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고 보면 다른 태국> 숲속의 피난처

파툼타니 | 1

by 강라마

방콕 외곽에 남은 전쟁의 피난처

파툼타니의 한적한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갑자기 이상한 구조물이 하나 나타난다.

거북등처럼 둥글게 솟아 있는 낮은 콘크리트 돔.

멀리서 보면 작은 창고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구조가 묘하다.
두꺼운 콘크리트 벽, 낮게 파인 입구, 그리고 내부로 이어지는 어두운 공간.

이곳은 창고가 아니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용된 방공호다.

그리고 전해지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이 방공호는 당시 태국의 총리였던 피분 송크람(Phibun Songkhram)이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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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파툼타니 방공호 | 2026.03 | Thailand_Pathum Thani | Copyright © llama.foto

오늘날 태국을 떠올리면 많은 사람들은 “전쟁과 거리가 먼 나라”라는 이미지를 갖는다.

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시기 태국 역시 거대한 전쟁의 흐름 속에 있었다.

1941년 12월 일본군은 동남아시아 전역으로 진격했고 태국 역시 일본군과 협력 관계를 맺게 된다.

그 결과 태국은 일본군이 버마와 인도 전선으로 이동하는 중요한 전략 통로가 된다.

철도와 항구, 공항은 모두 전쟁 인프라로 활용되었고 태국 영토 곳곳에 일본군이 주둔했다.

방콕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지금은 시민들이 조깅을 하고 음악을 듣고 산책을 하는 공간이 된 룸피니 공원.

하지만 전쟁 당시 이곳은 일본군이 야영하던 장소로 전해진다.

도심 한복판의 공원에 군용 천막이 세워지고 군인들이 드나드는 풍경.

오늘날의 평온한 모습만 보면 상상하기 쉽지 않은 장면이다.

전쟁은 늘 먼 국경에서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도시의 일상 속으로도 들어온다.

그리고 전쟁이 길어지면서 방콕의 하늘에도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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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군은 일본군의 보급망을 끊기 위해 동남아시아의 주요 도시들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특히 방콕의 철도 시설, 발전소, 항구는 중요한 전략 목표가 되었다.

그때부터 방콕의 밤에는 공습 경보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급히 방공호로 뛰어 들어가고 도시는 언제 폭격이 시작될지 모르는 불안 속에서 살아가게 된다.

정부 역시 대비해야 했다. 도심이 위험해지자 지도부를 위한 대피 장소가 필요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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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파툼타니 방공호 | 2026.03 | Thailand_Pathum Thani | Copyright © llama.f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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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파툼타니 방공호 | 2026.03 | Thailand_Pathum Thani | Copyright © llama.foto

방콕 북쪽에 위치한 파툼타니는 수도에서 멀지 않으면서도 당시에는 비교적 한적한 외곽 지역이었다.

짜오프라야 강과 연결된 수로 덕분에 배로 이동하기도 쉬웠고 도시 중심부보다 공습 위험도 낮았다.

지역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피분 송크람은 이 일대에 별장 두 채와 방공호 하나를 마련했다고 한다.

전쟁이 격화될 경우 정부 지도부가 잠시 몸을 숨길 수 있는 대피 공간이었던 셈이다.


이 방공호의 구조는 단순하지만 전쟁 시설다운 특징을 갖고 있다.

둥글게 솟은 돔 형태의 콘크리트 구조는 폭발 충격을 분산시키기 위한 설계다.

출입구는 두 곳으로 나 있고 내부는 비교적 넓은 공간으로 이어진다.

전해지는 기록에 따르면 약 15명에서 20명 정도가 피신할 수 있는 규모였다.

폭격 경보가 울리면 사람들은 이곳으로 들어와 폭발이 멈추기를 기다렸을 것이다.

지금은 조용한 숲 속에 서 있지만 한때는 생존을 위한 공간이었던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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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세계대전, 파툼타니 방공호 주변 | 2026.03 | Thailand_Pathum Thani | Copyright © llama.foto

방공호에서 밖으로 나오면 주변은 놀랄 만큼 평온하다.

바람에 흔들리는 나무, 멀리 들리는 새소리, 그리고 조용한 마을.

이 풍경만 보면 이곳이 전쟁과 연결된 장소라는 사실이 쉽게 실감 나지 않는다.

하지만 콘크리트 돔은 분명히 그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태국은 종종 평화로운 나라처럼 보인다.

그러나 역사를 조금만 들여다보면 전쟁은 이곳에도 분명히 지나갔다.

도시의 공원에는 군대가 있었고 수도의 하늘에는 공습 경보가 울렸으며 외곽의 숲 속에는
지도자를 위한 방공호가 만들어졌다. 지금은 잊혀진 작은 구조물이지만 이 콘크리트 돔은

그 시대의 긴장과 공포를 조용히 증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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