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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Feb 02. 2024

가만히 있으면 가마니가 된다

나의 프랑스 대학 입문기


프랑스 대학은 공부하기 원하는 학생들에게 최대한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그렇다 보니 전공마다 1학년은 학생수가 엄청나게 많다. 예를 들자면, 우리 학교 심리학과의 경우만 해도 1학년만 600명가량이다. 학과 전체는 고사하고 같은 학년 학생들끼리도 알고 지내기 어려운 수준.


물론 600명이 넘는 이 학생들이 모두 졸업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각종 쪽지시험부터 리포터, 발표, 중간 기말고사까지 학교 들어오기보다 들어와서가 더 힘들다는 사실을 1년 동안 몸소 체험하며 다음 학년으로 올라갈 학생들이 추려진다. 조건 자체가 아주 까다롭지는 않다. 20점 만점에 전체 평균 10점을 넘기면 된다. 그리고 매년 대략 70퍼센트의 학생이 이 조건을 충족시키고 2학년에 올라간다고 한다.  



그렇게 600명의 어린 동기들과 시작된 설렘이 가득했던 나의 프랑스 대학 생활은 OT 이미 장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커다란 대형 강당 2개에 나뉘어서 진행된 OT, 그리고 그 강당을 가득 메운 학생들 틈바구니에 나도 살포시 자리를 잡았다.


'그래, 지난 3년을 프랑스어 자격시험 DALF C1을 취득하려고 공부했다. 오늘 실전이다. 한 번 들어보자!'


OT에서는 대학 생활 전반에 대한 내용(성적, 출석, 제적 등)과 수강신청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주는데,  그토록 비장했던 나의 마음과는 달리, 정작 중요한 내용들만 유독 들리지 않았다. 그것은 바로, 수강신청!!


뭐지? 뭐지? 하는 사이에 OT는 끝났고, 이를 어쩌지? 하는 사이에 썰물처럼 학생들은 빠져나갔다. 이러다 정작 수강신청을 못하게 되는 게 아닌가 싶어 식은땀이 이마에 맺히기 시작했다.


그랬다. 외국인 학생인 내 입장에서, 문제는 교수님이 앞에서 모두에게 친절하게 중요한 정보를 공지를 한다손 치더라도 내 부족한 프랑스어 실력으로는 다 이해할 수가 없다는 데 있었다. 더군다나 강당에서, 더군다나 수백 명의 사람들이 내는 소음과 함께라면 이건 뭐... 실전도 이런 곤란한 실전이 없었다.   


몇십 명 정도의 작은 그룹이면 선뜻 다가가서 물어보기도 쉬울 텐데, 600명 중의 한 명인 나는, 낙동강 오리알처럼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더군다나 동방예의지국 대한민국 출신의 수줍음 많고 폐 끼치기 싫어하는 성향의 나는, 누구에게도 선뜻 도움을 요청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여기는 프랑스가 아닌가? 개인주의적인 문화가 강한 이 서구 사회에서, 먼저 손 내밀고 다가오는 이 한 명 없이 홀로서기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때 불현듯 생각난 것이 외국인 학생들을 위한 사무실이 학교 어딘가에 있다는 것이었다.


염치 불고하고 수위 아저씨들에게 물어 물어 그 사무실로 찾아갔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했다. 친절한 한 여자분은 자신의 노트북을 켜서 과정과정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하는지 보여줬고, 그렇게 나는 어렵사리 진땀을 빼며 수강신청을 마칠  있었다. 



그러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첫 주에 학교에 갔으나 여전히 나는 혼자였다.

누구도 내게 먼저 그 흔한 Bonjour를 외쳐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가마니처럼 정말 가만히 있었다. 한쪽 구석에 그림자처럼 앉아서, 누구에게도 폐 끼치지 않는 점잖은 어른 코스프레를 하고 있었다.


이제 막 1학년에 들어와서 처음 만났을 텐데 이 아이들은 언제 그렇게 서로 친구가 되었는지 사방에서 그룹들이 정말 정답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렇게 일주일을 지내자 막막함이 찾아왔다.


이거 이렇게 3년을, 홀로, 가능할까? 싶었다.


여전히 누군가의 아주 사소한 도움이 필요한 순간들이 많았다. 숙제를 어떻게 하라는 건지, 시험이 언제라는 건지 등등 내가 듣고도 확신할 수 없는 정보들을 확인하고 싶은 순간들마다, 나는 누구에게 물어야 할지 몰라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렸다. 그러나 더 힘든 건, 외로움이었다.


내 편에서는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의 생김새나 이름이 다 비슷비슷하게 보였고 구분하기 어려웠지만, 그들에게 나는 도드라져 보이는 게 분명했다. 교수님들도 학생들도 내 존재감을 확실히 느끼고 있었다. 자그마한 동양 여자, 눈에 띄는 게 당연했다.


모두가  존재를 느끼고 있지만, 누구도 내게 관심이  없다고 느끼는 것을 힘든 일이었다.


나라는 사람이 누구에게도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느낌, 그것만큼 외로운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런 하루하루를 지날수록 나는 점점 더 움츠러들고 있었다.



그리고 한 주가 끝나갈 무렵, 도무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아무도  이름을 불러주지 않는다면,

내가 먼저  이름을 불러주리라.

이렇게 가만히, 가마니로 남겨지지 않겠노라.




그때부터 강의실 앞에서 수업이 끝나길 기다리는 짧은 틈마다 나처럼 혼자  있는 친구들을 찾아가 먼저 Bonjour라고 인사를 건네기 시작했다.


사실 할 말은 그다지 없었다. 이름은 뭐니, 여기서 멀리 사니, 심리학을 왜 선택했니.. 고작 요정도의 질문을 던지고 나면 대화가 단절되기 일쑤였다. 모두가 다 즐거이 대화를 받아준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포기하지 않았다.


폐가 될까 망설이느라 존재감 없는 '가마니'가 되느니, 차라리 (말이 통하지 않아) 성가시지만 밝은 기운을 뿜어내는 친구,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동기라도 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어버버 거리고 나면 부끄러워 귀까지 붉어졌지만,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 몇 번이나 아이고.. 말도 못 하면서 무슨 용기로... 를 연발했지만, 또 혹시 그 친구가 날 귀찮다고 여기면 어쩔까 걱정이 밀려오기도 했지만, 그렇게 수시로 용기를 내며 한 학기를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시도를 통해서 나는 분명한 것을 깨달았다.


가마니가 되어  때는 뭉뚱그려 모두가,

 나아가 세상이 내게 냉담하게만 느껴졌는데,

오히려 가만히 있지 않기로 결정하자 

 자주 친절을 경험하게 된다는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적어도 그런 손길들을 느낄 기회가 더 많아졌다.


그랬다. 부족하고 모자란 그 모습 그대로 살아가기로 결정하자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누구의 주목도 받지 못하는 동양 여자,

스스로를 가마니로 여기며 비극적인 상황 속에 놓였다 생각했지만 그렇게  걸음만 방향을 바꾸어도 희극의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생의 신비는 이런 순간에 발견하는  아닐까.

나의 작은 행함에 은총의 빛이 깃드는 순간.  


여전히 외로운 순간들이야 있지만은,

'그래, 적어도, 가마니는 아니니까, 일단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고백하며   쉽지 않은 여정을 포기하지 않고 걸어간다.

늦깎이 대학생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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