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동네 아이들은 달랐다
달동네를 벗어나 대구 중심부에 있는 여고로 진학한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충격적인 사실들뿐이었다. 좁은 세계를 벗어나 넓은 세계로의 진입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내가 믿어왔던 사실들은 전복되었고, 나는 나에 대한 개념을 수정해야만 했다.
첫째, 다른 동네 아이들은 우리 동네 아이들 같지가 않다.
나는 다른 도시에서 태어났지만, 대구로 이사를 온 뒤에는 줄곧 이 동네에서 10년이 넘게 자랐기에 이 좁은 세상이 온 세상의 표본인 줄 알고 살았다. 이 동네에서 나는 중산층이었다.(끝내 이 단어를 포기할 수 없기에) 남들이 없는 것을 가졌다. 예컨대, 엄마, 아빠, 그리고 책상, 할머니가 30년 전에 싼 값에 산 오래된 양옥집 같은 것들.
그러나 고등학교에서 만난 아이들 틈바구니에서 나는 갑자기 몹시 초라해진 기분이 들었다.
그 아이들은 학교를 중심으로 뒀을 때 우리 동네 반대에서 온 아이들이라고 했다. 우리 동네와는 전혀 교차점이 없었다.
하교 후에 버스를 타려고 버스 정류장에 서면, 반대편 버스 정류장에 그 동네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 서 있었다.
나는 가만히 그 아이들을 쳐다보곤 했다. 왜 내가 저 아이들 앞에 서면 초라한 마음이 들지? 나는 궁금했다. 나 나름대로 기세등등한 사람이었는데.
가만히 관찰을 하다 보니, 그 아이들은 뭔가 모르게 반들반들 잘 닦인 유리 같이 빛이 난다는 느낌이 들었다. 잘 다려진 교복 때문인가, 아니면 조금 더 비싼 구두 때문인가, 처음에 나는 그것들이 그 아이들이 가진 어떤 물건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그 아이들이 내게는 없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는 느낌이 점점 더 강하게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 날 깨달았다. 그것은 내가 가진 것에 더구체적으로 첨가되는 명사나 형용사였다. 예를 들면교사 아빠, 전문직 엄마 혹은 좋은 직업을 가졌고 부유하며 교양 있고 자상한 부모님과 같은.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나는 중산층이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중산층이 어딘가에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이 모든 것은 내 노력으로 바뀔 수 없다는 사실도.
둘째. 다른 동네 아이들은 공부도 더 잘한다.
뱀의 머리였던 나는 고등학교 진학과 동시에 전교 50등 안팎으로 밀려나고 말았다. 성적이 떨어졌다는 것도 충격이었지만 더 큰 충격은 내 기준에서 나보다 훨씬 더 편하게 공부하는 그 아이들이, 훨씬 더 쉽게 성적을 받는다는 사실이었다.
아이들은 이미 저만치 앞서 있는 느낌이었고, 조급해 보이지 않았다. 그럴수록 나는 더 조급해졌다. 어떻게 따라잡아야 할까, 이미 벌어진 이 간극을 어떻게 좁혀야 할까, 애가 탔다.
나에겐 다 처음인 것들이, 그 아이들에겐 이미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나에겐 너무 어려운 것들이 그 아이들에겐 한결 덜한 것처럼 느껴졌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그 모든 것이 그 아이들에게 더 쉬웠다기보다는, 이렇게 어려울 줄을 미리 알았다는 느낌의 묘한 여유 같은 게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내가 예상치 못한 충격에 허우적댈 동안, 그 아이들은 이럴 줄 알았어, 괜찮아하며 스스로를 달래고 더 쉽게 자신을 도닥이곤 했다.
그리고 그건 결국 부유하고 교양 있고 자상한 부모를 가졌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힘과 열성을 다해 자녀를 위해 친히 정보를 알아보고, 어떤 지점이 어려울지 알려주고, 더 나아지기 위해 필요한 것이라면 무엇이든 지원해 주겠다는 그런 부모 말이다.
생각이 거기에 닿으면
내 마음은 한없이 차가워지는 느낌이었다.
시작도 해 보기 전에 꺾어진 내 마음.
이 모든 것은 내 탓이 아니다.
다, 그런 넉넉함을 가지지 못한 결핍 때문이다....
어쩌면 나는 그렇게 이미 결론을 내렸었는지도 모르겠다. 고작 열일곱의 나이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