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친한 언니가 어느 날 밤 뜬금없이, 우리 예전에 베르나르 뷔페 전시를 보지 않았냐고 카톡이 왔다. 내가 전혀 기억에 없다고 하자 언니는 대뜸 무려 14년 전 사진들을 찾아내 보내주었다. 정말 사진 속에는 뷔페의 작품들이 있었고, 14년 전의 나도 거기 있었다. 우리는 그 시기 프랑스 비쉬에서 어학연수를 하고 있었고, 언니를 처음 알게 된 곳도 그곳에서였다. 서류 문제로 더 큰 도시의 관공서에 들러야 했던 언니를 따라, 나는 기차까지 타고 클레르몽페랑에 갔었다. 뷔페의 전시가 열렸던 미술관은 아예 기억이 안 나는데, 복잡한 일을 다 끝마치고 언니랑 카페 테라스에서 맛난 걸 먹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멀리까지 같이 와줘서 고맙다며 언니가 홍합요리를 사줬었다. 그때 우리를 지나가던 전통 의복을 입은 합주대도 사진 속에 남아있었다. 그 어떤 걱정도 없던, 그저 모든 게 신기하고, 여유롭던 시절이었다.
언니는 나를 '히치콕 영화를 본 사람'으로 만들어준 사람이다. 언니는 한마디로 박학다식하다. 1년에 영화를 한두 편 볼까 말까 하는 나와는 달리, 언니는 영화도 많이 알고, 책도 정말 많이 읽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만났을 때, 언니는 몇 달간 책을 100권이나 읽었다고 했다.(얼마 전에야 언니의 글들을 처음 읽게 되었는데 당연히 언니는 글도 잘 쓴다.) 이런 언니는 비쉬에서 히치콕의 영화들을 모아놓은 DVD 세트를 구입한 적이 있다. 나는 정말 관심이 없었지만, 그때는 집에서 인터넷을 할 수도 없고, 이른 저녁만 되어도 길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프랑스여서 언니가 빌려준다기에 그거라도 꾸역꾸역 보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말로만 듣던, 유명한 사운드로만 대충 알고 있던 히치콕의 영화들을 다 보았고, 나름 히치콕 영화들 속에서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언캐니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기까지 했다. 지금 보면 모두가 예상할 수 있는 반전들도 영화가 만들어졌던 그 당시에는 <식스센스>처럼 관객들에게 충격을 주었을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히치콕 영화를 본 사람'이 되었다.
비쉬에서의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와 달리, 언니는 파리로 가서 1년을 더 살았다. 언니는 그때 파리에서, 그리고 가끔 떠나곤하던 여행지에서 몇 번이나 엽서를 보내왔다. 언니의 외로움과 상냥함, 따뜻함이 담겼던 그 엽서들에서 언니는 늘 나의 행복을 빌어주었다. "진심으로 네가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행복하면 좋겠어"라는 문장은 그 멀리서 내게 전해지곤 했다.
얼마 전, 언니가 드디어 제주로 놀러 왔다. 예쁜 빨간 모자를 쓰고, 귀여운 줄무늬 셔츠를 입고! 언니가 미술에 깊은 관심이 있고(드가를 좋아하는 건 알고 있었다), 해산물을 엄청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언니가 써왔던 글을 알게 되고, 읽게 된 것도 이번 여행에서였다. 그리고 그때 그 히치콕 DVD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국에서는 재생이 안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언니 덕에 '히치콕 영화를 본 사람'이 되었는데, 무용지물이 된 DVD들이 안타깝다며 우리는 여느 때처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