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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스 Feb 06. 2023

어느 중년의 기상 캐스터

에세이

프랑스 비쉬로 어학연수를 갔을 때, 나는 매일 저녁 홈스테이 할머니와 거실에 앉아 뉴스를 보았다. 그때는 마침 프랑스의 대통령 선거가 있을 즈음이라 니콜라 사르코지와 시고렌 호아얄 두 후보의 대선토론이 가장 큰 이슈였다. 70세의 할머니는 시고렌 호아얄이 토론 중에 흥분을 했기 때문에 대통령 감이 아니라는 둥 본인의 정치적 생각을 가감 없이 내게 늘어놓았다. 그때는 나도 지금보다 더 어렸어서 그건 그저 할머니가 사회당의 여성 후보가 싫어서 뭐든 다 트집을 잡았을 뿐이라는 걸 간파하지 못했다. 그래도 그때의 날들은 지금도 나를 설레게 하곤 한다.


할머니와 매일 보던 뉴스들 중에 제일 기억에 남는 건 어느 기상 캐스터의 날씨 정보였다. 프랑스의 기상 캐스터들은 우리나라의 기상 캐스터들처럼 젊고 예쁘지만은 않았다. 여성만 있는 것도 아니어서, 민머리에 털이 덥수룩한 아저씨 캐스터들도 종종 보였다. 내가 눈여겨보았던 그 캐스터는 중년의 여성이었는데, 근육질의 탄탄한 몸에 흰머리가 희끗희끗 그대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매일 그 캐스터가 입고 나오는 옷과 그에 찰떡인 악세서리까리 너무 근사해 보였다. 그녀에게 반해버린 나는 나도 저렇게 멋지게 늙고 싶다!고 매일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그녀에게 반한 이유는 또 있었다. 그 캐스터가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아있는 이유는 그가 프랑스의 수도인 파리의 날씨부터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그때까지도 존재했던 프랑스의 식민지 섬들의 날씨부터 소개했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걸 본 첫날부터 그날 이후 매일, 나는 졸리고 지루한 데도 그 캐스터의 날씨 정보는 꼭 보고 내 방으로 들어갔다.  


어떻게 저런 생각을 할 수 있지? 아니, 어떻게 그 생각을 정말 방송에서 실행시킬 수 있지? 우리나라로 치면 최남단의 마라도의 날씨부터 알려주는 거나 다름없는 시도였다. 그 누구도 몇 가구 안 되는 이들이 사는 조그마한 섬의 날씨를 궁금해하지 않을 것이며, 최대한 많은 이들에게 먼저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뉴스가 지니는 사회적 의무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캐스터의 시도는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수가 아닌 소수의 이들을 중요하게 여기는 그 마음, 그 관심, 그 의지와 용기 그리고 그 행동은 단순히 합리적인 방식으로 정보를 전달하는 것보다 훨씬 더욱 귀중한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그녀가 진정 멋진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나는 가끔 이런 것들을 꿈꾼다. 각지에 있는 관공서에는 의무적으로 길고양이 집을 만드는 일. 장애인 주차장은 구석이 아니라 가장 드나들기 편한 자리에 마련하는 일. 의대나 법대 외에 자연과학이나 인문대, 환경과 관련된 학과에 지원한 학생들에게는 반값 등록금 제도를 시행하는 일. 채식주의자들에게는 국가에서 전기자동차 한 대씩을 의무적으로 제공하는 일.

세상의 모든 것들은 알게 모르게 연결이 되어 있어서 작은 움직임 하나가 거대한 나비효과를 일으키기도 한다. 나는 가끔 그 중년의 기상 캐스터를 떠올리며, 더 나은 세계로 나아가고자 하는 이들에게서는 빛의 날개짓이 보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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