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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May 11. 2024

뜻이 있는 곳에 길도 있더라

프랑스에서 다시 대학 생활을 하면서 한국에서 대학시절이 어땠는지를 자꾸만 다시 떠올려보게 된다. 나름대로 열심히 대학 생활을 했던 것 같은데 그래도 돌아보니 그럭저럭 수월하게 지나온 것 같다.


그 시절 내가 지금과는 달리 공부를 그다지 열심히 안 했던 건지... 아니면 세월이 이만큼 흘러서 기억이 가물한 건지... 아니면 어쨌거나 한국어로 했던 공부였으니 한결 마음이 편했던 탓인지...


확인할 길도, 확신할 길도 없지만 어쨌거나 지금 내겐 프랑스 대학이 훨씬 많은 양의 공부를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물론 한국은 대학이 4년제인 반면, 프랑스는 3년제이기에 그렇기도 할 것이다.



프랑스 대학은 CM과 TD라는 두 종류의 수업이 있다. 보통 CM은 대강당 같은 곳에서 이뤄지는 이론 수업인데, 큰 부담 없이 앉아서 열심히 듣고 노트를 필기하면 되니 평소엔 편하지만, 문제는 교수님들이 두 시간 동안 어머어마한 양의 정보들과 이론들을 쏟아놓으시기에 기말고사의 범위가 엄청나다는 데 있다.


반면 TD는 30명가량의 학생들로 이뤄진 소그룹 수업인데, 배우는 양은 CM에 비해 적지만 토론식 수업으로 진행되거나, 과제가 매주 있거나 해서 외국인인 나에겐 훨씬 마음의 부담이 큰 수업이다.


뭐 어쨌건, 어느 수업이건 장단점이 다를 뿐,

힘들기는 매 한가지였다.


CM은 못 알아듣는 게 태반이니 힘들고,

TD는 어색하게 아이들 사이에 있어야 하니 힘들고.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생물학 수업이 첫 수업이었는데 그날따라 15분이나 일찍 도착했다. 자판기에서 커피 한 잔 뽑아서 복도를 느릿느릿 걸어갔다. 너무 일찍 도착해서 어색하게 아이들 틈바구니에 있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여보려는 마음으로.


다행히 강의실 앞에는 별로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때 한 친구가 눈에 들어왔다.


강의실 앞에 푹 퍼질고 앉아서 휴대폰을 뚫어져라 보고 있는 그 아이의 모습이, '나 지금 너무 어색하거든요 아무도 저를 아는 척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도 다른 사람들 눈에 저렇게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다르지 않아 보였던 탓인가,

이상하게 말이 걸고 싶었다.


그 아이 옆에 굳이 가서,

나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그리고 "Bonjour"라고 미소를 띠며 한 마디를 건넸을 뿐이었다. 잔뜩 긴장한 채로 자신의 세계 속에 스스로를 가두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 친구는, 고개를 들더니 활짝 웃어 보였다.


이름이 살로메라고 했다.


이름을 알고 난 뒤 우리는 강의실 문이 열리길 기다리며 계속해서 짧은 대화를 이어갔다.


어디에 사는지, 왜 심리학을 시작했는지, 학교 생활은 어떤지, 무슨 수업이 가장 힘든지...


나 못지않게 적극적으로 내게 관심을 가지며 물어오는 친구의 모습에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술술 나의 어려움도 나누게 되었다.


"나는 이 학교에서 듣는 모든 수업이 좋아. 다 잘 이해하고 싶고, 잘 배우고 싶어. 그런데 언어의 제약 때문에 이해할 수 없는 게 조금 속상하긴 해. 특히 생물학. 너무 어려워."


떠듬떠듬 이어가는 내 말을 끊지 않고 열심히 듣던 살로메가 내게 물었다.


"혹시 내가 너에게 내 필기를 보내주면,

너에게 도움이 될까?"



응? 노트라고?

나는 너무나 놀라고 너무나 기뻐서 귀까지 얼굴이 벌게졌다.


"정말 고마워!!"


그 아이가 내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주었을 무렵 강의실 문이 열렸고, 우리는 각자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문자로 내 메일 주소를 보낼 때까지도 나는 보내주면 너무 고마운 거고, 혹시 안 보내줘도 당연한 거다 여겼다. 왜냐하면 꼭 그렇게 해야 할 까닭이 그 아이에겐 없었으니까. 괜한 기대에 상처 받을까 스스로 워워 마음을 추스리고 있었다.


그러나 살로메는 다음 날 바로 생물학 수업뿐 아니라 모든 과목의 노트를 내게 보내왔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나에게 덧붙였다.


"너를 도울  있어서 정말 기뻐.

매주 너에게  필기들을 보내줄게.

그게 너에게 도움이 된다면."



그 문자를 보는데 왠지 코끝이 찡해졌다.


꿈이 있다고,

 꿈을 향해  보겠노라고  길에 섰지만,

사실은 나는  외로웠던  같다.  


내가 선택했으니 홀로 다 감당해야 한다는 부담도 컸다.


그리고 두려웠다.  실패할까 .  상처받고, 또 혼자 버려졌다 여기며 포기하고 싶어질까 봐.


그런데 그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오려고 할 그 무렵, 살로메가 나타났다.


기적이 일어난 셈이었다.


영화에서만 있는 일인 줄 알았는데, 바라고 기대한 적도 없었던 호의가 이렇게 갑작스럽게 내게로 날아들었다.


하나님의 천사처럼, 그렇게 기꺼이 손을 내밀어 주는  사람이 그날 거기에  강의실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치 퍼즐의 조각들이 하나씩 하나씩 맞춰져 가며 완성된 작품을 만들어내듯이, 나의 애씀과 더불어 타인의 호의가 맞물려 새로운 조각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인생은 점점  아름다운 모습으로 빚어져  것이다.  


나는 더이상 혼자서 애쓰지 않아도 된다.

힘든 순간을 도닥이며 걸어가다 보면 거기에  어딘가에 나를 도울 누군가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살로메가 그랬듯이 말이다.


그 기대가, 스멀스멀 올라오던 두려움을 이기게 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살로메는 1년을 꼬박 내게 일이 주에 한 번씩 자신의 필기를 보내주었다.


그럴 이유가 전혀 없었는데, 귀찮을 법도 한데, 변함없이 꾸준히 그렇게 나의 1년을 도왔다.

도울  있어 기쁘다는 말을 반복하며.

 


나는 결코 혼자가 아니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것을 믿기에 더는 두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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