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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리스 Feb 21. 2023

히치콕 영화를 본 사람

에세이

친한 언니가 어느 날 밤 뜬금없이, 우리 예전에 베르나르 뷔페 전시를 보지 않았냐고 카톡이 왔다. 내가 전혀 기억에 없다고 하자 언니는 대뜸 무려 14년 전 사진들을 찾아내 보내주었다. 정말 사진 속에는 뷔페의 작품들이 있었고, 14년 전의 나도 거기 있었다. 서류 문제로 더 큰 도시의 시청에 들러야 했던 언니를 따라, 나는 작디작은 비쉬에서 클레르몽페랑에 갔었다. 뷔페의 전시가 있었던 미술관은 기억이 아예 안 나는데, 복잡한 일을 다 끝마치고 언니랑 카페 테라스에서 맛난 걸 먹었던 기억이 되살아났다. 멀리까지 따라와 줘서 고맙다며 언니가 홍합요리를 사줬었다. 그때 우리를 지나가던 합주대도 기억에 스친다. 그저 모든 게 신기하고, 여유롭던 시절이었다.

언니는 나를 '히치콕 영화를 본 사람'으로 만들어준 사람이다. 언니는 한마디로 박학다식한 사람이다. 1년에 영화를 한두 편 볼까 말까 하는 나와는 달리, 언니는 영화도 많이 알고, 책도 정말 많이 읽었다. 프랑스에서 돌아와 서울에서 언니를 만났을 때 언니는 몇 달간 100권의 책을 읽었다고 했다. (얼마 전에야 언니의 글들을 처음 읽게 되었는데 당연히 언니는 글도 잘 쓴다. 나는 별로인 글을 읽을 때면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아 기분이 안 좋을 때가 있는데, 언니의 글은 생각날 때마다 찾게 된다.) 이런 언니는 프랑스에서 히치콕의 영화들을 모아놓은 DVD 세트를 구입한 적이 있다. 나는 정말 관심이 없었지만, 그때는 집에서 인터넷을 할 수도 없었고, 이른 저녁만 되어도 길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프랑스여서 그거라도 꾸역꾸역 보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말로만 듣던, 유명한 사운드로만 대충 알고 있던 히치콕의 영화들을 다 보았고, '히치콕 영화를 본 사람'이 되었다.


비쉬에서의 어학연수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와 달리, 언니는 파리로 가서 1년을 더 살았다. 언니는 그때 몇 번이나 엽서를 보내왔다. 파리 어딘가에서 혹은 프랑스 어느 지방으로 여행을 갔다가 내 생각이 나서 편지를 쓴다고 했다. 언니는 늘 나의 행복을 기도하기도 했다. 그저 형식적인 인사가 아니었다. 내가 아는 언니는 종교가 없었다. "진심으로 네가 지금 그리고 앞으로도 행복하면 좋겠어"라는 문장 그대로였다. 그 진심은 변치 않고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다는 걸 나는 느낄 수 있다.


얼마 전에 언니가 드디어 제주로 놀러 왔다. 예쁜 빨간 모자를 쓰고 귀여운 줄무늬 셔츠를 입고. 언니가 미술에 깊은 관심이 있고, 해산물을 엄청 좋아한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언니가 써왔던 글을 알게 되고, 읽게 된 것도 이번 여행에서였다. 그리고 그때 그 히치콕 DVD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한국에서는 재생이 안된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나는 언니 덕에 프랑스 비쉬에서 히치콕 영화를 본 사람이 되었는데, 안타깝다 하며 우리는 여느 때처럼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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