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단턴 『시인을 체포하라』 문학과 지성사 (2013)
1749년 봄, 불온한 시들이 파리 곳곳에 퍼졌다는 첩보를 받은 베르사유 궁전에서는 그 주동자를 잡아들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경찰은 수사 인력을 동원하여 14명의 용의자들을 체포하지만, 시를 처음 지었던 사람은 끝내 찾아내지 못한다. 그러나 이 작은 사건으로부터 두 가지 역사적 가설이 도출된다. 과연 이 ‘14인 사건’을 당대 파리의 지배적인 여론으로 확장시킬 수 있는가 하는 점과, 이 사건을 40년 후에 있을 프랑스 대혁명의 단초로서 여길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책의 저자인 로버트 단턴(Robert Darnton, 1939-)은 이 두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신중하면서도 논리적인 어조로 글을 전개한다.
체포된 14인 중에는 대학교수와 학생, 신부들이 포함되었고, 이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불온한 시를 퍼트렸다. 예컨대 시를 적은 쪽지를 책에 끼워 다른 이에게 전달하거나, 강의시간에 암송하여 기록하게 하거나, 시를 선물에 딸려 보내기도 했다. 재밌는 건, 당시 바스티유 감옥은 그러한 시를 공유했거나 전달했다는 이유로 잡혀온 이들이 넘쳐났다는 사실이다. “어디를 살피든 경찰은 궁정에 관한 사악한 시를 노래하거나 읊조리는 이들과 마주쳤다.”(30쪽) 즉, 체포된 14인은 불온한 시를 스쳐간 수많은 파리 시민들 중 운이 없어 경찰에 체포된 이들에 불과했던 것이다. 실제로 그 당시의 파리 시민들은 시를 “카페에서 꺼내 암송하거나, 다른 시와 교환하거나, 튈르리 공원 벤치 같은 전략적인 장소에 놓아두려고 주머니에 넣고” 다녔으며, “카페나 극장에서 누군가의 주머니에 시를 찔러 넣거나 길에 떨어뜨려” 퍼트리기도 했다.(81-82쪽) 이러한 예시들은 단턴이 제기했던 첫 번째 가설이 참임을 알려준다. “주변 증거들은 다른 많은 파리 시민들도 같은 시를 암송하고 노래했음을 입증한다. 또 유사한 노래와 시가 같은 시기에 다른 원천에서 회자되고 있었다는 것, 이 시들은 대중적인 인쇄물, 전단, 풍문과 동일한 주제를 전달했다는 것, 그리고 이 모든 것이 도시 전역으로 널리 확산되었다는 것을 증명했다.”(147쪽)
불쌍한 에두아르 왕자여!
그렇게 수많은 파리 시민들을 거쳐간 불온한 시들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담고 있었을까. 시의 소재들은 매우 다양했다. 당시 프랑스의 왕이었던 루이 15세와 그의 애첩인 퐁파두르는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재였다. 지방에 비해 유독 정치 현안이나 외교 문제, 사건사고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파리 시민들은 그런 뉴스거리들을 시의 소재로 삼아 자신들의 입장을 피력하기도 했다. 14인이 체포되었던 바로 그 시기에는 파리 시민들에게 '에두아르 왕자'로 불렸던 영국의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 왕자와 관련된 사건이 시의 소재로서 자주 오르내렸다. 에두아르 왕자는 그 당시 영국의 왕이었던 조지 2세의 왕위를 빼앗기 위해 봉기를 일으키면서 파리 시민들에게 큰 인기를 얻은 인물이었다. 그러나 루이 15세가 조지 2세의 압력에 못 이겨 파리에 있던 에두아르 왕자를 추방하게 되면서 동정의 여론이 들고일어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파리 시민들은 조지 2세에게 굴복한 것이나 다름없는 루이 15세보다는 조지 2세에게 저항했던 에두아르 왕자를 지지하게 된다.
루이! 절망에 신음하는 당신의 백성들이
포로가 되어 왕관조차 없는 에두아르를 존경하는구나.
그는 사슬에 묶인 왕이거늘
왕좌에 앉은 당신은 대체 무엇인가.(68쪽)
이 시에는 에두아르 왕자에 대한 파리 시민들의 애타는 마음이 느껴지는 동시에 루이 15세에 대한 원망과 냉소가 담겨있다. 에두아르 왕자를 포박하여 체포했던 프랑스 수비대를 조롱하는 시도 있다.
한마디로 용맹한 수비대가
이제 막 그 왕위 주장자(=에두아르 왕자)를 체포했다지.
영국인 하나를 붙잡았다니. 오 이런! 기막힌 승리일세!
뮤즈여, 어서 서둘러 기억의 사원에 새기라
이 희대의 사건을.
백 개의 목소리를 지닌 여신이여, 어서,
가서 온 세상에 알리라.
수비대가 전쟁에서 생포한 것이
고작 영국인 한 명이라는 것을.(121쪽)
그러나 단턴은 이렇듯 불온한 성격의 시들에서 프랑스혁명의 불씨들을 찾기는 어렵다고 주장한다. 비록 파리 시민들이 루이 15세를 탐탁지 않게 여기기는 했으나 그 시들이 왕정의 몰락이나 루이 15세의 폐위, 더 나아가 공화정을 향한 열망을 담고 있지는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다만, 18세기 중엽의 파리에는 이런 종류의 시들을 통해 서로 간에 이슈를 공유하고, 위정자의 잘못을 꾸짖는 의사소통의 망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거대한 불꽃으로 타올랐던 프랑스 대혁명의 불씨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 불씨가 번질 수 있는 토양은 마련되고 있었다고 보아야 할까. 그에 대한 판단은 각자의 몫이다.
노래로 불리는 신문
나에게는 『고양이 대학살(The Great Cat Massacre)』 이후 단턴의 두 번째 책이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자꾸 떠오른 것은 『아카이브 취향』이라는 책이었다. 『아카이브 취향』은 아를레트 파르주(1941-)라는 프랑스 역사학자가 방대한 양의 1차 사료들을 필사하면서 그것들을 역사로 엮어내는 경험을 써 내려간 에세이다. 파르주는 여러 아카이브들을 드나들며 18세기 파리에서 쓰인 실제 “고발장, 재판 기록, 심문 기록, 수사 기록, 판결문”(『아카이브 취향』, 9쪽) 등을 읽고 해석하는 작업을 반복했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18세기 파리의 식품절도죄 연구’라는 박사논문을 완성했다. 아카이브에서 파르주가 다루었던 사료들의 주된 특징은 누군가의 말을 글로 적어놓은 것이었다는 점에 있었다. 가령, 심문 기록은 경찰이 범죄자를 심문하던 내용을 옆에서 서기가 듣고 그대로 적은 것이었기 때문에, 당대에 경찰과 범죄자 사이에 오고 간 말을 직접 듣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파르주는 그러한 사료들이 신문이나 잡지와 같은, 처음부터 글이 될 목적으로 쓰인 사료들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의 것들임을 지적했다. 정말 그럴 것이었다. 우리가 읽고 있는 인쇄물들은 그것이 비록 당대의 문서라 할지라도 특정 독자를 염두에 두고 특정한 의도를 가지고 쓴 글일 것이다. 그러니 심문을 하고, 조사를 받았던 이들의 말보다 훨씬 더 정제되어 있을 가능성이 크다. 또한 신문이나 잡지에 글을 실을 수 있었던 이들과 잡다한 범죄에 연루되어 조사를 받았던 이들은 대체적으로 다른 계층에 속한 이들일 수밖에 없었다. 즉, 파르주가 보았던 사료들은 지극히 평범한 이들이 사용했던 용어나 어투, 이야깃거리, 관심사, 더 나아가 그들의 일상다반사를 생생하게 엿볼 수 있는 “날 것 그대로의 삶의 흔적”이었다.(『아카이브 취향』, 13쪽)
단턴의 책에서 다루고 있는 불온한 시들 역시 파르주의 사료들과 비슷하다. 파리 시민들은 시를 주고받고, 암송하면서도 동시에 그 시 속의 문장들을 수시로 수정하곤 했다. 시들은 새로운 뉴스거리가 등장하면 새 문장들이 덧붙여지고, 새롭게 변형되었으며, 때때로 음이 가미되어 노래로 불리기도 했다. 그렇게 되면 시들은 “노래로 불리는 신문 같은 것이 되어 세간의 사건에 대한 논평을 가득 담고 있었고, 폭넓은 대중에게 호소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재미있고 외우기 쉬운 것이 되었다.”(90쪽) 파리 시민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 불온한 시들은 파르주가 말했던 “날 것 그대로의 삶의 흔적”과 다름 아니었던 것이다. 파르주나 단턴이 발굴해낸 18세기의 사료들은 구어(口語)로 된 역사적 사료라는 점에서 희귀성을 지니고 있다.
튈르리 정원(jardin des Tuileries)
18세기 중엽의 파리 시민들은 공권력의 눈을 피해 시를 적은 쪽지를 몰래 저곳 벤치에 숨겨두었을까. 그들에게 그것은 일종의 놀이나 소소한 취미, 반항심에서 나오는 장난 같은, 지극히 일상적인 행위였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행위를 들어 많은 이들을 바스티유 감옥으로 체포한 건 오히려 루이 15세가 자신의 무능을 알고 있었다는 반증이 아닐까. 파리의 거대한 거미줄과도 같았던 의사소통망을 손바닥 보듯 한눈에 들여다보고 싶었던 이는 그 누구보다도 루이 15세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