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유한 부모, 기회를 두 번, 세 번 줄 수 있는 부모를 가졌다면 인생이 좀 다르지 않았을까.
나는 20대 내내 이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사실 내가 숨기고 싶은 가장 찌질한 모습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부모 탓을 평생 하며 살았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러나 나는 인생의 장애물에 가로막힐 때마다 고등학교 때 만났던 그 반질반질한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특유의 여유를 발산하며, 피어 있는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까르르 웃을 수 있는 그 천진함으로 똘똘 뭉친 아이들.
가시 같은 건 찾아보려야 볼 수 없을 것 같은 그 둥그스름한 인생이, 모나지 않고 가파르지도 않은 그 인생이 부러워서 슬퍼졌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네들의 삶을 잘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그네들과 마음을 터놓을 만큼 친할 수가 없었다. 하굣길이 달랐기 때문이었는지(유유상종이라 했던가), 아니면 그들을 향해 일찍부터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 정의하며 닫아 건 내 차가운 마음 때문이었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그들은 늘 나와 조금은 멀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한 모나지 않고 가파르지도 않으며 가시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인생이라 칭한 그네들은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것을 깨달은 것은 나이가 들고 나서였다.
그 당시 나에게는 부유하고 유복한 가정 + 교양 있고 배운 부모 = 모든 면에서 안정과 여유가 보장된, 성격도 좋고 성공하기 쉬운 자식이라는 일종의 공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거기에 해당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부유하고 유복한 가정과 교양 있고 배운 부모) 때문이라는 확고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
이 믿음이 흔들린 첫 번째 사건은 한 사립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였다.
당시 나는 분당에 있는 한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근무하던 학교는, 전문직 부모님을 둔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더 이상 나는 학생이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아이들과 만나면서 나는 또 다른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첫째, 부유하고 교양 있는 전문직 부모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아이들에게 제공한다.
내가 만났던 한 학생은 사진 기자가 되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을 건네고 한 주가 지나기도 전에, 당시 300만 원짜리 고가의 카메라를 선물로 받았다.
카메라를 메고 학교에 온 아이는 신이 나 보였다. 엄마는 지금부터 모든 것을 기자의 관점으로 보며 냉철하고도 사실적인 사진들을 찍어보라고 조언했다고 했다. 아이는 늘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수시로 카메라를 들이밀어 친구들과 교사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엄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실제 사진 기자와 만나서 조언도 받게 해 줬다.
게다가 2010년 일본에 쓰나미가 발생하자, 엄마는 일본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 아이의 손에 들려주었다고 했다. 기자라면, 그런 곳에서 현장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언과 함께. 그 아이는 큰 미션을 안은 듯, 마치 정말로 사진 기자라도 된 듯이 무거운 마음을 안고 일본으로 떠났다.
여기까지를 지켜본 나는 세상 부러웠다. ‘그래, 내가 원했던 게 바로 저런 거라고!!’ 이렇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기에 이토록이나 좋은 환경을 타고난 걸까, 나는 그 학생이 부러워, 아니 사실은 내 기억 속에 그 얼굴이 반들반들한 그 아이들이, 이만큼은 부모로부터 족히 받고 누렸을 그네들이 부러워서 가슴이 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카메라를 놓아버렸다. 왜 요즘은 사진을 찍지 않냐는 질문에 그 아이는 자신과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더니, 조금 뒤에는 꿈이 없다고 꼭 꿈이 있어야 하냐고 말하기 시작했다.
한 학기 내내 마치 신이 내린 사진 기자인 것 마냥 무겁게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아이는, 일본행을 기점으로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점점 무거워져 가고 진지해져 가던 아이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꿈을 잃어버리고, 포기한 대가로.
둘째, 늘 지나치게 많은 것을 제공받은 아이들도, 늘 부족하게만 느껴졌던 나만큼이나 인생이 무거워 보였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할 때, 예를 들자면 꽤나 어려운 인문학 서적을 읽는다거나, 사회단체 같은 곳에서 자원봉사 같은 것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기특한 마음에 ‘어떻게 이렇게 결정했니?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나를 빤히 쳐다보곤 했다.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그리곤 “엄마가 하라고 해서요”라고 답하곤 했다.
나는 그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내 편에서 보면, 어린 나이에 그런 고급의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기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놀랍고 감탄스러워서 나는 어떻게 너는 이 어린 나이에 이런 걸 알고 이렇게 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가 궁금했던 거였다. 그건 부러움이었다.
부모의 조언이나 도움이 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했던 나는 늘 한 발 뒤떨어져 따라가기 바빴고, 다른 친구들이 하는 것을 보며 따라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학교 안팎에서 만나는 선생님들이 전해주는 새로운 이야기들은 또 얼마나 새로웠던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게 무엇이든,
나는 늘 타는 목마름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져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궁금증, 더 알고 싶고, 경험하고 싶은 절박함. 내가 걷는 만큼만, 내가 몸을 움직여 개간한 만큼만 내 땅이 되는 삶을 살아왔기에 더 알고 싶고 더 갖고 싶고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늘 그득했다.
그러나 내가 만난 아이들은
매사에 조금은 심드렁해 보였다.
내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들을 쉬이 가진 인생이었건만, 간절하기도 전에 주어진 많은 것들, 절박하기도 전에 제공된 모든 것들 앞에 그들은 무료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론 질려버린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스스로 걷고, 움직이고, 쟁취해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인 걸까?
가끔 나는 그런 아이들을 마주할 때면 '이 모든 걸 다 가지고도 너는 도대체 뭐가 문제인거니?'라고 묻고 싶었다. 아주 폭력적인 시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곤 했다. 그건 여전히 질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가져보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을 향한.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어릴 적 내 눈에 그렇게나 반들반들 윤이 나 보였던 그 아이들을 조금 더 가까이서 조금 더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을 때 나는 다른 것들을 보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윤이 나는 줄 알았는데 더 가까이서 보니 그늘이 져 있다. 도대체 왜? 혼돈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내 소신을 굽히는 대신, 내가 보았던 것들을 외면하기로 결정했다.
‘애들이 아직 뭘 몰라서 그런 거야, 이렇게 좋은 것들을 가지고도 좋은 줄을 모르다니. 내가 쟤들 같은 상황이었으면 나는 정말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아’
누구에게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믿으면,
적어도 내 인생이 내 마음처럼 풀어지지 않는 모든 원망을 내가 가진 환경,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환경 탓으로 돌릴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한쪽 눈을 감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