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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너나나나 Jul 04. 2021

기억이 희미해지는 속도

 

 일주일에 한 번씩 한국에서 사는 호주인 친구와 언어교환 목적을 위해 통화를 한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한 주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면서 지난 금요일에 내가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하려고 하는데 정말 순간적으로 뇌가 정지되거나 머릿속에 지우개가 있는 것처럼 금요일에 기억이 떠오르지가 안았다.  여러 차례 다시 생각 해 내다가 간신히 기억을 찾긴 했지만 고작 2일 전에 있었던 일이 삭제된 것처럼 아예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일을 했는지는 기억이 나는데 당최 어딜 가서 뭘 했는지 자세한 것들이 생각나지 않았다. 일을 한 건 알겠는데 왜 기억이 삭제된 건지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이제 며칠 후면 만으로 서른이다. 친구들은 이미 31살이 되었지만 나는 외국에서 있다는 이유로 아직 20대라고 으스대는 맛에 지냈는데 이젠 이마저도 할 수 없게 된다. 나이가 들면 몸만 늙는 것이 아니라 뇌도 늙는다는 것을 오늘 처음 실감했다. 원래도 건망증이나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이렇게까지 단기 기억이 희미해지다 못해 아예 삭제되는 경우는 난생처음이다. 매일 같은 일을 반복하는 일반 직장인도 아니고 책임져야 하는 아이가 있는 엄마도 아닌데 어떻게 기억력이 이리 감퇴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금요일에는 아침에 늦잠을 자고 11시쯤 뭉그적 일어나서 점심으로 사골곰탕 육수를 사 와서 닭과 밥을 넣어 닭곰탕을 해 먹었다. 요즘 넷플릭스에서 인기 있는 투핫이라는 미국 어른 버라이어티를 3시간 시청한 후 30분 정도 영어 공부를 했다. 원래 5시부터 하루 알바를 잡아놓은 게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일이 취소되는 바람에 다른 알바를 바로 구했고 새로 구한 당일 알바가 6시에 시작한다기에 침대에 누워서 유튜브를 보다가 5시 30분쯤 집에서 천천히 나왔다. 차를 끌고 시티에 가서 미리 알아보고 왔던 유료 주차장을 3바퀴나 돌아서 헤매다 주차한 후 6시가 조금 넘어 허겁지겁 일하는 레스토랑으로 뛰어갔다.

 카운터 직원에게 일하러 왔다고 말하니 나를 2층 행사가 있는 곳으로 안내해주었고 그곳에서 유니폼 체크무늬 예쁜 셔츠 그리고 하얀색 기다란 앞치마를 받았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후 화장실 위치, 오늘 행사 일정, 어떤 일을 하면 되는지 등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건설회사 직원들의 이른 크리스마스 기념행사였는데 사람들은 7시가 넘어서야 하나둘씩 도착했다. 나처럼 당일 알바로 온 여성분과 수다를 떨면서 7시까지 기다리는데 이 여성분은 꽤 젊어 보였으나 아들이랑 딸이 각각 19살 20살이라는 이야기를 듣곤 화들짝 놀랐다. 남아프리카에서 오셨다는 이 분과 틈만나면 수다를 떨면서 일을 하니까 재밌고 시간도 빨리 가서 참 좋았다. 처음에는 음식을 들고 다니면서 사람들에게 권하며 서빙을 하였고 나중에는 빈 접시와 음료를 치우고 마지막에는 맥주나 음료 유리잔을 식기세척기에 넣고 돌린 후 천으로 물기를 닦는 일을 했다. 끝난 시간은 밤 12시, 주차장에 돌아가서 14불 50센트 돈을 결제한 후 집에 오니 1시가 다되어갔다.

 이렇게 금요일 하루를 생각보다 많은 것을 하며 보냈는데 어떻게 이틀이 지나고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을까. 이렇게 글로라도 남겨놓지 않는다면 아마 이날 하루는 아예 내 인생에서 지워지는 날이되겠지, 이제 내가 믿을 것은 나의 뇌가 아니라 내가 남기는 기록들이 전부다. 이 행복한 순간순간이 지워지지 않길 바라며 오늘도 나는 글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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