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엔딩. 일상인 듯 여행인 듯
"엠디님 저도 아이랑 제주도 한 달 살기 가보려고요."
"가지 마세요."
"네?"
같이 생방송 준비하던 PD가 내 인스타그램에서 제주도 한 달 살기를 다녀온 것을 봤다며 말을 걸었다. 단 1초도 걸리지 않았던 나의 대답에 상대방은 놀란 듯했다.
"피디님 생각해보세요. 제주도에 가면 유치원 못 보내요. 어린이집도 못 가요. 그럼 아침에 눈 뜰 때부터 잠들 때까지 24시간을 30일 동안 떨어지지 않고 같이 있는 거예요." 나는 한마디를 더 붙여 방점을 찍었다.
"그리고 삼시세끼 애랑 밥상 전쟁 치른다고 생각해봐요."
내 말 한마디에 1초 만에 한 달 살기 마음을 접은 우리 PD님 결단력도 대단하다. 결국 10일 동안 알차게 제주도 여행 다녀오신다고 한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아이와의 한 달 살기는 분명 좋은 기억이고 좋은 추억이었다. 고난(?)의 시간을 견디고 전역한 자만이 추억할 수 있는 특권 같은 거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하루하루가 너무 빨리 흘러갔다. 끝이 보이지 않던 한 달 살기도 반을 지내고 나니 남은 2주는 더없이 소중했다. TV에 방영된다면 자연다큐로 그려질 법한 아름다운 제주도에서 예능이나 찍고 있는 우리 모습마저도 웃기고 재미있다.
첫날부터 헤어 드라이기에 불씨가 붙은 소동, 샤워기 수압이 터져 한밤중에 고치느라 애먹은 사건, 손가락만 한 벌레 잡겠다고 비닐장갑, 고무장갑, 밀짚모자, 종이컵까지 완전무장했던 일 등 많은 사건사고가 있었다. 지나고 보니 이건 일상인 듯 여행인 듯 그 중간 어딘가의 기분으로, 설레기도 하고, 무료하기도 한 한 달 살기였다.
제주도에서의 마지막 해안 드라이브는 완벽했다. 한경 해안로를 따라 수월봉과 차귀도도 보았고, 신차 풍차 해안도 지나갔다. Earth, Wind & Fire의 September 노래, 달달한 아이스커피, 쫓아오는 차가 없어 시속 40킬로에 맞춘 드라이브, 그리고 카시트에서 잘 자고 있는 아이들까지. 모든 순간이 아름다워 보이게 되는 ‘마지막’이란 말이 가져다주는 마법 때문일까? 생각해보니 꼭 마지막이어서가 아니라, 제주도는 한 달 내내 아름답고 또 아름다웠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밖으로 나갔다. 하늘이 예쁘다. 구름은 양털 같고, 햇살은 오후 7시답게 시원했다. 시현이를 데리고 마당 의자에 기댔다. 바람 냄새, 흑 냄새, 여름 냄새, 그리고 무엇보다 예쁜 하늘이 대학생 때 여행한 아프리카에 대한 기억을 깨웠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기억과 지금 이 순간의 장면이 닮았다니. 먼 훗날 나는 지금의 제주도 기억들로 행복할 수 있겠구나 확신했다.
그렇게 한 달 살기를 무사히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공항에 마중 나온 신랑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탱탱하고 뽀얘진 피부, 생기 있는 눈빛. 이 사람 10년은 젊어진 느낌이다.
-육아 해방되니까 그렇게 좋았어? 회춘했네 정말!
-자기는... 많이 늙었네.. 풋
-뭐어!
신랑의 한 달 휴가는 그렇게 끝이 나고, 회춘했던 얼굴은 겨우 반나절만에 다시 쾡해졌다고 한다. 나름 일상으로 지내던 제주도 생활을 뒤로하고 다시 원래의 자리에 적응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오랜 시간을 살아온 우리 동네, 정든 우리 집에 적응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어색하고 반가운 기분은 현관에 들어온 그 순간뿐, 짐을 내려놓자마자 지나간 한 달은 꿈속에서 일어났던 일인 듯 몽롱하고, 아득했다. 신랑이 시현이와 몇 시간 동안 뛰어놀더니 피곤해진 얼굴로 묻는다.
한 달 살기... 또 언제 갈 거야?
돌아온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지쳐버린 신랑. 적응은 시현이와 내가 아니라, 신랑에게 필요한 듯했다.
꿈같은 한 달 살기, 다음엔 어디로 떠나볼까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