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하루에 두 번 하는 거 아니다.
어른이 되면 방학이 그리워진다. 물론 숙제도 많았고 공부도 해야 했지만 한 숨 돌릴 수 있는 여유시간이 있다는 건 그 자체로 큰 의미였다. 인생을 살면서 쉬어가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 덴마크가 행복한 나라일 수 있는 이유는 사회가 이런 시간을 인정하고 지원하기 때문이다.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진학하기 전, 취업 준비, 직장을 옮기는 시기들. 덴마크에선 큰 결정을 앞두고 잠시 고민이 필요한 시기에 여러 제도를 통해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해준다. 에프터스콜레의 바탕엔 이런 문화가 깔려있다.
버스를 타고 또다시 눈 덮인 덴마크 들판을 달려 작은 마을 속에 자리 잡은 퍼러바일러(Fårevejle) 에프터스콜레에 도착했다. 주소 상에는 학교 앞이라고 나와있는데 차에서 내려보니 어디가 학교인지를 알 수 없었다. 고만고만한 건물들이 여럿 있을 뿐, 이곳의 학교는 우리에게 상식처럼 되어있는 큰 정문과 현판 같은 것이 없었다. 학교 입구가 어디인지 못 찾아 헤매는 사이 교장선생님 프랭크(Frank)가 나와 우리 일행을 반겨줬다. 그의 안내로 먼저 식당으로 이동해 간단하게 차려진 간식을 먹었다. 상차림에서 소박하지만 세세하게 신경 쓴 배려가 느껴졌다. 이번에도 교장선생님의 학교 소개를 먼저 듣고 선생님들과 학생들에게 이곳 이야기를 들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에프터스콜레는 고등학교를 준비하는 과정이지만 단순히 진로 탐색을 위해 여러 가지를 해보는 과정은 아니었다.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를 결정하기 전에 사회라는 공동체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행복하게 사는 법을 배우는 곳, 기존 교육에서 벗어나 학교의 틀에서는 배울 수 없는 것들을 조금 다른 방식으로 배우는 곳이었다. 다만 이 전환과 깨달음의 시기를 중학교 이후 1년 과정으로 설계함으로써 남은 교육 과정 속에서 자신의 길을 찾는데 중요한 기준이 되도록 돕는 거였다. 역사가 100년이 넘었다는 이 학교는 그 세월만큼이나 교육철학도 깊었고 좋은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다.
프랭크의 이야기 중 특히 인상적이었던 건, 학교가 공동체를 가르치기에 앞서 우리가 함께 하고 있다는 것 그 자체를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면서 꺼낸 것이 ‘순서’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곳의 선생님들은 학교에서 의사결정을 내릴 때 아이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순서에 대해 고민한다고 했다. 참 절묘하고 곱씹어 볼만한 이야기였다. 순서라는 건 관계가 눈으로 보이고 실체로 드러나는 지점이다. 무엇이 먼저인가는 결국 어떤 관계가 더 중요한가에 의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중요한 관계들이 순서를 통해 보이고, 순서를 정한다는 것은 그래서 어렵다.
선생님들이 보여주는 순서를 통해 아이들은 그들이 함께 하는 존재로서 얼마나 존중받는지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관계의 소중함을 말로 가르치는 게 아니라 삶으로 가르친다는 건 이렇게 하는 거구나 싶었다.
이곳에서 일하시는 선생님 두 분과(요하네스, 헤이디) 학생 두 친구(요나스, 피아)와 이야기하는 시간도 가졌다. 학생들은 역시 이곳에서의 생활에 만족하고 있었고 선생님들은 진정한 교육활동을 하고 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내 관심을 끈 이야기들은 훌륭한 대답들 보다는 주로 '역시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들게 하는 것들이었다. 학생들 중 동양인 남자아이 요나스에게 에프터스콜레에 온 이유를 물었을 때 그 친구의 대답은 ‘아빠가 보내서’였다. 역시 이런 친구도 있는 거였다. 물론 이곳 생활에 무척 만족한다고 했다.
같이 갔던 한국 선생님은 덴마크 선생님들에게 교사 생활에 관한 질문을 했다. 학교 내에서 수업 개발을 위해 다른 선생님들과 함께 연구를 하는지, 교사 조합원인 다른 학교 선생님들과는 얼마나 교류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었다. 교사로서의 열정도 크고 노동조합 같은 공동체 문화가 잘 되어있는 덴마크 선생님들의 활동은 뭔가 다르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대답은 딱히 그런 건 없다는 거였다. 코펜하겐의 학교에선 교류를 위해 교환수업을 했는데 애들이 땡땡이를 많이 친다고 했던가. 우리보다 훨씬 더 이상적인 모습이지 않을까 했는데 별로 그렇지 않았다. 인프라와 제도는 잘 되어 있지만 겉으로 보이는 사람들의 수준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 흥미로운 지점이었다.
이날 이야기에서 인상적이었던 또 하나는 아이패드였다. 이곳에서는 교과서 대신 아이패드를 수업에 적극 활용한다고 했다. 우리나라에서 학생들이 아이패드로 수업을 받는다면 어떨까? 쉽게 단정할 수는 없지만 여러 걱정이 앞서는 게 사실이다. 이곳은 그런 걱정이 없는지 물었는데, 그들은 아이들을 믿는다고 했다. 페이스북이나 딴짓을 할 수도 있지만 어차피 앱에 관해서는 애들이 더 잘 알기에 스스로 관리하게 한다고 했다. 교육적인 면에서 보면 교과서에 있는 걸 수동적으로 듣는 것보다 아이패드로 직접 해보면서 알게 되는 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라고도 이야기해줬다.
에프터스콜레 두 곳을 다니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믿는다’였다. 그들의 이야기를 다 적지는 않았지만 학생들은 선생님을 믿고, 선생님은 학생들을 믿고, 학부모도 선생님을 믿고, 선생님들은 정부를 믿고, 정부는 학교를 믿었다. 이건 확실히 중요해 보였다.
설명이 끝나고는 학교를 둘러보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에는 둘러보는데 얼마 안 걸릴 것 같았는데 생각보다 학교가 꽤 컸다. 크고 높은 건물은 없지만 마치 스머프 마을처럼 작은 건물들이 서로 옹기종기 모여있고 내부로도 이어져있었다. 아마도 100년이 넘는 역사 속에서 하나씩 세워지며 지금의 모습이 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자세한 모습은 이 학교 홈페이지에서 찾은 유튜브 영상을 참고하시길. (이 글의 마지막에 있다.)
수업공간을 둘러본 후 마지막으로 기숙사를 둘러볼 때는 다들 호기심에 집들이 마냥 우르르 몰려들어갔다. 남자 셋 여자 셋이 방은 따로 쓰지만 거실은 같이 쓰는 실제적으로는 한 집에 사는 형태의 기숙사였다. 두근두근한 청춘 로맨스 만화에 나오는 딱 그런 환경이었다. 이것 때문에라도 입학하는 친구가 있지 않았을까? 분명 나만 부러워했던 것은 아니었을 거다. (거실 벽에는 피임방법이.. 19금 로맨스 이려나)
공간을 둘러본 후에는 마지막 일정, 강당에서 또다시 친선 축구 시합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여자 아이들도 같이 축구에 참여하기 위해서 몸을 풀고 있었다. 오연호 대표님이 혼자 의욕에 불타고 있는 가운데 나머지 일행은 다들 오전에 너무 열심히 뛴 탓인지 조금 망설이는 눈치였다. 나도 고민을 하다가 여자 애들하고 섞여서 하면 조금 널널하지 않을까 하며 잠바를 벗으려는데, 뻥! 몸을 풀고 있던 덴마크 여자아이가 기성용처럼 강슛을 날리는 것이었다. 음. 역시 축구는 하루에 두 번 하는 건 아니었다. 오대표님이 내게도 같이 뛰자고 말하는 순간 나는 옆에서 망설이고 있던 민호 군을 적극적으로 등을 떠밀었다 추천했다. 착한 민호는 정말 열심히 뛰었다. - 형이 미안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