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깐느의 밤, 멘토와 함께 춤을_1부

by 해피써니

레드카펫, 반짝이는 드레스,

쏟아지는 셔터 소리.

나에게 깐느는 늘 스크린 속의 세계였다.

남프랑스 어딘가, 거리마다 낭만이 흐르고,

영화 같은 순간만 존재할 것 같은 그곳.




서른다섯의 봄.

평소처럼 밀려드는 업무에 허덕이던 오후였다.

카페인의 효력이 슬슬 사라질 무렵, 프랑스 본사에서 메일 한 통이 도착했다.

‘... International Seminar...’

그 아래,

낯설면서도 또렷한 단어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C.a.n.n.e.s.


‘… 깐, 깐느? 설마 내가 아는 그 깐느?’


그리고 몇 분 뒤, 아시아 지역 총괄 H에게서 한국어로 된 메일이 이어졌다.

“이번 인터내셔널 세미나에서 아시아 대표로 한국팀이 베스트 프랙티스 프레젠테이션을 하면 좋겠어요.

미팅 가능한 일정 알려줄래요?”


그때 나는 팀장이 된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던 시기였다. 그래서 ‘설마 나겠어?’ 하고 넘겼다. 그런데 정말로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났다. 진짜, 내가 깐느에 가게 됐다. 그리고 전 세계 임원들 앞에서 영어로 발표까지 하게 됐다.

내 첫 글로벌 프레젠테이션 무대가 ‘깐느’라니. 그 이름만으로도, 지금도 여전히 꿈처럼 느껴진다.


그때 내 모습을 영화로 만든다면, 빨개진 두 볼을 감싸 쥔 손, 애써 웃는 얼굴 아래로 동동 구르는 발이 보였을 것이다. 화면은 클로즈업, 배경음은 경쾌한 클래식.

제목을 붙이자면,

<깐느에서 한국인 팀장으로 살아남기>.


갓 팀장이 된 나에게 그 심장 떨리는 기회를 건넨 사람, 아니, 어쩌면 슬쩍 밀어붙인 사람은 바로 H였다.

업계에서 오래도록 존경받아온 리더, 그리고 나에겐 멘토 같은 존재. 교육팀 출신이자 한국인인 그녀는 한국 지사를 거쳐 프랑스 본사로 자리를 옮긴 뒤, 아시아 지역의 세일즈와 교육을 총괄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H는 마치 공작새 같았다.

날개를 펼칠 때마다 섬세함과 유머, 인간미와 프로페셔널함이 은은하게 퍼졌다. 디테일에 강하고, 업무는 깔끔하고, 넘치는 센스에, 말 한마디 한마디가 따뜻했다.

가끔은 정말 진심으로 궁금했다.

‘밥은 먹고 일하는 걸까?’

‘잠은 도대체 언제 자는 거지?’


그런 그녀는 언제나 공정한 리더였다. 보통 글로벌 세미나 발표는 매출 규모가 큰 중국이나 일본이 맡는 게 암묵적인 공식이었지만, H는 각 나라의 강점을 기막히게 포착해 내는 사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번엔 한국 차례였다.


“드디어 한국이야. 서비스 평가에서 전 세계 1위를 한 비법을 멋지게 무대에서 풀어내봐.”


그렇게 운명처럼 결정된 깐느 출장.

나에게는 이제 두 개의 미션이 생겼다.

하나는 영어 발표, 다른 하나는 다이어트.

우선 발표 스크립트부터 썼다. 프랑스 본사 피드백을 받아, 다듬고 또 다듬었다. 강약 조절, 표정, 시선 처리까지. 머릿속에서 무대 리허설이 끝없이 반복됐다.


한편으로는 식단 조절도 시작했다. 세미나 파티에서 입을 드레스에 몸을 맞추기 위해서였다.

사십 대인 지금은 상상도 못 할 일이지만, 삼십 대 중반의 내 몸은 의외로 반응이 빨랐다. 한 달 동안 먹고 싶은걸 참고, 비행기 안에서도, 깐느 호텔방에서도 스크립트를 외우고 또 외웠다. 밤잠을 설치며 보낸 그 시간 덕에 체중은 5kg 가까이 빠졌다. 발표용 수트와 파티용 드레스 모두, 다행히 무리 없이 맞았다.




세미나는 모든 것이 낯설었다. 전 세계에서 모인 세일즈 매니저와 트레이닝 매니저들이 한자리에 있었다. 발표도, 식사도, 스몰토크도 모두 영어. 쉬는 시간과 식사 시간조차 작은 프레젠테이션 같았다.

웃으며 버텼지만, 긴장은 점점 깊어졌다. 무대에 오를 날은 바로 내일. 그래서 저녁에 예정된 칵테일파티는 과감히 포기하기로 하고 조심스럽게 H에게 말을 건넸다.


“오늘 파티, 사실 가고 싶긴 해요. 그런데 발표 준비 때문에 마음이 너무 복잡해서요. 드레스 입으려고 다이어트까지 했는데… 빠져도 괜찮을까요?”

H는 내 표정을 읽고는 다정하게 웃었다.

“그치, 많이 긴장되지. 나 같아도 그럴 것 같아. 그래도 깐느의 석양은 좀 특별하잖아. 우리, 조금만 즐기고 일찍 돌아가서 연습하는 건 어때?”


그 한마디에 금세 마음이 풀렸다. 그렇게 나는 드레스를 입고, 메이크업을 하고, 하이힐을 신고 깐느 앞바다로 향했다. 해가 밤 9시까지 지지 않는 도시, 저무는 석양이 샴페인 잔 속에 담겨 반짝이는 것 같았다.

일본팀의 장기자랑이 시작됐다. 나는 얼떨결에 옆에서 탬버린을 쳤다. 무대가 끝나자 H를 바라보며 눈빛으로 말했다.

‘저, 최선을 다했어요. 이제 들어가도 될까요?’

그녀는 내 마음을 읽었는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다가왔다.

“지금 아시아팀 거의 다 빠졌어. 우리까지 가면 전멸이야. 미안하지만… 우리라도 남자.

내일 발표는 괜찮아. 잘할 수 있어. 그냥, 즐기자!”


아, 이럴 수가.

샴페인을 한 잔 더 들이켰다.


무대에선 프랑스 본사팀이 팝송을 부르고 있었고, 바로옆 스피커는 귀를 찢을 듯 울려댔지만, 그 순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눈에 들어온 건, 무대 옆에서 환히 웃으며 춤을 추고 있는 H였다.


‘그래, 나도 오늘을 살아보자. 내일은 어떻게든 되겠지.

한 달을 연습했으니까 내 몸과 마음이 기억해 줄 거야.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냥 불태워보자.’


내 옆에는 오랫동안 존경해 온 그녀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동시에 무대 중앙으로 걸어 나갔다.



2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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