이렇게 전해져 왔다.
왕족의 몸을 만지면 처벌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왕비를 구하지 못했다.
이 이야기는 태국에서도 꽤 널리 알려진 전설 같은 설명이다.
하지만 현대 역사 연구에서는 조금 다른 시각도 제시된다. 사고 자체가 매우 갑작스럽게 발생했고 차오프라야 강의 물살도 강했으며 현장 상황 역시 혼란스러웠기 때문에 단순히 궁중법 때문이라고만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즉 전설과 현실이 뒤섞인 이야기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왓 꾸를 걷다 보면 왕비의 죽음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이 조용히 남아 있다. 순백의 하얀 빛을 내는 작은 궁전 같은 느낌의 건물이다. 하지만 이곳은 1880년 그 사건을 떠올리게 하는 장소다. 강은 지금도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흐르고 있다. 조용한 물결을 보고 있으면 한 가지 생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날 강 위에서는 어떤 장면이 펼쳐졌을까. 왕의 슬픔 사고 소식을 들은 라마 5세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고 전해진다. 왕비와 어린 공주, 그리고 태어나지 못한 아이까지.
세 생명이 한 번에 사라졌다.
이 사건 이후 왕은 왕비를 기리는 여러 기념물을 세우게 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방파인 왕궁에 남아 있는 기념비다.
그 비문에는 왕의 개인적인 슬픔이 담겨 있다.
정치와 개혁으로 기억되는 왕이지만 그 역시 한 사람의 남편이었다는 사실을 느끼게 하는 기록이다.
사랑하는 왕비의 추억을 기리며
그녀는 이 정원에서 자신이 사랑하고 가장 소중히 여겼던 사람들과 함께 가장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이 기념비는 출랄롱꼰 왕(라마 5세) 에 의해 세워졌습니다.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편인 왕은 그 끔찍한 시간 동안 겪어야 했던 고통 속에서 죽음이 오히려 가까이 느껴지고 차라리 그것이 더 나을 것처럼 느껴질 정도의 깊은 슬픔을 겪었습니다.
1881
수난타 왕비의 죽음은 태국 역사에서 종종 상징적인 사건으로 언급된다. 라마 5세 시대는 전통적인 왕실 질서와 서구식 근대 제도가 서서히 충돌하던 시기였다. 노예제 폐지, 행정 개혁, 교육 제도 변화 많은 변화가 진행되던 시대였다. 그리고 이 비극적인 사건은 그 시대의 긴장과 변화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로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왓 꾸를 떠나 강을 따라 약 1km 정도 하류로 내려가면 또 하나의 작은 사원이 나타난다.
왓 꼬 파야 쳉(Wat Koh Phaya Cheng) 이다.
논타부리 파크렛 지역, 차오프라야 강변에 자리한 이 사원은 겉보기에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강가 사원이다. 하지만 이곳 역시 태국 왕실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과 연결된 장소로 언급된다.
1880년 수난타 왕비가 탄 왕실 배가 전복된 강 구간이 바로 이 사원 앞 차오프라야 강이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 때문이다. 물론 이 사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여러 논쟁이 남아 있다.
사고의 정확한 원인과 지점, 그리고 왕비와 공주를 구하지 못한 이유까지 여전히 다양한 해석이 존재한다.
일부 연구자들은 이곳 부근에서 사고가 발생했고, 이후 배와 시신이 왓 꾸로 옮겨졌다고 설명하기도 한다.
반면 사고 위치에 대해서는 다른 의견도 제기된다. 다만 확실한 것은 이 두 장소가 서로 멀지 않은 강 구간에 위치해 있다는 점이다. 결국 이 일대 어딘가에서 시암 왕실 역사에 남을 비극적인 사고가 일어났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은 조용히 흐르는 차오프라야 강이지만, 1880년 어느 날 이곳에서는 왕비와 어린 공주, 그리고 태어나지 못한 아이까지 세 생명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비극이 일어났다.
왓 꾸는 그 비극을 기억하는 장소이고, 왓 꼬 파야 쳉 앞의 강은 그 사건이 일어났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그리고 방파인 왕궁에는 사랑하는 왕비를 잃은 왕의 슬픔이 비문으로 남아 있다. 하나의 사건이 강을 따라 서로 다른 장소에 흔적을 남긴 셈이다. 지금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차오프라야 강은 그저 평범한 강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강은 한 시대의 비극과 왕의 개인적인 슬픔을 함께 품고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지금도 논타부리의 강가에서 조용히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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