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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May 16. 2024

오늘도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

거창한 의미 부여 대신 소소한 즐거움을 발견하는 것

왜 학교에 가?


10년 뒤에 이루고 싶은 꿈이 있거든.

누군가를 도울 수 있는 삶을 살고 싶거든.


이게 내게 주어진 일이고,

나는 내 삶을 충실히 살고 싶거든.


나를 지지해 주는 사람들이 있고,

나는 그 사람들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거든.

...


학교를 가기 싫은 날 아침이면 나는 학교를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내게 왜라고 질문했다.


그리고 당연하고 그래서 단번에 내가 제압당할 수밖에 없는 거창한 이유들을 가져다 대답했다. 이 과정은 힘들어 하는 나를 설득하는 과정이었고 모두 진심에서 나온 말들이었다.


정신 차려!라는 말은 빼먹었지만,

사실은 그 말도 이미 괄호 안에 넣어 두었다.

마치 지구 평화라도 지켜야 하는 사람이 바로 나인 양, 내가 학교에 안 가면 온 인류에게 재앙이라도 닥칠 듯 그렇게 스스로를 들들 볶았다.


딸내미가 아파서 학교를 하루쯤 빠져야 하는 날이면 나는 괜스레 죄책감이 밀려왔다. 꿈을 이뤄야 하고, 누군가를 도와야 하고, 충실히 살아야 하며, 믿어주는 사람들을 기쁘게 해 주고 싶었던, 그렇게 매일 같이 내가 나에게 세뇌시켰던 그 바람이 오늘은 그렇게 살지 못했다는 왠지 모를 슬픈 마음을 내게 얹어 주고는 총총히 사라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은 오후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쉬는 날이라 집에 있던 남편과 가볍게 점심 식사를 마치고 나는 학교로 떠나야 하는 상황이었다. 거의 매일 아침마다 마음속으로는 되풀이하는 일상 중 하나였지만, 그날은 나도 모르게 툭하고 입 밖으로 말이 나왔다.


"아... 진짜 가기 싫다."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나를 보며

"땡땡이 ." 하고 말했다.


그랬다.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는 땡땡이를 꽤나 깠었다. 물론 지금 내가 다니는 대학교에서도 많은 친구들이 땡땡이를 자주 깐다. 출석 체크를 중요하게 하는 과목만 아니라면 시험만 잘 보면 되니, 수업 하루쯤 빠지는 거야 큰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내키질 않았다. 어쩌다 하루 빠지면, 다음 수업에서 더 헤매게 되니 그런 어려움을 방지하고 싶은 마음 때문인지도.



그러다 나도 모르게 툭 내뱉은 말.


"아니야, 나 학교 갈 거야. 커피 마시러. 

우리 학교 자판기 커피 진짜 맛있거든.

안 먹어 봤음 말을 하지 말어.

해 비출 때 캠퍼스에 앉아서 커피 마시면 캬아,

나 오늘 커피 마시러 갈 거야."



남편은 웃었다.


내가 들어도 커피를 마시러, 그것도 고작 자판기 커피를 마시러 지하철 타고 40분 간다는 내 답변이 우습기는 했다. 그러나 이상하게 그날따라 학교를 향하는 마음이 가벼웠다.


아침마다 온갖 갖은 거창하고 올바른 이유를 가져다 댈 때는 무겁고 무겁던 마음이, 집에서 쉬면 뭐 하나  그냥 가볍게 산보 나서서 커피 한 잔 마시고 덤으로 수업도 듣고 오지 뭐, 하고 생각하자 불현듯 한결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내뱉은 말이 있으니,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10가지쯤 종류가 가득한 커피 자판기 앞에 섰다. 마침 점심을 먹고 난 뒤라 커피가 딱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아메리카노부터 카페라테, 카페오레, 바닐라라테... 핫초코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없는 것 빼곤 다 있는 요술 자판기다. 카페라테와 카페오레, 바닐라라테 이름은 다 다르지만 맛의 차별화까지는 보장 못한다는 치명적인 단점만 뺀다면 말이다. 그래도 한국 돈 700원 정도로 즐기는 한 잔의 여유는 내겐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오늘은 카페오레!"

 

아무도 듣는 이 없으니 혼자 한국어로 중얼거려가며 커피 한 잔을 뽑으며 괜스레 웃음이 난다. 프랑스에도 이렇게 자판기 커피가 있을 줄이야 꿈에도 생각 못했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 어느 부분인들 미리 생각했던 시나리오였겠나 싶다.  늦은 나이에 다시 대학생이  것도 모두 꿈에도 생각 못했던 일이었다. 그러자 문득 인생은 모를 일이다 싶다가 괜스레 꿈에도 몰랐던  모든 시간들이, 조금은 뜻밖의 선물처럼 감사하게 느껴진다.


'아 맞다. 나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도 자판기 커피 진짜 좋아했었는데'


벌써 20년 전일이다.

지금도 여전히 캠퍼스 여기저기 자판기 커피가 있는지, 가격은 얼마인지, 여기처럼 다양한 맛을 제공하는 자판기로 바뀌었는지 한국 대학 캠퍼스 사정이야 내 잘 모른다마는, 그땐 150원이면 믹스커피  잔의 즐거움을 누릴  있었다. 한창 별다방, 콩다방 이런 카페들이 인기를 끌기 시작하던 무렵이었고, 학교 캠퍼스 밖에 이름 없는 카페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1500원에 사 먹던 시절이었다.


고운 여대생들 우아 떨기에야 아메리카노가 제격이지만, 난 어쩐지 자판기 커피가 좋았다. 


아무데서나, 주머니 속 동전 딸랑이며 부담 없이 턱턱 뽑아마실 수 있는 그 간편함이,  도서관에 공부하고 있는 친구에게 선심 쓰듯 두 잔 뽑아다 부담 없이 내밀 수 있는 그 다정함이 좋았다. 자판기 커피 한 잔 하자, 로비로 내려와 하던 친구의 문자도 참 반가웠다. 이제 자판기 커피가 그때처럼 호황을 누리지는 못하겠지만, 그때 그네들도 잘 살고 있겠지?


생각은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그랬다.


거창한 이유 대신 찾은 소소한 이유, 고작 700원짜리 커피  잔을 손에 들고 벤치에 홀로 앉아 나는 인생을 조금은  아름답게 바라볼  있었다.


괜스레 지나간 추억 한 조각까지 떠올려가며 잠시 웃을 수 있었다. 비장함 대신 따뜻함을 가슴에 품고, 그러니 이대로 이 모든 시간이 괜찮다 말할 수 있었다. 그리곤 툴툴 털고 일어나 스스로에게 말한다.  수업 시간 늦겠다 이제 가자.


강의실을 향해 걸으면서 나도 모르게 중얼 거렸다.


"아 좋다. 내일은 또 무슨 커피 마시지?"






내가 가졌던 거창한 삶의 의미들은 언제나 옳았다. 조금  좋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든 과정은 힘들지만 아름다웠고, 실수와 실패로 가득해도 충분히 의미가 있었다. 그리고 이 과정은 언제나 건강하고 바른 삶의 의미에서부터 시작되곤 했다.


그러나 정작 한 걸음, 한 걸음을 걸어가게 하는 것은 거창한 의미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무겁지만 옳고, 바르지만 힘든 인생의 의미를 위해 하루하루를 묵묵히 걸어가야 하는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오늘을 조금  따뜻하게   사소한 이유들, 즐거움들, 아주 잠깐의 행복들이 아닐까. 그리고 그것들을 위로삼아 우리는 그렇게 오늘도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한 무던한 애씀을 포기하지 않을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누구도 우리에게 무겁고 비장하고 힘들게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것이 우리를 더 멋진 사람으로 만들어준다고 말하지 않았다.



조금  바르고 아름답게 살기 위해 애쓰는  모든 과정 속에서 나는 조금  행복하고 싶다.


그러니 찾아야겠다 내가 사랑하는 순간들을. 그리고 시작하려 한다 그렇게  10분이라도 가장 먼저 나부터 사랑해 주는 ,  마음을 도닥여 주는 것을.



그것이 비록 700원짜리 자판기 커피라 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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