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 | 18
해가 기울 무렵, 공원 안으로 들어갔다.
저녁 운동을 나온 사람들, 벤치에 앉아 통화를 하는 직장인들, 호수 가장자리에서 사진을 찍는 관광객들.
하루가 천천히 정리되는 시간이었다.
그때, 확성기에서 태국 국가가 흘러나왔다.
조깅하던 사람들이 멈췄고, 자전거를 타던 아이도 멈춰 섰다.
호수 옆에서 웃고 있던 연인도 말을 멈춘 채 가슴을 펴고 선다.
잠깐의 정지. 그리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움직인다.
그 장면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여기는 공원인데, 왜 하루의 끝이 ‘국가’로 정리될까.
룸피니 공원은 원래부터 “시민의 쉼터”로만 만들어진 곳이 아니었다.
방콕 중심부의 이 넓은 땅은 한때 퉁 살라댕(Thung Sala Daeng)이라 불리던 지역이고, 훗날 라마 6세(왓치라웃)가 이곳을 공공 목적에 쓰도록 내준 뒤, ‘전시·박람회 성격의 프로젝트’와 함께 공원 구상이 얽히면서 출발했다. 라마 6세는 근대 국가의 모습을 보여줄 박람회를 계획되고 준비를 했지만 1925년 그의 서거로 그 구상은 실행되지 못한다.
공간은 남았고, 의도는 미완으로 멈췄다.
이후 라마 7세 시기 정비가 진행되며 지금의 공원 형태로 자리 잡는다.
공원의 이름은 부처가 태어난 네팔의 ‘룸비니(Lumbini)’에서 따왔다.
불교적 상징을 차용했지만, 공원의 성격은 종교 공간과는 달랐다.
이곳은 수행의 장소가 아니라 근대 시민이 모이고 움직이는 공간이었다.
왕은 이 공원을 통해 백성이 아니라 ‘시민’을 상상했다.
1941년, 제 2차 세계대전 일본군이 태국에 진주했을 때 룸피니는 한동안 군사적 용도로 사용됐다.
넓게 트인 공간은 천막과 병력이 집결하기에 적합했다.
왕이 시민을 위해 구상한 공간이 전쟁의 한 장면을 통과한 것이다.
이 대목은 공원의 분위기와 잘 어울리지 않지만, 이곳의 역사에는 분명히 포함되어 있다.
1942년, 전쟁 한복판에서 라마 6세 동상이 이 공원 입구에 세워졌다. 방콕 시내에 이미 일본군이 진주해 주둔지로 삼고 있던 시기였다.
흥미로운 점은 이 동상을 만든 이가 '태국 현대 미술의 아버지'로 불리는 이탈리아 출신 조각가, 실파 비라시라는 사실이다. 조국 이탈리아가 추축국으로 전쟁에 휘말린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그는 태국인들의 각별한 보호와 배려 덕분에 수용소로 가는 대신 왕의 형상을 빚는 작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훗날 그는 아예 태국인으로 귀화하며 이 이름을 얻게 된다.)
한쪽에는 침략군의 군용 천막이 늘어서 있고, 그 바로 곁에서는 국가의 상징인 왕의 동상이 세워지고 있었다. 점령과 기념이 한 장면 안에 뒤섞여 있던, 지독히도 아이러니한 순간이었다.
전쟁이 끝난 뒤 룸피니는 다시 시민의 공간으로 정리되기 시작한다.
군사적 긴장은 사라졌고, 공원은 본래의 기능을 되찾는다.
이 시기부터 이곳에는 지금 우리가 익숙하게 보는 요소들이 하나씩 더해진다.
중국계 화교 공동체가 기증한 시계탑이 세워지고, 태국과 이탈리아의 우호를 기념하는 조형물도 들어선다.
전쟁과 동맹, 복잡한 국제 관계를 지나 공원은 다시 “교류의 상징”이 된다.
또한 이곳에는 태국 최초의 공공 도서관 가운데 하나가 자리하며 지식과 휴식이 함께 머무는 공간으로 성격이 확장된다. 전시와 군대의 기억을 통과한 땅 위에 시민의 일상과 문화 시설이 덧입혀진 셈이다.
오늘의 룸피니는 더 이상 미완의 계획처럼 보이지 않는다.
호수 주변의 산책로, 운동 기구, 저녁마다 열리는 에어로빅, 벤치에 앉아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고층 빌딩 사이에서 이 공원은 방콕의 숨을 고르게 한다.
라마 6세는 생전에 이 땅이 완성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그가 구상했던 박람회는 열리지 않았고, 전쟁은 그 공간을 다른 용도로 사용했다.
그러나 100년이 흐른 지금, 룸피니는 매일 시민이 모이고 잠시 멈추고 다시 움직이는 공간이 되었다.
어쩌면 왕이 상상했던 근대의 공공 공간은 지금의 이 모습에 더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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