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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업번역가 May 11. 2021

영화 번역하고 로또 당첨된 이야기

꿈에 연예인이 나오면 로또 사는 번역가

몇 년 전, 영화의 더빙 번역 의뢰가 들어왔다. 애니메이션 더빙, 드라마 더빙, 영화 더빙을 해 봤는데 지금까지 최고 난이도는 역시 영화 더빙이다. 애니메이션은 애초에 성우들을 위한 대본으로 제작되기 때문에 쉽다. 드라마는 장르에 따라 많이 다르긴 하겠지만, 옛날에 디즈니 채널에서 더빙 드라마를 즐겨봤기에 나름 익숙한 편이다. 영화 더빙. 영화 더빙은 진짜 악몽이다. 나는 더빙 번역을 싫어하지도 않고 오히려 좋아한다면 좋아하는 쪽인데도 영화 더빙은 너무 힘들다. 특히 배우들은 가끔 호흡으로도 연기하기 때문에, 그걸 잡고 있다 보면 화면이 금방 이렇게 된다.



(놀라는 들숨)(날숨)(호흡 점점 거칠게)(달리는 호흡)(크게 날숨)


이러면 가독성도 떨어지고 또 전문 성우들이니까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싶어 (화면에 맞춰 호흡)으로 때려 넣을 때도 있긴 하지만, 주인공의 일관된 행동이 이어지지 않을 땐 결국 이 또한 설명을 넣어줘야 해서 (화면에 맞춰 달리는 호흡)(화면에 맞춰 싸우는 호흡)처럼 호흡의 지옥이 끝나지 않는다. (끔찍해하는 호흡)


그렇지만 영화 더빙 의뢰는 당연히 오케이 했다. 돈도 돈이고, 내가 좋아하는 영화 시리즈의 최신 편이었던 데다가, 내가 좋아하는♥ 배우도 나오는 영화여서 기뻤다. 오빠는 내가 있는지도 모르지만, 나는 한국에 방송되는 오빠의 영화를 더빙 번역했답니다. 그러니 저랑 결혼해야 하세요. 백신 맞고 입국하세요.


이미 극장에서도 보고 vod로도 본 데다가 업체에서 자막도 같이 주셨기에 내용 파악에는 문제가 없었다. 다만 애니메이션 번역만 많이 하다 보니 실사물의 거대한 남성들이 쓸만한 어른스러운 말투를 만드는 게 조금 힘들었달까. 평소에 내 말투가 워낙 철없어서 더 어려웠다. 감탄하는 장면에서 '와, 대박이네'라고 쓰고 싶지만 오빠와 나의 평판을 생각해 점잖게 '끝내주는군'이라고 번역해야 하는 어려움. 근데 또 ~군은 구어체 아닌 것 같아서 고민하게 되고... 하여튼 영화 더빙은 어렵다.


번역은 힘들게, 납품은 문제없이 했다. 나름 재미있는 추억으로 남았다. 납품을 하고 며칠 후 꿈을 꿨다. 꿈에 오빠가 영화 속 모습으로 등장했다. 나는 꿈에 연예인이 나오면 로또를 산다. 톰 하디가 나왔을 땐 꽝이었다. 박정민이 나왔을 때도 꽝. 차승원, 손호영 전부 꽝. 넷 다 나한테 5천 원씩 빚졌어. 이 글 보면 입금해 주라.


이날 꿈에서 오빠를 만나 좋은 기분에 일어났고, 역시 로또를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에서 오빠와 나는 같이 일했는데, 오빠가 나한테만 무슨 시험지를 풀게 하고 자기는 놀았다. 내가 오빠보다 가방끈이 길긴 하니까 봐줌. 그러면서 또 가방끈 긴 건 자랑하고 싶어서 암산하느라고 잘 못 풀었다. 문과에 수포자인데 사랑의 힘이 이렇게 위대해. 꿈에서 깨니 시험지에 있던 숫자 몇 개가 맴돌아서 그걸 메인으로 로또를 사 봤다.


그리고

당첨됐다.

만 원(기뻐하는 호흡!!)


연예인 꿈을 꾸고 로또에 당첨된 건 처음이었다. 심지어 꿈에서 나온 숫자로 당첨되다니 소름이 돋았다. 오빠에 대한 애정이 무한대로 치솟는 동시에 납품한 번역물에 대한 사랑도 샘솟았다. 이미 두 번 이상 본 영화를 다시 다섯 번 이상 보면서 번역한 보람이 다 있네. 번역료 관리표의 작품명 옆에 5,000원을 추가로 적었다. 만 원 당첨됐는데 왜 5,000원만 적었냐고? 그건... 5,000원은 내 돈이니까... 오빠가 준 돈 아니지... 오빠는 5,000원만 줬을 뿐...


가끔 생각한다. 만약 오빠가 꿈에서 나 혼자 시험지를 풀게 내버려 두지 않고 짧은 가방끈을 최대한 늘려 함께 풀어줬더라면, 지금 수도권의 타운하우스에서 여유롭게 깨어나 홈트레이닝 전용 방에서 커다란 전신 거울을 바라보며 요가를 하고는 - 누가 보면 요가 엄청 좋아하는 줄, 현실은 사바사나 자세만 한다 - 직접 구운 빵에 크림치즈와 아보카도를 올린 오픈 샌드위치를 먹고 프렌치프레스로 내린 커피를 마시며 번역을 하고 있진 않았을까. 잃어버린 내 풍요로운 삶 어쩔. 어쨌든 오빠가 날 책임져야 하는 건 맞는 것 같다.


얼마 전 꿈엔 고질라가 나왔는데 다음 주는 진짜 로또를 사 봐야겠다. 믿습니다, 갓질라. 다음 주에 출근 안 하면 로또 당첨된 줄 아세요. 근데 내가 꿈에서 고질라한테 너무 못되게 굴어서 당첨될지 모르겠네. 고질라가 흑흑 울며 등을 돌리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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