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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May 13. 2024

내가 힘든 건 나만 안다

프랑스 살이가 벌써 5년째에 가까워 온다. 모든 게 낯설던 시절을 지나 이제 모든 게 한결 익숙해져 가고 있지만 그래도 유난히 힘든 시기가 있다. 바로 겨울. 특히 12월 말에서 1월 말 사이 그 한 달은 정말 못 견딜 정도로 힘이 든다.


한국처럼 살을 에는 듯한 추위는 아니지만 부슬부슬 시도 때도 없이 내리는 비에, 해라고는 눈 씻고도 찾아볼 수 없는 그 을씨년스러운 파리의 겨울은 향수병을 절로 불러일으키곤 한다.

 



그리고 작년 12월도

나에겐 적잖이 힘든 시간이었다.


 이제 막 한 학기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곧 기말고사를 치를 예정이었고 그러나 시험을 위해 긴장의 끈을 조이기도 전에 나는 너무 지쳐있었다. 낯선 환경 속에서, 하루에 일곱여덟 시간씩 프랑스어로 수업을 들으며 살아가는 일상은 그렇게나 고단했다.


그날은 아침 8시 반에 첫 수업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수업은 오후 6시경에나 마칠 것이다.


눈 뜨자마자 엄마를 보내야 하는 딸내미의 눈물 어린 얼굴을 뒤로하고 새벽같이 집을 떠나는 마음이 이미 한껏 추웠다.


비는 부슬부슬, 꼬박 12시간 가까이를 학교에 머물러야 하기에 산처럼 무거운 가방을 짊어지고 터들터들 걸어간다. 만행 지하철, 그 마저도 내게 주어진 미션처럼 받아들이며 나는 그렇게 몸을 실었다.



학교에 도착해 첫 수업을 들었다. 아이들도 모두 잔뜩 졸린 표정인 걸 보니 나만 이토록 힘든 건 아닌 것 같았다. 강의실을 나오면서 휴우.... 나도 모르게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그랬다. 가방이 무거운  알았는데, 사실은 마음이 무거웠었나 보다. 그렇게 하나의 수업을 마칠 때마다 어깨에 가득 짊어지고 있던 모든 부담과 무거움들이 조금씩 비워졌다.


점심시간이 되자 조용히 도서관 1층에 있는 휴게실로 갔다. 준비해 온 도시락을 꺼내서 유튜브를 친구 삼아 그렇게 허기를 달랬다.


날씨 탓인지, 마음 탓인지, 너무나 추워서 덜덜 떨면서 겨우 허기를 달래고는 추위를 피해 도서관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복습이라도 해 보려고 책을 폈지만 이 한겨울에도 난방을 하지 않는지 도서관조차도 너무 추워 나는 덜덜 떨며 겨우겨우 견디고 있었다.


책상 너머로 큰 창이 있었다. 잎사귀를 모두 잃어버린 나무 한 그루가 비를 맞으며 오들오들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나처럼.


5시 45분, 그렇게 마지막 수업까지 모두 마치고 난 뒤에 강의실에서부터 지하철역까지 달려갔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아침 일찍부터 엄마와 떨어져 있어야 했던 아이들 곁으로 돌아가 나처럼 추웠을 테고, 나처럼 서글펐을 마음을 위로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어쩌면 조금 더 솔직하자면, 학교에서의 이 춥고 서글픈 일상으로부터 얼른 도망치고 싶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 올라서야 깨달았다.


'나 오늘 하루 종일...

말을 한마디도 한 적이 없네....'


그랬다. 얼굴을 익힌 몇몇의 친구들이 있었지만, 그날은 유난히 그 몇몇의 친구들과도 마주치지 못했다. 그 흔한 'Bonjour'조차도 입 밖으로 낼 수 없었던, 그저 바람과 비와 추위 속에서 오들오들, 추워서  것인지 외로워서  것인지도   없이 그렇게 하루종일 덜덜 떨다 돌아왔다.



그러나 문제는 전혀 엉뚱한 곳에서 터졌다.


집에 오자마자 엉덩이도 부치지 못하고 저녁을 해서 겨우 먹고 나니, 온몸에 긴장이 풀렸다.


하루종일 떨다 와서 그런지 으슬으슬 몸살 기운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따라 평소와 달리 남편이 설거지를 못 하겠노라 했다. 남편도 오늘 꽤나 바빴던 모양이었다. 늘 매일 저녁 군말 없이 당연하게 자신의 일로 받아들여 주었기에 고마웠는데, 그날따라 오늘은 못 하겠다고 하니 서운함이 몰려왔다. 몇 마디 실랑이를 하다 그마저도 힘들어서 그냥 내가 한다고 하곤 주방으로 들어가 온 서로움을 담아 설거지를 마쳤다.


아이들을 안아주고 침대에 누운 아이들 이불까지 당겨 덮어주고 나와 내 자리에 눕는다.


남편은 그때까지도 뭔가 분주해 보였다. 그러나 그런 건 나에게 하나도 중요하지 않았다. 뭐 때문에 저렇게 분주해 보이는지, 왜 설거지를 못한다고 했는지 꼬치꼬치 묻고 싶은 마음도 의지도 없었다.



이불을 덮고 따뜻한 전기장판 속으로 파고드는데... 나도 모르게 탄식이 흘러나왔다.


눈을 감으니 하루 종일 있었던 일들이 스르륵 스쳐 지난다.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하루, 그리고 지독하게도 춥고 외로웠던 하루.



'내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아무도 몰라...

 내가 오늘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 외로운 시간을 어떻게 견뎠는지...

 그걸 아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자 눈물이 또로록 흘렀다.

외로웠다.


남편을 붙들고 앉아 분을 쏟아 낼 수도 있었겠지만 그럴 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 인생은 원래 외로운 거야'

그 외로운 독백을 마치고 곧 잠이 들었다.



다음날 새벽 불현듯 잠에서 깼다.

어젯밤까지 분주해 보이던,  외로움에는 하등 관심이 없어 보이던 남편이 어느새 옆에 곤히 자고 있었다.


나는 원망이 어린 눈으로 남편을 노려보았다.

미워서 노려보던 것이 가만히 응시하는 것으로 바뀌었고, 그렇게 한참을 잠든 남편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새근새근 잠든 남편의 얼굴에서 고단함의 흔적이 느껴졌다.  

 

그랬다.

나는 그가 어제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전혀 몰랐다.


그 부슬부슬 비가 내리던 이른 아침, 아내가 떠난 뒤에 두 아이를 챙겨 학교에 보내고, 그 이후에 회사에서 어떤 하루를 보냈을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마음 상하고 자존심이 상하는 순간들이 있진 않았는지,  외국인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면서 때때로 나처럼 끝도 없이 외롭고 서글픈 적이 있진 않았는지, 몸인지 마음인지 어딘지도 알지 못한 채 춥다를 연신 내뱉고 있지는 않았는지...



나는 그에게 그의 하루가 얼마나 고단하고 힘들었는지를 꼬치꼬치 물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굳이 내게  이야기를 꼬치꼬치 풀어놓지 않았다. 그랬다. 그도, 그만 알고 있을 터였다. 그가 얼마나 힘들고 외로운 하루를 보냈는지. 어떤 사투함으로 자신의 삶을 견디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해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그 모든 사투함 속에서 그도 역시

나만큼이나 지쳤었는지도 모르겠다.

하필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추운 12월이라서.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눈물이 핑 돌았다.

너도 나만큼이나 힘들었겠구나...

짠한 마음이 들었다.



나만 그렇다 생각할 땐 끝도 없이 외로웠던 마음이, 그도 그랬구나, 내게 자신의 어려움까지 얹지 않으려는 어쩌면 그것은 사랑이었겠구나 생각하니 한결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내가 힘든 하루를 보냈기에, 그 서글픔을 겪었기에, 겨우 나의 서글픔을 의지해서 이렇게 그를 헤아릴 수 있다 생각하니 그 하루가 그렇게 제 몫을 했구나 싶기도 했다.



그랬다. 외롭고 서글픈 날은 또 찾아올 것이다.

12월은 다시 돌아올 것이고, 비는  부슬부슬 내리고, 우리는 추위 때문인지 외로움 때문 인지   없는  어떤 서글픔과  마주 싸워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나는 알고  있다.


나만 이 싸움을 싸우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인생은 외로운 싸움의 연속이지만,

 외로움을 거름 삼아 누군가의 아픔을 헤어보고 살며시 손 내밀어 품어 안을 수도 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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