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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리앤느 Aug 22. 2024

"엄마가 하라고 해서요."

부유한 부모, 기회를  ,     있는 부모를 가졌다면 인생이  다르지 않았을까.


나는 20대 내내 이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사실 내가 숨기고 싶은 가장 찌질한 모습 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다.


부모 탓을 평생 하며 살았다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러나 나는 인생의 장애물에 가로막힐 때마다 고등학교 때 만났던 그 반질반질한 아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가질 수 없을 것 같은 특유의 여유를 발산하며, 피어 있는 꽃 한 송이를 보면서도 까르르 웃을 수 있는 그 천진함으로 똘똘 뭉친 아이들.


가시 같은 건 찾아보려야 볼 수 없을 것 같은 그 둥그스름한 인생이, 모나지 않고 가파르지도 않은 그 인생이 부러워서 슬퍼졌다.


그러나 사실 나는 그네들의 삶을 잘 알지 못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나는 그네들과 마음을 터놓을 만큼 친할 수가 없었다. 하굣길이 달랐기 때문이었는지(유유상종이라 했던가), 아니면 그들을 향해 일찍부터 나와는 다른 사람이라 정의하며 닫아 건 내 차가운 마음 때문이었는지 알 길은 없었지만 그들은 늘 나와 조금은 멀리에 있었다.


그러므로 내가 말한 모나지 않고 가파르지도 않으며 가시 같은 건 찾아볼 수 없는 인생이라 칭한 그네들은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이미지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것을 깨달은 것은 나이가 들고 나서였다.


그 당시 나에게는 부유하고 유복한 가정 + 교양 있고 배운 부모 = 모든 면에서 안정과 여유가 보장된, 성격도 좋고 성공하기 쉬운 자식이라는 일종의 공식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내가 거기에 해당될 수 없었던 것은 내가 가지지 못한 것들(부유하고 유복한 가정과 교양 있고 배운 부모) 때문이라는 확고한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


 믿음이 흔들린  번째 사건은  사립학교에서 교사생활을 하면서였다. 


당시 나는 분당에 있는 한 학교에서 교사로 근무를 하고 있었다.


근무하던 학교는, 전문직 부모님을 둔 아이들이 태반이었다. 설령 그렇지 않다 할지라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친구들은 거의 없었다. 더 이상 나는 학생이 아니었지만, 이곳에서 아이들과 만나면서 나는 또 다른 신세계를 경험하고 있었다.


첫째, 부유하고 교양 있는 전문직 부모들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도 더 많은 것을 아이들에게 제공한다.


내가 만났던 한 학생은 사진 기자가 되고 싶다고 엄마에게 말을 건네고 한 주가 지나기도 전에, 당시 300만 원짜리 고가의 카메라를 선물로 받았다.


카메라를 메고 학교에 온 아이는 신이 나 보였다. 엄마는 지금부터 모든 것을 기자의 관점으로 보며 냉철하고도 사실적인 사진들을 찍어보라고 조언했다고 했다. 아이는 늘 카메라를 들고 다녔다.


수시로 카메라를 들이밀어 친구들과 교사들을 놀라게 하곤 했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을 엄마는 모든 인맥을 동원해 실제 사진 기자와 만나서 조언도 받게 해 줬다.  


게다가 2010년 일본에 쓰나미가 발생하자, 엄마는 일본행 비행기 티켓을 끊어 아이의 손에 들려주었다고 했다. 기자라면, 그런 곳에서 현장을 포착할 수 있어야 한다는 조언과 함께. 그 아이는 큰 미션을 안은 듯, 마치 정말로 사진 기자라도 된 듯이 무거운 마음을 안고 일본으로 떠났다.


여기까지를 지켜본 나는 세상 부러웠다. ‘그래, 내가 원했던 게 바로 저런 거라고!!’ 이렇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전생에 무슨 좋은 일을 했기에 이토록이나 좋은 환경을 타고난 걸까, 나는 그 학생이 부러워, 아니 사실은 내 기억 속에 그 얼굴이 반들반들한 그 아이들이, 이만큼은 부모로부터 족히 받고 누렸을 그네들이 부러워서 가슴이 탔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는 카메라를 놓아버렸다. 왜 요즘은 사진을 찍지 않냐는 질문에 그 아이는 자신과 맞지 않는 것 같다고 말하더니, 조금 뒤에는  꿈이 없다고 꼭 꿈이 있어야 하냐고 말하기 시작했다.


 학기 내내 마치 신이 내린 사진 기자인  마냥 무겁게 카메라를 들고 다니던 아이는, 일본행을 기점으로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점점 무거워져 가고 진지해져 가던 아이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 보였다. 꿈을 잃어버리고, 포기한 대가로.




둘째, 늘 지나치게 많은 것을 제공받은 아이들도, 늘 부족하게만 느껴졌던 나만큼이나 인생이 무거워 보였다.


아이들이 무언가를 할 때, 예를 들자면 꽤나 어려운 인문학 서적을 읽는다거나, 사회단체 같은 곳에서 자원봉사 같은 것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을 때 기특한 마음에 ‘어떻게 이렇게 결정했니?라고 물으면, 아이들은 나를 빤히 쳐다보곤 했다. 뭘 그런 걸 묻느냐는 듯이. 그리곤 “엄마가 하라고 해서요”라고 답하곤 했다.


나는 그게 무척 인상적이었다.


내 편에서 보면, 어린 나이에 그런 고급의 경험을 할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기회였다. 그런 의미에서, 놀랍고 감탄스러워서 나는 어떻게 너는 이 어린 나이에 이런 걸 알고 이렇게 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가 궁금했던 거였다. 그건 부러움이었다.


부모의 조언이나 도움이 없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해야 했던 나는 늘 한 발 뒤떨어져 따라가기 바빴고, 다른 친구들이 하는 것을 보며 따라 배우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학교 안팎에서 만나는 선생님들이 전해주는 새로운 이야기들은 또 얼마나 새로웠던가.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그게 무엇이든,

나는 늘 타는 목마름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가져보지 못한 세계에 대한 궁금증, 더 알고 싶고, 경험하고 싶은 절박함. 내가 걷는 만큼만, 내가 몸을 움직여 개간한 만큼만 내 땅이 되는 삶을 살아왔기에 더 알고 싶고 더 갖고 싶고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늘 그득했다.


그러나 내가 만난 아이들은

매사에 조금은 심드렁해 보였다.


내가 그토록 갖고 싶었던 것들을 쉬이 가진 인생이었건만, 간절하기도 전에 주어진 많은 것들, 절박하기도 전에 제공된 모든 것들 앞에 그들은 무료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고 또 한 편으론 질려버린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스스로 걷고, 움직이고, 쟁취해 낼 필요가 없기 때문인 걸까?


가끔 나는 그런 아이들을 마주할 때면 '이 모든 걸 다 가지고도 너는 도대체 뭐가 문제인거니?'라고 묻고 싶었다. 아주 폭력적인 시선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곤 했다. 그건 여전히 질투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가져보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을 향한.

  

그러나 솔직히 말하자면, 어릴   눈에 그렇게나 반들반들 윤이  보였던  아이들을 조금  가까이서 조금  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을  나는 다른 것들을 보기 시작했는지도 모르겠다.


윤이 나는 줄 알았는데 더 가까이서 보니 그늘이 져 있다. 도대체 왜? 혼돈스러웠다.


그러나 나는 내 소신을 굽히는 대신, 내가 보았던 것들을 외면하기로 결정했다.


‘애들이 아직 뭘 몰라서 그런 거야, 이렇게 좋은 것들을 가지고도 좋은 줄을 모르다니. 내가 쟤들 같은 상황이었으면 나는 정말 더 잘할 수 있었을 것 같아’


누구에게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싶었다.


그렇게 믿으면,

적어도 내 인생이 내 마음처럼 풀어지지 않는 모든 원망을 내가 가진 환경, 내 힘으로 바꿀 수 없는 환경 탓으로 돌릴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나는 한쪽 눈을 감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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