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세인 Sep 03. 2020

이별보다는 과정에 가치를 둘 것

어느 날 밤, 이별을 알려오는 친구의 이야기로부터.

    어젯밤 나의 친구가 전화를 해왔다. 자신답지 못하게 시작한 급한 연애가 끝이 났다고. 평소에 신중을 기하는 본인인데 이번 연애는 영문 모를 이유로 이르게 시작한 연애였다며, 애초에 안될 일이며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전해왔다.

 '자신다운 연애가 뭔데?' 머릿속으로 자문을 구하는 와중에 한 마디 더 보태는 친구다.

"나 답지 못했어, 이제 연애에 신중해질래"


    모순이다.

    만날 구석이 없다면서 연애를 하고 싶다던 본인의 모습은 금세 잊었나 보다. 잊었다고 뭐라고 하는 게 아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보자.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연을 만들 기회는 줄어드는데, 신중해지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무엇인가. 딱 첫눈에 그 연애의 끝이 해피엔딩이라고 장담할 수 있는 기회들만을 취하겠다는 것인가. 혹은  감정적인 상처를 입지 않기 위해 신중이라는 그럴싸한 포장으로 이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는 것이 아닐까? 그 날밤의 전화 내내 친구의 말이 욕심 혹은 변명이라는 생각들의 연속이었다. 물론 친구를 위로해주는 건 잊지 않았다.


 '완전히 감정 낭비였어.'

     이별을 함으로써 그 간의 울고 웃었던 추억들이 한순간에 '낭비한 감정' 정도로 전락한다. 길었던 연애도 나쁘게 헤어지고 나면 그 끝에 대해서 곱씹게 되어 더욱 이별이라는 존재 자체만 선명해진다. 결국 투명한 물에 떨어진, 모든 구역에 퍼져나가는 진한 검은 물감 한 방울과 같은 '이별'이라는 존재 하나로 그 이전의 좋은 기억들마저 얼룩져버린다. 짧았던 연애라면 더욱이 '시작하지 말걸'과 같은 말로 결국 이별을 마주한 자신을 책망할 것이다. 짧으면 더 가치 없게 여겨진다. 별 것 아닌 사람과 같은, 별것 아니었던 관계와 같은, 그런 미미한 존재로.


    그런 논리라면, 이별이라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으면 했던 연애 자체가 그렇게 전락할 일이 없어지게 된다. 이별을 하지 않는 상황이라 함은, 솔로 상태를 유지하는 일이나 결혼이라고 할 수 있겠다. (물론 결혼을 하고 나서도 그 관계는 보장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주의지만) 결혼 그 외의 관계들은 모두 이별을 맞이하게 되니까, 결국 자신의 인생에서 많던 연애 중 그 하나만이 정답이고 낭비 없던 진정한 연애로 남는 것이다.

    하지만 그 명제를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한 번의 연애를 제외한 모든 만남들은 낭비로 전락돼야 하는가? 즉, 그 정답에 가까운 한 번을 제외한 모든 연애는 이별을 한 연애니까 그만한 가치가 없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연애의 가치를 이처럼 '이별'에 두는 게 맞는 걸까.


    나의 과거를 돌이켜보자면, 짧게 만났던 상대 누구누구와 같은 경우는 떠올려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종종 그렇게 같이 웃던 때가 그리울 때가 있다. 상대방과 다름을 인정하고 어느 순간에 헤어지더라도, 그 연애에서 내가 그렇게나 밝게 웃고, 빛났던 몇 순간만큼은 온전하게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이별을 했다고 해서 그 사람과 사귀었던 순간들, 그리고 나의 좋았던 모습들까지도 다 잊고 싶지는 않다. 아마, 그렇게 잊어봤기에 가능한 말일지도 모른다.


 결국 연애의 가치는 이별이 아닌, 본인에게 둬야 한다.

    그 연애로부터 내가 뭘 배웠는지. 내가 어떤 부분을 나쁘게 생각했고 어떤 부분을 좋게 생각했는지,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뭔지 곰곰이 생각해 볼 수만 있다면, '조금 더 성장한 나'라는 사람에게 그 연애는 단순하게 잊어야 하는 순간은 아닐 것이다. 과거를 부정할 필요가 없어진다. 연애는 그렇게 계속되어야 한다. 사귀었던 사람과의 사진들을 지우고 나면 내가 행복해했던 순간마저 지워져서 내 삶의 일부 혹은 청춘이 사라진듯한 느낌이 들지 않기 위해서는, 연애를 하는 도중에도 연애가 끝난 다음에도 최우선의 가치는 '나'로 두어야 한다. 본인을 부정하는 사람에게 다음 연애가 더 나을 거라는 보장이 가능한 걸까?


    헤어지고 나면 나에게 남는 건 나뿐이다. 결국 그 어떤 연애를 하더라도 나는 나로 존재하며 삶을 계속 살아가야 한다. 이별을 하고 힘들어하는 마음을 친구에게 털어놓는 것도 극복하는 데 한계가 존재하고, 이별을 탓하며 관계 자체를 부정할수록 본인만 힘들어진다. 결국 자신의 선택을 후회하는 모습 그 정도에 머무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 관계에서 진심이었고, 최선을 다했다면 지난 과거들을 통째로 잊지 않아도 된다. 떳떳하게 진심이었던 자신을 인정하며 다독이고, 행복해했던 본인의 모습만을 기억에 남기면 그만이다. 상대방과 연애를 하는 동안 본인에게 신경을 써주지 못한 시간만큼 스스로에게 더 투자하면서 그렇게 다음 사람에게 진심일 준비를 하면 된다, '부디 다음 사람은 같은 결의 진심인 사람이길' 하고 바라면서. 그 이상으로 인연을 위해서 내가 힘쓸 수 있는 것은 없다. 이런 마인드로 살아가면서 많이 만나보라는 게 아마 사람들이 흔히들 말하는 많이 만나보라는 뜻이지 않을까 싶다.


    결국 '달라지는 나'에 가치를 두고 연애라는 확률의 게임을 해야 한다는 거다. 오래 알고 지내던 사이일 땐 괜찮다가 관계가 다르게 정의되면 영 딴판인 모습을 드러내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나와 텔레파시가 통하는 상대가 나와 마냥 행복한 연애를 할 수 있는 '그 상대'일지 관계가 시작되기 전에 판별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그저 '나와 같은 곳을 바라보는 사람이길'하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기회들을 잡아보는 수밖에 없다. 연애에서 가치를 '관계' 그 자체에 둔다면 이별이라는 변수로 인해서 그 가치가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그 관계로 인해서 무언가를 배우든, 본인이 싫어하는 점을 발견하든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 얼마나 발견하느냐를 중심으로 둔다면 '이별'은 내 순간들을 앗아가지 못한다. 과거의 나도 사랑받아 마땅하다. 본인을 부정하면서까지 이별을 겪지 않았으면 좋겠다.

작가의 이전글 연애의 끝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