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조차 버거운 나에게 연애와 자유란.
나에게는 전조증상이 있다. 마음이 심란하거나 무언가 해결되지 않는 일들이 있으면 집을 돌보지 못하여 물건이 비이상적인 곳에 자리잡아서 핸드폰 놓을 곳 조차 애매해지고, 머리카락은 그물망을 이룰 정도로 발 디딜 곳을 위협한다. 그리고 그것과 동화되어 살아간다. 원체 결벽증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라 물건이 제 자리에 있지 않은 게 낯선 일은 아니지만 이 글을 쓴 데는 이유가 있다.
어른이 된다는 건 치우지 않을 자유가 있다고 생각했다. 카오스 속에 나름의 질서가 있다는 말로 변명할 의무에서 벗어난다는 말이다. 그렇게 잔소리에 고통받던 나날들을 생각하면 이는 분명 기뻐할 일인데, 이제는 이게 이상한 시그널로 다가와 내 공간, 내 마음을 울렁이기 시작한지는 1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일을 시작하고 나서는 나를 돌보는 일은 무조건적으로 부차적인 일이 되어버렸다. 오늘 낮에 상사가 나에게 무심코 던진 말의 끄트머리에 매달려있는 묵직한 의미를 곱씹고, 어제 내가 느꼈던 부족한 부분을 제대로 채워내지 못한 오늘과 바쁠 내일에 체념하고, 언제든지 내 자유시간을 침범하는 업무의 폭력성에 젖어들어 기꺼이 내 시간을 할애하느라 내 내면 따위는 어떻게 되어도 상관 없다는 양 방치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지 못한 채로 누군가를 만나는 건 굉장히 위험한 일이었고, 지금도 위험한 일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다. 직전에 만났던 사람과의 연애에서 나는 이 바쁜 시간 외의 모든 시간들을 그 사람에게 쏟는 순애보적인(폭력적인) 을이 되었고, 지금 만나는 사람과의 연애에서는 그 을을 방치하는 무심하기 짝이없는 갑이 되었다.
상처받던 내가 상처 주는 내가 되자 도저히 참을 수 없어서 심리 상담처를 수소문했다. 몇 십년간 제 몸을 방치했기에 건강검진을 무서워하다, 더는 미룰 수 없다는 자녀의 등쌀에 건강검진을 신청하고 기다리는 이 처럼 상담 일자를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과연 나는 얼마나 내 내면을 방치하고 있었을까. 판도라의 상자일지, 그렇다면 맨 마지막에는 어떤 트리거가 남아있을지 잘 모르겠으나 이제는 마주해보려 한다.
일의 외적인 부분에 있어서 무언가에 대한 결심만 N번째고 그 끝이 알찼던 적은 별로 없으나, 이번만큼은 내 삶이 저당잡힌 만큼 끝까지 해 보려한다. 눈에 보이는 작은 실밥부터 풀어나가다 보면 가장 굵직하게 꼬여있는 실타래를 마주할 수 있을거라 믿으며 이 글을 마무리 해 본다.
p.s. 서울에 이렇게나 심리상담하는 사람이 많았던가. 상담 일자를 잡기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벌써 이 글을 적는 건... 이렇게 있다가 포기할 내 자신이 보여서 스스로와 협의서를 작성하는 셈 치기 위한 것. 첫 상담까지 힘을 내어 보겠다.
이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의 하루는 무탈했길. 불쑥 자란 눈썹을 다듬고, 손에 핸드크림을 듬뿍 발라주며, 흥얼거리며 책상을 치울 여유가 있는 오늘이었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