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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리스 Oct 03. 2022

[詩] 기억의 서가


기억의 서가 


 이 책을 아버지께 전합니다. 


 예전부터 늘 궁금했던 것입니다. 전한다는 것과 바친다는 것의 다름 말입니다. 전한다, 하는 것은 말 그대로 제가 아버지께 건네어 주는 것인데 그렇다면 이 글이 언젠가는 읽혀지게 된다는 것일 테지요. 그렇다면, 저는 바치겠습니다. 이 글은 그저, 그 언젠가 저금통 배를 갈라 제가 아버지께 사드린 화장품 선물 세트정도로 취급해주세요. 아버지는 고맙다 하시며 자동차 뒷좌석에, 트렁크에, 집 현관 근처에 두었다가 먼지가 몇 톨 쌓일 때 즈음 보이지 않는 서랍 속으로 이 책을 가져가시겠죠. 자물쇠를 걸고 열쇠를 돌려 잠그고 한참 다른 생각을 하다가, 열쇠를 분실해주세요. 저를 잊기도 전에 묻어주세요. 원래 그랬던 것처럼 당연하게. 우주가 영원의 안부를 묻지 않듯이, 풀잎이 불어오는 바람의 근원을 궁금해 하지 않듯이. 


 아버지, 저는 책입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몇 번의 봄―그 나른함들―과 너무 뜨거워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신물 났던 여름들과, 어김없이 매독 같았던 가을들, 그리고 그리고 새벽 버스 창가에 핀 성에 같은 겨울들을 나고 나니 책이 되어있었습니다. 배와 등에는 거북이 등처럼 딱딱한 표지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온 몸을 덮고 있었어요. 표지는 얇은 목판과 잘 무두질된 가죽 표피로 둘러싸여 있는데, 이 때문에 책벌레가 쉴 새 없이 몸을 긁어대어 밤마다 뒤척이게 됩니다. 아버지는 책이 되어보신 적 있으신지요? 내장이 저마다 다른 글자를 품은 한 장 한 장의 접지로 채워져 본 적, 없으시겠죠? 몇 마리 책벌레 꼬마들에게도 이름이 있다는 것도 모르실테지요. 아이라면 좋아하질 않았던 아버지니까요. 고슴도치도 제 자식은 함함하다는데, 역시 아버지는 고슴도치가 아니었던 걸까요? 아버지. 그네들의 이름은 그리움입니다. 그리움 하나는 다른 그리움을, 또 다른 그리움은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어떤 하나의 그리움을 불러오고…끝에는 모두 갉아 먹혀 그 자체가 그리움이 되곤 하지요. 그 감정은 쌀알 같아서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본래의 맛을 잃고 스스로 퇴색합니다. 


때로 저는 그리움의 대상이 아버지인지 아니면 아버지가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존재했던 제 유년 시절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길을 잃고 마는 건 무의식이 멋대로 꾼 악몽 때문에 베갯잇이 축축하게 젖어버리는 것과 같아요. 형광 별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은 사각 천장을 보다 잠에 들면 가을의 유전자에 심어진 매독 균을 이기지 못하고 하얗게 굳어버린 매미의 등이 보입니다. 그것은, 위층 단칸방엘 살다 야반도주하듯 떠나버린 여덟 살 내 친구 지희의 작은 등이었다가, 살아생전 해도 들지 않는 골방 벽면을 닦던 외할머니의 곱은 등이었다가, 외로움에 살해당하기 직전 아파트 난간에 걸터앉은 어느 노인의 툭 불거진 등뼈로 변모합니다. 애수라는 사인으로 제 몸에 새겨진 삶의 단상들이 불쑥 불쑥 튀어나오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빗줄기가 유성처럼 허공에 나리는 오늘 밤 같은. 지린내 절은 전단지로 그득했던 전봇대와, 유리조각이 담벼락 능선을 타고 반짝이던 저녁시간, 그리고 불현 듯 들려오는 고양이 울음소리, 흙먼지 자욱한 공터에서 동네 코흘리개들과 함께 나누어먹던 과자의 맛, 멀리서 타던 오뉴월 노을의 냄새, 한밤중 깨어 들었던 자동차 타이어가 도로를 스치는 소리, 옆집 아주머니의 설거지 소리, 꼬마의 피리소리, 포대기로 나를 둘러업고 부르던 외할머니 노래 소리, 찌개가 끓는 소리, 그 모든 단면들을 혈관이 비칠 만큼 얇게 썰어내어 제 몸 곳곳에 붙여두고 싶습니다.


 아버지, 바다를 보며 골몰하던 예술가가 그 자리에서 죽어 꽃이 되고 그 꽃이 시들어 거름이 되고 거름은 비를 만나 바다로 갔다는 이야기를 아시는지요. 저는 그리운 것을 그립다 말하지 못해 활자를 품은 책이 되었습니다. 꽃이 되지 못한 것은 다만 아직 제 계절이 오지 않은 까닭이겠지요. 그 언젠가, 아주 먼 훗날 아버지의 가벼운 회한이 제 책장 속으로 흘러들면 그때 이 책은 읽혀지겠지요. 그러나 저는 그 전에 한 줌 거름이 되어 드넓은 바다로 녹아들고 싶습니다. 당신의 찰나의 눈물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해수海水로 가렵니다. 매일 수평선이 해를 놓아주는 곳으로― 수취인을 잃고 떠도는 한 권의, 작자 미상의 서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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