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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골디락스 Oct 28. 2022

자식을 잃은 부모는 짐승 소리를 내며 운다


내게는 ‘셀프 슬픔 측정기’가 있다. 슬프거나 불안하거나 마음이 힘든 일이 있을 때 이 사건이 1점부터 10점까지 중에 얼마나 슬픈 일인지 점수를 매겨 보는 마음속 기계다. 내가 지금의 남편과 처음 만나는 날 입었던 바지가 있다. 유니클로에서 세일할 때 2만 원도 안 되는 가격으로 샀던 카키색 바지다. 나의 까만 피부에는 이 색이 잘 어울린다. 게다가 엄청나게 편하다. 남편과 소개팅을 하는 날은 대학원 9월 새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새로운 기숙사 방에 이사 오는 날이었다. 그래서 이 카키색 바지에 목이 늘어난 사슴프린트 티셔츠를 입고 청소를 하다가 소개팅 시간이 되어서 부랴부랴 이 복장 그대로 장소에 나갔다.


정신을 차려보니 지금 그 소개팅 남자는 안방에서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자고 있다. 우리가 결혼 이듬해에 낳은 첫아들이 곧 초등학교에 들어가니까, 이 바지와 함께한 세월도 8년이 되어간다. 이 바짓가랑이에 조그만 구멍이 생겼을 때, 우리 집에 실과 바늘이 있었나? 하고 찬장을 찾아보는 내가 결코 궁상이 아니라고 설득하다 보니 서론이 길어졌다. 어쨌든 이 바짓가랑이 구멍이 점점 커지더니, 이제는 더는 헌 옷 수거함에도 넣지 못하게 되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이고이 접어서 일반 쓰레기봉투에 넣었다.


나의 감정이 날뛰는 망아지처럼 통제가 안 된다고 느낄 때가 종종 있다. 구멍 난 바지를 하나 버리는 일에도 마음이 좋지 않은 것이다. 이제는 카키색이라고 하기에도 애매한 국방색이 되어버렸지만, 일반 쓰레기봉투가 채워질 때마다, 그러니까 내 국방색 바지 위로 쓰레기가 얹혀질 때마다 마음이 안 좋다. 이럴 때면 나는 ‘셀프 슬픔 측정기’를 꺼내 든다. 지금 이 슬픔이 몇 점짜리인지 점수를 매겨 보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1점이다. 우리가 함께한 추억이라느니 이런저런 이유를 붙여보며 2점짜리 슬픔인 것처럼 생각해보려 해도 사실은 1점을 주기에도 무안한 슬픔이다. 지금 나의 감정에 0.5점짜리 슬픔이라는 성적을 매겨주고 나면 금세 괜찮은 마음이 든다. 나는 종종 1점짜리 슬픔에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붙여가며 5점짜리 슬픔으로 느끼는 오류를 범하곤 한다.


최근에 또 ‘셀프 슬픔 측정기’ 꺼내든 일이 있었다. 치과에 갔다가 집에 오는 길이었다. 대낮에 술을 마셨는지 중년 남녀가 싸우고 있다. 목에 핏대를 세우고 욕이 오간다. 결국 아저씨가 발길질하려 했고, 지나가는 청년이 말렸다. 이럴 때면 나는 숨이 막혀 온다. 갑자기 걸을 수가 없어서 벤치에 앉는다. 숨을 크게 쉬어 본다. 무섭고 불안한 마음이 든다. 다시 한숨을 쉬어 본다. “이 두 사람은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고, 이 두 사람이 싸운다고 하더라도 내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아니다. 이 두 사람은 나의 엄마·아빠가 아니다.”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한결 괜찮아진다. 엄마한테 이런 말을 한다면 ‘넌 또 왜 이 두 가지를 연관 짓냐면서’ 한 소리를 듣겠지만 벤치에 앉은 내가 두 번의 한숨을 쉬고 한 번의 생각을 거친 그것만으로도 완전히 괜찮아져서 다시 일어나는 걸 보면 나는 두 사건의 인과관계를 확신한다.


어쨌든 이 사건은 10점짜리 슬픔과 고통이라고 느꼈지만, 오류였고, 그저 1점짜리였다. 내가 1점짜리라고 생각하면 1점짜리인 것이다.


셀프 슬픔 측정기에는 업데이트 주기가 있다. 어떤 슬픔을 최고의 슬픔 즉, 10점짜리 슬픔으로 정할 것인지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아주 오랫동안 내가 10점으로 규정한 슬픔은 ‘미령의 슬픔’이 기준이었다. 미령이는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다. 중학교에 입학하면서 가족과 함께 제주도로 내려온 미령이는 어색한 제주도 사투리를 썼다. 그녀의 사투리가 제법 자연스러워진 중학교 2학년 어느 날이었다. 수업 시간에 갑자기 교장 선생님이 들어오셨고, 선생님이 조용히 미령을 부르더니 미령이는 울면서 가방을 싸고 나갔다.


다음날 장례식장에서 미령이를 보았다. 외동딸이라서 엄마와 함께 상주 자리를 외롭게 지키고 있는 미령을 보았을 때 나는 충격적이리만큼 슬펐다. 내가 장례식장에 누군가를 위로해 주려고 가본 것이 처음이었기 때문에 절을 몇 번 해야 하는지, 국화꽃을 어디에 놔야 하는 건지, 부의금은 어디에다 넣어야 하는 건지 몰라서 장례식장에 가기 전까지 걱정이 많이 되었지만, 분명히 미령을 보고 발이 얼어버린 이유는 이것 때문이 아니었다. 너무 슬퍼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때부터 줄곧 ‘부모를 잃은 슬픔’이 슬픈 레벨 10단계를 유지했다. 우는 미령을 보기 전까지는 ‘부모가 싸우는 것’이 슬픈 레벨 10이었지만. 부모가 물건을 던지며 싸우더라도 그건 고작 6점이나 7점짜리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또 한 번 슬픔 측정기가 업데이트되는 사건이 있었다. 벌써 10년 전이다. 19살 사촌 동생이 교통사고로 하늘나라에 가게 되었다. 집 앞 건널목을 건너다가 커다란 덤프트럭에 사고를 당했다. 사고를 낸 운전기사가 장례식장에 조문을 왔다. 우리 이모는 화를 내지도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이미 실신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날 자식을 잃은 부모는 짐승 소리를 내면서 운다는 사실을 알았다. 슬픈 측정기에 슬픔 레벨 10은 ‘자식을 잃는 것’ 이라고 업데이트 되었고, 아마 앞으로 다시는 업데이트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 집에는 티브이가 없다. 나는 뉴스도 보지 않고, 신문도 보지 않는다. 그저 하루짜리 뉴스거리라면 내가 꼭 알아야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꼭 필요한 뉴스는 내가 직접 찾지 않아도 필히 내 귀에 들어온다. 하루짜리 뉴스가 아닌 진짜 뉴스는 세상에 눈을 감고 내 마음만 들여다보고 있는 비겁한 글쟁이의 귀까지도 도착하기 때문이다


파리바게뜨 경기도 평택 공장에서 23살의 노동자가 사망했다. 소스 배합기에 상체가 빨려 들어갔고, 한참 뒤에야 발견되었다. 뉴스에 나온 노동자라는 단어가 혓바늘처럼 거슬린다. 23살의 노동자보다는 ‘23살짜리 아이’ 혹은 ‘23살 딸’이라는 단어가 더 적절한지도 모른다. ‘23살짜리 딸아이’를 보내는 장례식장에서 부모님은 파리바게뜨에서 보낸 빵을 두 상자 받았다고 한다.


뉴스 기사에서 자꾸만 짐승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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