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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부업번역가 Jun 29. 2021

토익 900점 넘는 번역가

영어는 자신없는 번역가

번역을 한다고 하면 많이들 물어보는 게 영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와 어느 아카데미를 다녔는지에 관한 거였다. 아카데미 이야기는 지난번 글을 참고하세요.

오늘은 나의 형편없는 영어 실력에 대해 고백의 시간을 갖겠습니다. 고양이 신이시여, 이런 영어 실력으로 번역하는 저를 용서하소서. 왜 고양이 신한테 비냐면 번역의 신은 용서 안 해 줄 거 같아서...


누가 번역가가 되려면 토익을 발로 풀어도 900점이 넘어야 한다고 그랬다고 한다. 나는 손으로 풀었지만 다행히 900점은 넘었으니까 번역가 자질 1차 통과인가. 앗, 발로 풀지 않아서 탈락인가요?  발 올리면 부정행위로 5년간 토익 응시 못 할 거 같은데. 흠흠, 아무튼 내가 토익 점수를 잘 받은 건 영어를 잘해서가 아니고 그냥 취업 스펙 쌓을 때 여러 번 본 토익에 익숙해져서 그런 거다. 시험이란 결국 요령이지. 마, 토익 그까이꺼. LC에서는 다들 다른 사람의 연필 소리에 더 집중하는 거 아닌가요. 다수가 부산하게 움직이는 순간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정답.


코로나 전에는 해외여행을 잘도 쏘다녔지만, 그렇다고 영어를 술술 말하지는 못했다. 정말 필요한 말만 했다. 하이, 체크인. 하이, 체크아웃, 오케이 바이... 외국에 나가서도 이 정도니까 한국에서는 당연히 영어를 쓸 일이 없었다. 나는 영어에 친숙한 사람이 아니다. 나와 영어의 관계는 출근 시간 9시에 딱 맞춰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회사 대표님과 함께하는 30초만큼이나 어색하다. 그게... 제가 지각이면 님도 지각인데요...라는 변명을 마음속으로만 읊조리는 30초.


이렇게나 어색한 영어는 내게 아주 큰 부끄러움을 안겨 준 적도 있다. 영어를 잘하고 싶어서 야심 차게 전화 영어를 신청하고 내 소개를 하게 됐다. 소개를 하면서 팀원이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내 입에서 흘러나온 단어는 팀 멤버가 아니라 팀플레이어였다. 뭐야, 갑자기 분위기 영어면접? 사교형 인간 어필? 이 이야기를 듣고 내 친구는 너무 좋아하면서 박수를 치며 웃더라. 어우, 이때 플레이어라는 단어에 노이로제 생겨서 <레디 플레이어 원> 못 볼 뻔했잖아. 진짜 너무 부끄럽고 쪽팔려서 생각도 하기 싫었는데, 요즘 햇빛을 받고 비타민D를 흡수하며 나의 부끄러운 과거도 내 일부분으로 받아들이고자 하고 있기에 이 사건도 뇌 한편에 고이 간직해두기로 했다. 하지만 절대 활성화되지는 않았으면 하는 기억이다. 다시 꾹꾹 묻어놔야지.


요약하자면 토익은 900점 넘지만 영어로 말하라고 하면 팀 멤버도 생각이 안 나서 굳어버리는 게 나다. 그런 상황인데도 꾸준히 번역을 하고 있다. 영어 실력은 번역과 상관이 전혀 없기 때문이군요! 그렇지는 않다. 번역에서 영어 실력이 중요한 건 맞다. 하지만 어차피 자막은 한국어잖아. 한국어 실력이 더 중요한 거 아닌가? 그래서 누군가가 내게 영어를 얼마나 잘해야 하냐고 물을 때면 '바로 이 만큼입니다!'라고 대답하기가 영 어렵다. 당연히 오역을 하지 않을 수준이어야겠지만, 지금 영화 업계에서 날고 기는 번역가들도 진짜 사소한 오역을 하고는 한다. 그들이 토익 900점도 안 되는 번역가여서 그런 게 아니다. 결국에 이건 사람이 하는 일이고, 사람은 실수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실수가 반복되면 그건 실력이 되어버리기는 한다만.


누군가가 영어 실력 때문에 영상 번역 업계에 뛰어드는 게 고민이라면, 그냥 한번 시도해보라고 등을 떠밀어주고 싶다. 이미 번역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어느 정도의 영어 실력을 갖췄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텐데, 이제 와서 영어 실력을 키우고 번역을 하겠다는 계획을 세우는 건 무의미하다. 대체 어느 정도의 영어 실력을 키울 것인가. 토익 만 점을 받으면 가능할까? BBC 뉴스를 완벽하게 알아들을 땐 번역을 잘할 수 있을까? 내가 번역을 할 수 있는 실력인지는 해보지 않으면 절대 모른다.


실력보다 중요한 건 성장이라는 건 어디에서나 적용되는 말일 것 같고, 남들보다 조금 뒤처진 실력에서 출발하더라도 다른 강점이 있다면 충분히 메꾸면서 따라잡고 앞지를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야만 한다, 나도 아직 한참 성장이 필요하니까.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도전해보세요. 저도 아카데미 첫날은 눈물 났어요. 지금도 울면서 번역하긴 하지만 남은 건 나 하나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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